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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공방을 지켜라

억울한 철거 명령에 맞선 한지 공예가, 그녀의 법정 드라마

by 산뜻한

모든 사건은 개인이 특정되지 않도록 각색되었고, 이를 위하여 내용 중에 허구가 가미되어 있습니다.



"변호사님, 평생을 바친 공방인데…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으라니요. 그것도 제가 한참 전에 수리하고 가꿔놓은 것들을 걸고넘어지면서요. 밤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저희를 찾아오신 오서연(가명) 씨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가득했습니다. 그녀는 해안 도시의 오래된 골목길에서 '연우 한지공방'(가명)을 운영하며 전통 한지 공예의 맥을 이어온 장인이었습니다. 소박하지만 정성껏 꾸민 공방은 그녀의 삶 그 자체였죠. 하지만 몇 해 전, 건물을 새로 매입한 주인 강민준(가명) 씨가 거액의 손해배상금과 함께 공방 전체를 비우라는 소장을 보내오면서 그녀의 평화는 산산조각 났습니다.



1. 폭풍전야: "이 공방, 이제 내 겁니다. 당장 나가시오!"


강민준 씨가 제기한 소송 내용은 가혹했습니다. 그는 오서연 씨가 자신의 건물을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다며, 공방 전체(1, 2층)의 인도와 함께 과거 임차료 명목으로 약 2천만 원, 그리고 공방을 비울 때까지 매월 150만 원을 지급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오 씨가 수년간 공들여 가꾼 공간에 대한 권리는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했습니다. 더구나 강 씨는 오 씨가 건물을 사용하며 발생시켰다는 '손해'까지 거론하며 압박했습니다.



2. 실타래처럼 얽힌 과거: 공방의 역사와 피고의 항변


오서연 씨의 이야기는 강 씨의 주장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구두 계약과 땀의 가치: 오 씨는 수년 전, 건물의 전 주인인 최혜진(가명) 씨와 구두로 임대차 계약을 맺고 공방을 운영해왔습니다. 당시 건물은 상당히 노후화된 상태였고, 오 씨는 공방 운영에 필수적인 대규모 수리를 자비로 진행했습니다. 전통 한옥 양식의 지붕 보수, 바닥 난방(온돌) 공사, 작업 공간 개선 등에 약 4천 8백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비용을 투입했죠. 이는 단순한 인테리어를 넘어 건물의 가치를 보존하고 상승시키는 필수적인 투자였습니다.


새 주인과의 미묘한 관계: 새 건물주 강민준 씨는 처음에는 오 씨에게 호의적인 듯 보였습니다. 건물 상태를 확인한 후에도 별다른 언급 없이 오 씨가 계속 공방을 운영하는 것을 용인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오 씨는 이를 일종의 사용대차(무상 사용 허락)로 믿고, 이후에도 공방 운영에 필요한 시설 보수(예: 해충 방지를 위한 창호 교체, 작품 보관용 습도 조절 장치 설치 등)에 약 250만 원을 추가로 지출했습니다.


점유 범위에 대한 다툼: 강 씨는 오 씨가 1층 공방 전체와 2층 주거 공간까지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오 씨는 1층은 공방 중에서도 특정 작업실(약 15㎡ 규모의 염색실)과 손님맞이 공간 일부만을, 2층은 원래부터 주거용으로 사용하던 다락방만을 점유하고 있다고 항변했습니다. 나머지 1층 공간은 강 씨가 매입 후 자유롭게 드나들며 실측까지 했던 곳이라는 게 오 씨의 주장이었습니다.


오 씨는 자신이 지출한 막대한 수리 비용을 근거로 건물에 대한 유치권을 주장하며 강 씨의 인도 요구에 맞섰습니다.



3. 반격의 서막: 증거와 법리로 쌓아 올린 방어선


저희는 오서연 씨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치밀한 법적 대응에 나섰습니다.


점유 사실의 명확화: 우선 강 씨가 주장하는 '1층 전체 점유'가 과장되었음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오 씨가 실제 사용하는 공간은 1층의 극히 일부이며, 강 씨가 이를 명확히 특정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법원 역시 이 부분을 받아들여, 원고가 계쟁 부분 전체를 피고가 점유하고 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부당이득 반환 범위의 축소: 설령 오 씨가 일부 공간을 사용한 것에 대한 사용료 지급 의무가 발생한다 해도, 그 범위는 실제 점유한 면적과 합리적인 임료 수준을 기준으로 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강 씨가 청구한 금액은 과도하며, 특히 점유하지도 않은 공간에 대한 책임까지 묻는 것은 부당함을 강조했습니다.


유치권 주장의 어려움과 현실적 대응: 오 씨가 건물에 투입한 비용은 명백했지만, 전 주인과의 '구두 계약'에 의한 것이었고, 새 주인인 강 씨에게 그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법적 요건(예: 비용 지출로 인한 현존 가치 증가의 명확한 입증, 점유의 적법성 등)을 엄격하게 증명하는 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법원은 임대차 계약 및 비용 지출, 사용대차 계약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4. 판결, 그리고 남은 과제: 전부 이길 수는 없었지만...


길고 지루한 법정 공방 끝에, 재판부는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2층 인도 및 일부 금전 지급: 오서연 씨는 2층 주거 공간을 강민준 씨에게 인도하고, 해당 공간 사용에 따른 과거 사용료(부당이득)로 약 650만 원, 그리고 인도 완료일까지 월 약 45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1층에 대한 청구 대부분 기각: 그러나 강민준 씨가 주장했던 1층 공방 전체에 대한 인도 청구 및 과도한 임료 청구는 대부분 기각되었습니다. 법원은 오 씨가 1층 전체를 점유했다는 강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 씨가 인정한 소규모 특정 공간(염색실) 외 부분에 대해서는 강 씨의 청구를 배척했습니다. 이는 오 씨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유치권 불인정: 안타깝게도 오 씨가 주장한 유치권은 증거 부족 등을 이유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오서연 씨는 일부 패소했지만, 강민준 씨의 당초 청구에 비하면 훨씬 축소된 책임을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공방의 핵심 공간인 1층 작업실 대부분에 대한 부당한 인도 요구를 막아냈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5. 장인의 눈물: 법의 벽 앞에서 느낀 한계


오서연 씨는 판결 후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습니다. 평생을 바쳐 일군 공방에 쏟아부은 정성과 비용이 법적으로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컸지만, 동시에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는 안도감도 내비쳤습니다. 그녀는 "법이라는 게 참 어렵네요. 그래도 변호사님 덕분에 공방을 완전히 빼앗기지는 않아서…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죠"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6. 변호인의 변(辯): 서류 한 장의 무게를 기억하며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특히 구두 계약의 위험성, 그리고 건물에 상당한 비용을 투입할 경우 반드시 서면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또한, 소유주가 변경될 경우 기존의 권리관계를 명확히 정리하고 새로운 소유주와 서면으로 합의하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오서연 씨의 유치권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저희는 의뢰인이 부당하게 과도한 책임을 지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결과적으로 원고의 청구를 상당 부분 방어해낼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완벽한 승리가 아니더라도, 의뢰인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정의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것이 변호사의 중요한 소임임을 되새긴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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