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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토끼 Dec 25. 2020

만만한 인간입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네가 그렇게 구니까 애들이 자꾸 널 만만하게 보는 거야.”        



학창 시절 내내 난 만만한 사람이었다. 아니 터놓고 말하자면 만만한 사람이기를 자처했다. 그게 오히려 편했으니까. ‘화’라고는 안 나는 애처럼, ‘눈치’라고는 없는 애처럼. 그렇게 굴었다. 예쁜 말과 착한 행동만을 하려고 애썼다. 어쩌면 그 모든 게 [가식]이라는 틀 안에서 발휘했던 행동인지도 모르겠다.



난 딱히 선한 인간이 아니다. 사소한 말에도 울컥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고, 눈치도 오히려 너무 빨라서 문제다.(눈치 없는 사람이 속도 편하다고.) 그럼에도 모두가 나더러 착해 빠졌다고 했다. 넌 화도 안 나냐고, 눈치도 없냐고.   



물론 만만한 사람이고 싶은 사람은 단연코 없을 거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 날 만만하게 생각하는 게 빤히 보일 때마다 마음에는 보이지 않는 생채기가 여기저기 생겨났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랑 얼굴 붉히며 부딪히는 건 더 끔찍했다.     



어떤 날엔 두 친구와 함께 학교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그중 한 친구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이길래 기분이 안 좋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래서 더 착하게 말을 걸었는데, 벌컥 성질을 부리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주위에는 어색한 기류가 (일명 ‘갑분싸’: 갑자기 분위기 싸해지다) 감싸 돌았다. 그 후 침묵 속에서 반으로 되돌아오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한 친구가 오히려 더 황당한 감정을 표출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이 얘기를 알게 된 당시의 친한 친구가 이렇게 말한 거였다. 네가 그렇게 구니까 애들이 만만하게 보는 거라고. 그리고 그런 다음 날 아침 그 화냈던 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유난히 밝게, 더없이 순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에 당연히 울컥했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줬다. 앞에서 말했듯이 난 그게 편했으니까.



드라마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



사실 편하다는 말조차도 멋들어지게 포장한 것뿐,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심했다고 보는 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난 아주 작은 반응 (이를테면 눈짓이라든지 말투, 미세한 행동 등)에 민감했다. 날 바라보는 시선, 꼬리표, 말. 나와 관련된 거라면 그게 뭐든 촉을 곤두세우고 예민하게 감지했다.



성격만이 아닌 외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난 예뻐 보여야 했다. 눈이 아무리 뻑뻑해도 온종일 도수 높은 안경 대신 렌즈를 꼈다. 화장 안 한 얼굴로는 집 앞에도 잘 안 나가고, 옷도 잘 입는 애여야 했다. 이런 나를 보며 아빠가 참 피곤하게 산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난 착해 보여야 했고, 못생기면 안 됐다. (그렇다고 내가 예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나쁜 아이이기보다는 만만한 사람이기를 바라는 마음. 조금이라도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어리석었다. 사람은 생각보다 남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다가도 정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요즘 들어서야 깨닫는 중이기에. 그 순간에는 관심이 많을 지라도 돌아서면 각자 자기 일에 신경 쏟기 바쁘다. 어제 친구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바로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솔직히 말하자면 이 사실을 깨닫는 현재에도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훨훨 자유롭지는 못하다. 지금도 생얼로 집 앞에는 나가지만 시내에는 못 나간다.  그러나 적어도 만만한 사람이기를 자처하는 건 사라졌다. 여전히 나쁘기보단 착해 보이고 싶지만, 좋은 사람과 만만한 사람의 개념은 확연히 다르다는 건 알고 있다.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에게까지 애쓸 필요는 없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니까. 그러니 이미  날 우습게 보는 이에게까지 마냥 착하게 굴 이유는 없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기에도 이번 생은 짧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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