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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토끼 Dec 29. 2020

오늘도 세상은 멀쩡히 돌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숨을 거두어도

드라마 <눈이 부시게>


11월의 어느 오후. 평소와 같이 무심한 표정으로 인터넷에 들어갔다가 순식간에 내 얼굴은 심각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오보이기를 바랐다. 차가운 세상에 따뜻한 웃음을 불어넣어주시던 분이 유명을 달리하셨다니. 불과 전날까지도 그분이 진행하셨던 영화 시사회를 보며 깔깔거렸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오보 아니야?’,‘너무 충격적이다’,‘거짓말‥.’  

  


곧 오보가 아님이 확실해졌다. 먹먹한 마음에 절로 목구멍이 욱신거리고 눈 주위가 붉게 물들어 갔다. 누구나 생의 끝은 어김없이 찾아온다지만 언제나 먼 곳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 날 저녁, 가족과 함께 치킨을 먹다가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세상은 여느 때와 같이 멀쩡히 돌아간다. 갑자기 주변의 모든 순간들에 괴리감이 느껴졌다. 식도를 넘어가는 음식물의 생경한 느낌도, 환하게 빛나는 식탁 위의 조명도, 푹신한 의자의 감촉이라든지 거실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가족의 대화 소리. 이 모든 것들이 어쩐지 조화되지 않고 어그러진 것만 같았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기사를 찾아보며 눈시울이 붉어지던 내가 아무렇지 않게 가족과 떠들며 식사를 하고 있다니. 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어쩐지 심각한 자괴감이 들었다.






세상은 멀쩡히 돌아간다. 이 말이 여태껏 잊히지 않는 이유는 선생님의 눈물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 같은 반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금은 누구인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아이는 수업 도중에 비보를 듣고 가방을 챙겨 나갔다. 어리벙벙했다. 그때 느낀 감정이 놀람이었는지, 덤덤함인 건지, 슬픔인지 잘 분간이 안 갔다. 다만 반에 감돌던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마냥 어리다고 하기엔 초등학교 고학년이면 죽음에 대해서 알 법도 하지만 나는 잘 몰랐다. 당시에 난 누군가와의 영원한 이별 같은 건 겪어보지 못했기에 더 그랬던 것도 같다. 가까운 사람이 이승을 떠난다는 게 어느 정도의 고통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 담임 선생님이 조금은 침체된 표정을 하고선 모두 눈을 감아보라고 했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눈치챈 건지 까불던 애들도 가만히 눈꺼풀을 내렸다. 한동안 아이들의 꼼지락거리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긴 침묵 끝에 선생님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선생님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날, 선생님은 온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밖에 나가면 장대비가 거세게 쏟아지고, 천둥이 쾅쾅 몰아치며, 번개가 번쩍이는 하늘 아래 사람들의 표정도 어두울 줄 알았다고. 하지만 장례식장에서 나왔을 때 정작 구름 한 점 없는 환한 창공이 선생님을 반겨주었다. 거리에 나가 보니 사람들은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걸어 다녔다. 선생님은 그런 활발한 인파 속에서 홀로 한참을 멈춰서 있어야 했다. 엄마가 내 곁을 떠나도, 세상은 멀쩡히 돌아가는구나. 그게 당연한 거지만 선생님에겐 너무도 야속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곧 선생님도 그 인파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 선생님을 쳐다보자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작게 맺힌 눈물방울을 훔치며 우리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선생님도 울 수 있는 존재 임을 이때 처음 깨달았다. 이 얘기를 듣고도 여전히 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지만 나도 모르게 선생님의 이야기가 마음 한구석에 콕 박혔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그 뒤 내가 겪어야 했던 두 번의 장례식과 여러 유명인의 마지막, 뉴스에서 들려오는 안타까운 사건·사고를 접할 때마다 '세상은 멀쩡히 돌아간다'라는 말이 끈덕지게 나를 쫓아다녔다. 내가 웃고 있는 지금도 누군가는 비탄의 늪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텐데. 혹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멀쩡히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서 원망하고 있지는 않을까.



역시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도 세상은 멀쩡히 흘러간다. 거리의 사람들은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나아가고 있다. 어김없이 동쪽 하늘에선 어둠을 갉아먹으며 해가 뜨고, 서쪽 하늘로 뉘엿거리며 해가 진다. 곳곳의 시곗바늘은 돌아가고 그에 따라 시간이 바뀐다. 내 마음이 무너진다고 해서 세상도 같이 거꾸로 뒤집히진 않는다. 이런 현실이 아프지만 우리는 그런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오늘도 세상은 멀쩡히 돌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숨을 거두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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