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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토끼 Dec 27. 2020

갈색 머리 앤

자갈 머리의 그녀


넷플릭스 드라마 <빨간 머리 앤>


“안녕.”    

‘뭐지?’    


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던가. 학교 계단을 내려가는 데 딱 달라붙은 두 애가 수줍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본 애들이라 나에게 인사를 한 게 맞나 뒤를 돌아봤지만 나뿐이었다. 눈까지 마주쳤으니 고로 나한테 한 ‘안녕’이 맞았다. 확신이 선 후 나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지나쳤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고 한참이 지난 몇 년 후에야 그 인사의 숨겨진 뜻을 알게 됐다. 내가 혼혈인 줄 알았단다. 그제야 그때의 그 호기심 어린 눈빛이 이해가 갔다. 



난 태어날 때부터 밝은 갈색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살아온 내내 염색이나 질환이 있지 않는 한 나보다 밝은 갈색의 머리칼을 가진 애는 직접 본 적이 없다. 미용실만 가면 매번 염색한 거냐고 물어봤고, 학교에서도 매한가지였다. 초등학교 때까진 괜찮았지만 규정이 있는 중고등학교 때는 학생부에 붙잡히기 일쑤였다. 심지어 고등학생 때는 학생 주임 선생님께 확인증을 받아 학생부에 걸릴 때마다 보여줘야 했다. 다행히도 2학년으로 올라가고부터는 소문이 일파만파 나서 괜찮았지만 1학년 때는 고생 좀 해야 했다. 억울하게도 급식실만 가면 그렇게 선배들이 ‘쟤야 쟤’ 거리면서 곁눈질을 해댔다.



아니 그렇다 해도 혼혈인 줄 알았다니. 머리 색 때문에 선배로 착각해서 존댓말을 해오던 동갑 애들은 더러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국적으로 생겼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쌍꺼풀도 없는 데다 전체적으로 토종 한국인인데. 거기다 머리칼이 그렇게 탈색한 것 마냥 밝은 것도 아니다.



자갈 : 자연 갈색



한때는 머리 색이 남들보다 조금 더 밝은 게 나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자갈 머리가 (친구들이 이렇게 불렀다.) 매우 싫었던 적이 있다. 주목만 받으면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나로서는 학기 초반 반에 들어오는 선생님들 마다 내 머리 색을 논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나중에 친해진 친구들이 처음엔 내가 노는 애인 줄 알았다는 얘기도 더러 있었다. 첫인상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왜 검은 머리로 염색하지 않았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거다. 난 이상한 자존심이 센 편인데, 검은색으로 염색하면 왠지 지는 것만 같았다. 사실 주변에서 많이 말리기도 했지만.



그러던 스무 살 여름, 난 덜컥 검은 머리로 염색하고 만다. 주변 애들은 스무 살의 자유로 밝은 머리를 하는 판에 말이다. 막상 까맣게 덮고 나니 별 거 아니었다. 왜 학교 다닐 땐 겨우 이게 그토록 큰 일이고 자존심으로 여겨졌는지.



넷플릭스 드라마 <빨간 머리 앤>


<빨간 머리 앤>에는 주인공 앤이 자신의 빨간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하려다가 초록 머리가 돼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 모습을 보며 '빨간 머리 너무 예쁜데, 왜?'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그러다 문득 갈색머리를 뒤덮은 내 칠흑 같은 머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검정머리를 하고 집에 돌아온 나를 보던 엄마의 아쉬운 눈빛도 떠올랐다.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시간이 흘러 현재 난 다시 본래의 갈색 머리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내 자갈 머리가 마냥 싫지만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검은 머리를 모두 잘라내고 원래의 머리로 온전히 돌아왔을 때 이제야 맞는 옷을 입는 것 같았다. 반짝이는 햇살을 받으면 덩달아 따뜻하게 빛나는 내 머리카락이 예쁘기까지 하다.






어쩌면 과거의 난 내 머리색보다는 남들과 다른 옷을 입고 있다는 게 버거웠는지도 모르겠다. 염색으로 오해받아 학교에서 체벌을 당하고 들어온 오빠를 보며 화가 났다. 학기 첫날마다 혼 낼 준비를 하며 물어오는 선생님이, 믿지 않는 눈으로 곁눈질하던 시선들이. 그 모든 것들이 싫었던 거지 내 머리카락이 미운 건 아니었던 거다.



나에겐 머리 색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얼굴을 수놓은 주근깨 일수도 있고 특별한 눈동자 색일 수도 있다. 저마다 다른 옷을 입은 것뿐이지 틀린 건 아니다.  남들의 보편적인 시선 때문에 자신만의 특별함이 이상한 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은 그대이기에 아름다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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