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감추고 있는 그대에게
열여덟, 꽃이 만연하게 피어나는 4월이었다. 그 당시 나는 미술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학원이 층수를 확장하겠단다. 원래 있던 층은 다른 반과 1학년이, 새로 생긴 층은 디자인 반의 2·3학년이 사용하라고 했다. 디자인 반이었던 나는 얼떨결에 위층으로 짐을 옮겼다. (짐이라 해봤자 꼴랑 화구 박스 정도?) 뭐, 나쁘진 않았다.
다만 예상에는 없던 벽화를 그리게 됐다. 넓힌 층의 밋밋한 벽을 우리가 직접 채워나갔으면 한다고 원장님이 요청했다. (돌려 말하면 요청, 직설적이 게는 확정 후 통보였다.) 정확히는 입시로 바쁜 3학년 대신 2학년인 우리 학년이 맡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솔직히 귀찮기도 했지만 기대도 됐다. 틀에 박힌 입시 미술에 환기도 될 것 같았고 비로소 미술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게 와 닿기도 했다.
“이거 옷에 한 번 묻으면 잘 안 지워지니까 조심하고, 쓰고 나서 굳지 않게 붓 잘 씻어! ”
벽화는 잘 지워지지 않는 아크릴 물감으로 칠해야 한다. 때문에 채색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선생님들이 조심하라고 일러두었다. 나는 이미 친구들 사이에서 못 말리는 칠칠이였기에 걱정을 머금고 채색을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는 역시였다. 꽤 익숙해졌다고 안일하게 굴다가 물감이 튀기고 말았다. 그것도 하얀 옷, 심지어 검은색이었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앞치마를 매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뒤늦게 후회하면 뭐하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급히 물을 묻히고 문질러 봤지만 소용없었다. 옆으로 더 번지기까지 해서 심하게 볼품없어졌다. 끝내 그 옷은 회생 불가능이 되어 얼룩이 자리 잡아 버렸다.
이렇듯 사람의 마음에도 얼룩이 생길 때가 있다. 순하던 하얀 마음에 툭 튀어버린 검은 얼룩. 옷이 아닌 내면에 생긴 이 얼룩도 마찬가지다. 급하게 지우려 하면 할수록 얄궂게도 더 넓게 번져버린다. 몇몇 이들은 차마 이런 처참한 광경을 주변에 보일 자신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얗게 그 위를 덧칠해 덮어 버린다. 언뜻 보기엔 티가 잘 안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눈에 띄기 마련이다.
감추기만 하면 누군가 와서 들춰버리면 그만이다. 그 안에는 여전히 짙은 얼룩이 자리 잡고 있을 테니까. 마음에 자리한 검은 얼룩은 아크릴 물감처럼 잘 지워지지 않는 상처다. 이미 굳어 흉터가 돼버렸다면 급히 치료하고 싶어도 쉽지가 않다.
나 또한 누군가가 마음의 아물지 않은 검은 자국을 볼까 봐 지레 겁을 먹고 숨겼던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힘들 땐 힘들다고 고백하기도 하고, 먹먹할 땐 울기도 한다. 만약에 당신이 아픈 상처를 감추고 있다면 기억했으면 한다. 아픈 건, 쪽팔린 게 아니다. 한때 나도 이런 모습이 창피하다고만 생각했다. 나약한 내가 미치게 싫었다. 그러다 문득 돌이켜 봤을 때, 내가 다른 이의 상처에 대고 힐책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점차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마음에 새겨진 검은 얼룩을 용기 내 꺼내봤으면 한다. 다른 이의 어깨에 기대어 보기도 하고, 그럴 수 없다면 마음껏 소리 내 울었으면 한다.
"아픈 건 쪽팔린 게 아니니까. 어느 누구나 마음에도 얼룩이 질 때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