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가 어떻게 배임이 되는가
스타트업이나 빠르게 성장하는 기업의 임원이라면 누구나 ‘속도’의 중요성을 체감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때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죠. 하지만 그 ‘과감함’이 회사의 공식적인 절차를 뛰어넘을 때, 예상치 못한 법적 문제의 불씨가 될 수 있습니다. “회사를 위한 최선의 결정이었다”는 항변이 ‘업무상 배임’이라는 무거운 범죄 혐의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제가 담당했던 사건을 바탕으로, 회사를 위한 ‘선의’의 결정이 어떻게 위험한 법적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건강한 회사 운영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쉽고 명확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혁신적인 신기술 앱으로 시장의 주목을 한 몸에 받던 IT 스타트업, ‘혁신 코리아’. 창업자 박 대표와 초기부터 사업을 함께 이끌어 온 이 이사는 회사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국내 시장이 안정되자, 열정 넘치는 이 이사는 동남아 시장 진출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습니다.
“대표님, 지금이 적기입니다. 더 망설이면 경쟁사에 시장을 뺏깁니다!”
하지만 신중한 성격의 박 대표는 조금 더 시간을 갖고 내부 시스템을 다지길 원했습니다. 눈앞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 이 이사는 결국 몇몇 핵심 직원들과 함께 ‘결단’을 내립니다. 박 대표의 명시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사회나 주주총회 결의 같은 공식 절차 없이 비밀리에 동남아 현지에 ‘혁신 글로벌’이라는 별도 법인을 설립한 것입니다.
물론 이 이사에게도 명분은 있었습니다. 그는 ‘혁신 코리아’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혁신 글로벌’이 사용할 앱의 상표권은 모회사인 ‘혁신 코리아’의 이름으로 등록했습니다. ‘나는 개인의 이익이 아닌, 회사의 성공을 위해 앞장선 것뿐이다’라고 생각했죠.
‘혁신 글로벌’은 초기에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났습니다.
첫째, ‘혁신 글로벌’에서 발생한 수익이 ‘혁신 코리아’로 투명하게 흘러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둘째, ‘혁신 코리아’의 자금과 인력이 ‘혁신 글로벌’의 운영비와 마케팅 비용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셋째, 가장 결정적으로, ‘혁신 코리아’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구축한 핵심 자산인 회원 데이터베이스가 무단으로 ‘혁신 글로벌’의 영업에 활용되었습니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박 대표는 법적 대응을 시작했고, 이 이사와 관련자들은 ‘업무상 배임’ 혐의로 수사 선상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수사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수사 기관은 "회사가 공식적으로 동남아 시장 진출을 하지 않기로 결의한 적이 없으므로, 이 이사가 회사의 기회를 빼앗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불송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즉, 대표가 반대한 것은 개인적인 의견일 뿐, 회사의 공식적인 결정이 아니었기에 이사의 '임무 위배'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회사가 잘 되면 좋은 거 아닌가요? 꼭 그렇게 딱딱하게 절차를 지켜야 하나요?”
많은 경영자들이 가질 수 있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법은 회사의 의사결정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업무상 배임죄’는 다음의 요건이 충족될 때 성립합니다.
1.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 (회사의 대표, 이사, 감사 등)
2.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를 하여
3.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4. 사무의 주체(회사)에 손해를 가한 때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2번,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입니다. 회사의 이사나 감사는 주주 전체의 이익을 위해 선량한 관리자로서 회사를 운영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의무를 이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바로 정관과 법률에 정해진 절차(이사회, 주주총회 등)에 따라 투명하게 회사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회사를 위한 일’이라고 스스로 믿었더라도, 이사회 결의와 같은 공식적인 절차를 건너뛰고 독단적으로 중요한 사업(해외 법인 설립, 자산 이전 등)을 추진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혁신 코리아’ 사례에서 이 이사가 상표권을 모회사 이름으로 등록한 것은 ‘선의’를 보여주는 정황이 될 수는 있겠지만, 대표이사의 반대 의사를 무시하고 공식 절차 없이 비밀리에 회사의 핵심 자산과 기회를 이용해 별도 법인을 세워 운영한 행위의 ‘위법성’을 없애주지는 못합니다. 결국 이 사건은 대표가 '개인적으로 반대'했을 뿐, '회사가 공식적으로 사업을 거부'한 기록이 없다는 점 때문에 법적 다툼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결국 절차를 무시한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 최근 정부가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비판을 받아온 형법상 배임죄 폐지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경영 판단의 자율성을 존중하자는 취지일 뿐, 회사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하거나, 회사의 사업 기회를 빼돌리는 행위까지 면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 입법을 통해 처벌의 구성요건을 명확히 하더라도, 이사회 결의 등 적법한 절차를 무시한 임원의 행위는 여전히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억울한 경영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기본’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감정적인 신뢰 관계에 기대기보다, 명확한 시스템과 기록으로 말해야 합니다.
꿀 TIP 1. 결정은 반드시 ‘회의록’으로 남기세요.
중요한 의사결정은 반드시 이사회나 주주총회를 거치고, 그 결과를 회의록으로 명확히 남기는 것이 경영 분쟁의 가장 확실한 예방책입니다.
회의록은 회사의 공식적인 ‘알리바이’입니다. 훗날 어떤 결정에 대해 문제가 생겼을 때, “이 결정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 모든 구성원의 동의하에 이루어졌다”고 증명해 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이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려는 일부 경영진으로부터 회사를 보호하는 장치이자, 동시에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결정을 내린 경영진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패가 됩니다. 특히 ▲신규 사업 진출 및 철수 ▲거액의 자금 차입 및 투자 ▲자회사 설립 ▲중요 자산의 취득 및 처분 등과 같은 사안은 반드시 회의록을 작성하여 보관해야 합니다.
꿀 TIP 2. ‘절차적 정당성’이 ‘결과의 성공’보다 중요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 같은 사업 기회라도, 정해진 절차를 무시하면 그 자체로 법적 책임을 묻는 근거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과만 좋으면 다 괜찮다’는 생각은 법정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성공적인 결과가 불법적인 과정을 정당화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사의 임무는 단순히 ‘수익 창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규칙에 따라 모든 주주의 이익을 위해 투명하게 회사를 운영하는 것’에 있습니다. 절차를 무시한 결정은 설령 단기적으로 이익을 가져오더라도, 장기적으로는 회사에 더 큰 법적 리스크와 분쟁의 씨앗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