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를 퀴어하게 여행하는 법 1
* 이 글은 도쿄퀴어페레이드가 열린 2024년 4월 19일부터 22일에 걸친 도쿄 여행기입니다.
여행 전날은 기대감에 잠을 못 자는 버릇이 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가 비행기에서 곯아떨어지곤 하는데,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서 코스트코 신상으로 나온 "잠 잘 오는 영양제"를 꿀꺽하고 잠들었다. 영양제의 광고문구는 다 뻥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오십이 넘으니 흐린 눈을 하고 지나치기가 갈수록 힘들어진다. 영양제 덕분인지 최소 3시간 정도는 잔 듯했다. 이만해도 감지덕지.
올 2월 대한항공 모닝캄 회원이 되었기 때문에, 마일리지 욕심에 대한항공을 이용하기로 했다. 목요일 출발, 월요일 복귀 여정에 1인 요금이 53만 원이다. 아무리 엔저시대라고 하지만, 마지막 도쿄여행이었던 2019년에 비하면 비행기삯도 호텔비도 많이 올랐다. 그래도 한번 불붙은 해외여행에 대한 욕구는 잠재울 수 없었다. 2월 하쿠바, 2월 대마도에 이어, 4월 도쿄. 80일 안에 일본만 세 번째다. 일본불매와 코로나 핑계로 바싹 쥐고 있던 고삐를 그야말로 탁 놓아버렸다. 당분간 일본 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게, 뭐든지 너무 강하게 틀어막으면 그 반동이 이렇게나 크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 있게 외치지 말자. 시간은 흐르고, 난 변하고, 세상은 그보다 더 빨리 변한다. 그저 휩쓸리지 않게, 한편으로 '적당히 겸손하게 주장하며' 살아가야겠다 다시 깨닫는다.
아침 9시 20분 비행기다. 8시쯤 롯데리아에서 버거를 사 먹었는데,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기내식이 나왔다. 마치 버거세트를 해체한 양, 빵과 쇠고기패티와 감자튀김이 나왔다. 다음에도 비슷한 시간대의 비행기를 타면 아침은 걸러야지. 심지어 기내식이 더 맛있었다.
'밀리의 서재' 앱에서 다운로드한 일본여행기를 읽는데,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방긋방긋 웃으며 찍은 사진들이 많았다. 작가가 직접 체험하고 교류한 사진이 증거처럼 나열되니 글이 훨씬 더 생생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젊고 해맑은 작가의 모습이 이뻤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보다가 이내 깨달았다.
"아, 나는 커플여행기를 책으로 내도 저렇게 얼굴을 공개할 수는 없겠구나."
독자들은 내 얼굴 따위에 관심도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다르다. 이성애자 작가들은 좋겠다. 극'I'와 범죄자만 아니면 책에 얼굴도 넣고, 오프라인이건 유튜브건 북토크 홍보도 맘껏 할 수 있으니까. 대박 치면 방송도 타고 말이지. 그런 '뾰족한 생각'이 튀어나왔다.
이야기를 발전시켜 보면, 얼마 전 읽은 <아버지의 해방일지> 속 인물들이 그렇다. 연좌제가 있던 시절이라, 빨치산의 가족이라는 정체성은 작중 인물들의 꿈을 앗아간 원흉으로 묘사된다.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없으니 공부를 해봐야 소용이 없다 생각하고 고등학교 시절을 방황하며 보냈고, 빨치산의 딸이란 사실이 들통나자 결혼전날 파혼당하기까지 했다. 그 부분을 읽자마자 비행기에서 들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에세이스트는 누구보다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커밍아웃이란 장애물이 목에 걸려있는 성소수자 작가가 과연 얼마나 솔직할 수 있나 싶다. 그냥 에세이스트를 하질 말아야지. 빨치산의 자식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여러 대중매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커밍아웃한 작가들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성애자 작가라면 겪지 않았을 장벽들을 하나하나 돌파하느라 오늘도 고군분투할 그들에게 뜨거운 응원을 보낸다.
우리 숙소는 신주쿠 2초메에 있는 'POD SELECT' 호텔인데, 게이바 거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위치 대비 가격이 저렴하고, 비싼 도쿄의 택시비 걱정 없이 늦도록 게이바에서 놀 수 있고, 신주쿠역에서 가까워 걸어갈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공항에서 신주쿠까지 환승 없이 가려면 나리타익스프레스(NEX, 넥스)를 타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다. 한국에서 미리 예약했고, 나리타공항에서 ATM기로 표를 찾았다. 좌석지정이 되어 있지 않아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 좌석을 배정받았다. 하지만 좌석이 반도 차지 않아서 굳이 좌석지정을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넥스 표값이 폭등했다더니, 비싸서 인기가 없는 듯했다.
넥스를 타자마자 객차 짐칸에 트렁크를 넣었다. 도난방지용 자물쇠를 트렁크에 연결한 다음 비번을 설정하는 시스템인데, 자물쇠를 채우다가 나도 모르게 다이얼을 돌렸나 보다. 어영부영 당황하는 사이 다이얼은 계속 돌아가고 결국 비번을 알 방법이 없어졌다.
이렇게 저렇게 해도 자물쇠를 풀 수 없어 땀을 퐁퐁 흘리며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곧 오 년전에 넥스를 탔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빼빼 마른 할아버지 직원이 돌아다녔었다!
"걱정 마, 내 말대로 조금 있으면 차장님(?)이 오실 거야."
오스씨를 안심시키며 그냥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열차가 출발하고 조금 지나자 직원이 나타났고, 상황을 설명하니 여권을 확인한 후 만능키로 자물쇠를 열어주었다.
그래, 이래야 해외여행이지. 시작은 언제나 우당탕탕이다.
우리가 앉은 객차는 진짜 사람이 적었는데, 앞 좌석에 딱 봐도 게이처럼 보이는 남자 두 명이 앉아있었다. 일명 "G-men(덩치 좋은 게이들을 타깃으로 한 게이잡지)에서 금방 빠져나온 것 같은 스타일"이었다.
한국, 중국, 대만, 일본 게이들 중에서, 자신을 '베어'라고 정의하는 친구들은 대체로 이렇게 꾸민다. 짧은 머리, 짧은 수염을 정갈하게 다듬으며, 흔히 아이비룩이라 불리는 폴로, 타미힐피거, 캔터베리 같은 브랜드 옷(그들 사이에서 "교복"이라 불린다)을 입고 운동화나 워커를 신는다. 그들의 커다란 몸에 맞는 사이즈를 생산하는 캐주얼 브랜드가 대체로 저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위의 네 나라는 피부색도 비슷해서 저렇게 꾸민 '베어 게이'는, 겉으로는 국적구분이 불가능하다. 상대적으로 털이 많이 나는 일본과 대만에 주로 서식한다고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종로의 게이바 등지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앞 좌석 그들은 머리카락과 수염 각도까지 칼같이 잘 다듬었고 아주 비싼 스트릿 브랜드를 걸치고 있었다. 어디 잘 나가는 대만의 고고보이쯤 되는 걸까? 힐끔힐끔 훔쳐보며 고놈들 잘생겼다 흐뭇한 미소를 지었는데,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그 옆을 지나가다가 한국어가 들려서 깜짝 놀랐다. 같은 비행기였을 확률이 높으니 어쩌면 부산 친구들일지도 몰랐다. 부산에서도 저런 인물이? 오호라!
"우리처럼 퀴어퍼레이드에 참석하는 애들일까?"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공공장소에서 초면에 너 게이지? 하고 묻는 것도 얼척 없는 일이라 그냥 모른척했다. 그런데 나중에 넥스에서 내린 후 숙소가 있는 2초메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그 친구들이 앞서 걷는 게 보였다. 그럼 그렇지. 2초메 거리에서건 축제가 열리는 공간에서건 다시 보면 그땐 아는 척해야지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이후 그들을 보지 못했다.
'POD SELECT' 호텔은 들어가는 입구에 무지개가 그려진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게이프렌들리 호텔이라는 징표일까? 반가운 마음에 파파고로 그림 번역을 해보니 코로나 방역을 철저히 했다는 안내문이었다. 나중에 보니 그 동네 음식점이나 게이바 입구에도 같은 안내문이 있었다. 어쩌면 시부야 보건소가 동네 특성을 반영해서 안내문에 무지개를 넣은 건지도 모르겠다. 시부야구는 일본 지자체 중에서 동성 파트너십 인정 정책을 가장 먼저 시행했을 정도로 게이친화적이기로 유명하다.
호텔의 장점은 사실상 위치가 다였다. 일본 호텔 아니랄까 봐 방도 작고, 화장실도 작았지만, 무엇보다 트윈침대를 예약할 수 없어서 더블침대를 예약했는데, 침대가 충격적으로 작았다. 과연 둘이 나란히 누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여서 걱정이 들었다.
"우리 오늘 잠이나 잘 수 있을까?"
내 걱정에 오스씨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괜찮아 보이는데? 옛날에는 더 작은 데서도 잤는데 뭐."
그러고 보면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내가 지금보다 10kg의 몸무게가 더 나가던 시절에는 침대 크기 따위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같이 누울 자리만 있으면 그냥 딱 붙어서 시시덕거리고 조물딱거리다가 자곤 했다. 같이 살면서 매트리스를 교체할 때마다 점점 사이즈가 커졌는데, 지금 우리는 에이스침대가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침대(라지킹)에서 잔다. 아무리 뒹굴어도 몸이 부딪칠 염려가 없다. 솔직히 편하다. 호텔 예약할 때도 검색 조건으로 트윈침대를 체크한다.
내가 먼저 눕고 오스씨에게 옆에 누워보라고 했다. 어깨가 딱 붙는다. 편하게 자려면 내가 몸을 모로 세우고 오스씨가 그 사이에 쏙 들어오는 게 좋겠다 싶다. 아이고, 이번 여행 고생깨나 하겠구나, 겁을 먹었는데, 막상 자보니 웬걸? 좁다는 느낌도 없었고, 잠도 잘 잤다. 오랜만에 꼭 껴안고 조물조물도 하고 말이지. 역시 사랑하면, 다 된........ 다.
비행기 : 대한항공. 김해공항 오전 9시 20분. 이 시간대 비행기가 도쿄 여행 계획을 알차게 운영하기 가장 좋은 거 같다. 11시 반쯤 나리타공항에 도착해, 1시간 반 넥스를 타고 신주쿠에 이동, 점심 먹고 호텔에 들어가면 3시 체크인 시간에 맞추기 적당하다.
넥스 : 요즘은 다른 교통수단이 더 애용되는 것 같은데, 신주쿠 2초메에 숙소가 있으면 그냥 넥스가 가장 편한 거 같다. 넥스 승강장에서 신주쿠 2초메까지 트렁크 끌고 가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지하도로 들락날락할 필요 없이 사람 많이 안 다니는 인도로 쭉 이동할 수 있다.
'POD SELECT' 호텔 : 작고 낡은 호텔이다. 밤에 게이바에서 놀기에 최적화된 위치. 저렴한 값이 최고의 장점이고, 호텔 홈페이지에서 예약하는 게 가장 싸다. 바로 결제할 필요 없이 예약 가능. 메일이 오면 나중에 호텔에 메일 보여주고 현지 결제하면 됨. 방이 상당히 좁으니 덩치가 있는 분들은 평수 잘 계산해서 방을 잡으시길. 1인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