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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Apr 23. 2024

4.일본 운전은 위기 대응 능력부터!

대마도에서 운전 연수를 하다

토요코인 이시하라점은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는데, 그건 주차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텔숙박객에게도 하루 500엔의 주차비를 받는데, 그조차도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을 수 없다. 대신 호텔 맞은편에 있는 대마도 최대의 쇼핑센터인 티아라몰 지하주차장에 주차할 수 있다.


우리는 한 푼이라고 아껴보겠다고 90분마다 차를 넣었다 뺐다 했다. 돈도 아끼고 주차 연습도 실컷 하고 일석이조. 하지만 다시 가면 그냥 넣어두고 놀러 다닐 것 같다.


오스씨는 평소에도 아침을 많이 안 먹어서 우리는 가급적이면 호텔 조식을 신청하지 않는다. 토요코인은 조식 값이 매우 싸서 신청을 했는데, 역시나 오스씨는 빵 한 조각과 샐러드 정도만 입에 넣었다. 나는 남이 차려주는 밥상은 다 좋아하는 성격이라 먹고 싶은 것을 두 번씩 가져와 실컷 먹었다.

배가 부르니 소화도 시킬 겸 아침 산책에 나섰다. 이즈하라를 관통해 흐르는 개울가에는 수양버들이 멋지게 심어져 있다. 아직 새싹이 나오지 않아 앙상한 가지만 늘어져있어도 꽤 그럴듯한 정취가 느껴졌다. 연두색 새순이 올라와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리는 봄날, 아니면 짙은 녹음으로 물든 가지가 미친 듯이 휘날리는 태풍 오는 어느 여름날에 보고 싶은 풍경이다.

섬에서는 귀한 패밀리마트.


그림으로 그린 낡은 간판이 정겹다


촘촘히 쌓아 올린 돌담이 멋지다

사실 그냥 돌아다니면 "볼 거 없다"라고 냉소하기 딱 좋은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부러 좋은 것들을 쥐어짜 내고 싶은 게 여행자의 마음이다.

"일본 골목길은 전선이 사방팔방 엉켜 늘어서있는 게 왠지 멋져 보여. 사이버펑크 느낌이 난달까?"

"맞아. 우리나라는 지하에 다 매설해서 맨날 땅 파헤치고. 도로에 땜빵 투성이고."

전선에 걸린 검은 비닐이 귀신옷자락처럼 휘날리는 살풍경한 장면은 애써 기억에서 지우고 이런 대화를 나누는 식이다.


어느덧 히타카츠로 넘어갈 시간이 되었다. 올 때는 왼쪽 내륙으로 난 길로 왔는데, 갈 때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오른쪽 바닷가 길로 방향을 잡았다. 단풍철은 아니지만 그쪽으로 일본에서 제일 큰 은행나무도 있고 슈시강 단풍길이 있어서였다. 최종 목적지는 물론 대마도에 오면 반드시 들르는 미우다 해변이다. 매번 여름에만 왔기 때문에 겨울의 미우다 해변도 보고 싶었다.

네비에 목적지를 미우다 해변으로 놓고 달렸다. 중간중간 쇼핑몰이 보이면 들러서 고양이 츄르도 사고, 마실 것도 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올 때 봤던 풍경이 연이어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아차 싶어서 구글맵을 켰더니, 아이고! 바닷가길이 아니라 내륙길로 주행하는 중이었다.

처음부터 목적지를 단풍길로 해뒀어야 했는데, 한 뼘 생각이 모자라 일정이 어그러지고 말았다.

"지금 가봐야 단풍도 없을 텐데 뭐. 가을에 또 오자."

애써 신포도 논리로 속을 달래며 미우다 해변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 밖으로 나갔는데, 세찬 바람이 얼굴을 마구 때렸다. 투명하게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는 에머럴드빛 바다를 보고 싶었는데, 파도가 연이어 밀려와 하얀 포말만 가득했다. 심지어 바람에 실려온 모래까지 따갑게 얼굴을 때려댔다. 미우다 해변에 붙어있는 온천까지 정기휴무. 이상하게 되는 게 없는 하루였다.

"뭐가 참 안 도와준대, 그치?"

"그냥 항구 근처에서 밥 먹고 커피나 마시자."

결국 히타카츠 시내로 들어왔다. 배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이 남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딱 24시간만 빌려서 돈이나 절약할 걸, 후회됐지만 날씨의 변덕을 누가 예측할 수 있을까. 이럴 땐 빨리 잊고 즐길거리를 찾으러 다니는 게 좋다.


그런데 너무 일찍 도착해서인지 이제 막 부산발 배에서 내린 관광객들과 동선이 겹쳐서 맛집은 이미 만석이었다. 골목골목 찾아들어간 경양식 집도 사람이 가득해 주문을 하고도 한참을 기다려 음식을 받을 수 있었다. 음식맛도 SO~SO~. 날씨가 받쳐준다면 밸류마트에서 도시락으로 때우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먹고 간식거리를 사서 차로 돌아와 뾱뾱 눌렀는데 차문이 열리지 않았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

마지막 터널을 통과한 후 전조등을 껐었나?

둥그렇게 생긴 차키에서 비상열쇠를 분리해 내고 수동으로 차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동을 걸어봤지만 역시나 먹통. 배터리 방전이 확실해졌다.

다행히 유유렌터카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일본 내에서 전화를 걸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냥 렌터카 사무실까지 걸어갔다. 좁은 시골 동네 만세!

손짓발짓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주차장으로 가서 배터리 충전을 시도했지만 차가 낡아서인지 쉽게 되지 않는다. 한 십 여분을 씨름하던 직원은 결국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곧 보다 연배 있는 직원이 왔다. 그 역시 한참을 낑낑 고생하다가, 휴우... 마침내 푸르르르 시동이 걸렸다.

"이꾸라데스까(얼마입니까?)"

"나이데스.(아니에요.)"

이 정도는 풀커버보험에 포함된 서비스인 듯했다.

시동이 처음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다시 시동이 걸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50여분. 그 사이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1. 마을이 아니라 산 쪽이나(이를테면 단풍길 같은 곳) 사람 없는 곳에서 시동이 꺼졌다면 어땠을까.

2. 지금처럼 일찍 히타카츠에 돌아오지 못하고 가려고 했던 곳을 다 돌아다니다 배 시간이 임박했을 때 시동이 꺼졌다면 어땠을까.

3. 렌터카업체가 가까이 있길 망정이지 멀리 떨어져 있어 전화를 해야 했을 상황이면 어땠을까? 전화 거는 법도 모르고, 상황을 설명할 일본어도 딸리고...

아직은 차가운 겨울 날씨에도 당황한 나머지 땀을 한 바가지나 흘리며 이런 생각을 떠올렸고, 결론적으로 단풍길에 접어들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날씨가 나빠서 미우다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아 다행이다, 풀카바 보험 들어둬서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인생지사 참으로 새옹지마가 아닌가.


일본 렌터카 여행.

교통신호 숙지하고 운전감각만 익히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중요한 위기대응능력부터 키워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만약 한겨울에 스키 장비 싣고 하쿠바로 가다가 눈 펑펑 오는 날 시골길 어딘가에서 차가 퍼졌다? 으윽, 상상조차 하기 싫다.


다시 시동이 걸린 차를 타고 이제 렌터카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할 주유하기에 도전했다. 렌터카는 반납할 때 무조건 만땅으로 채워서 반납해야 한다. 일본의 주유기에는 '만땅' 버튼이 있다는 말을 듣고 눌러보고 싶었는데, 근처 주유소에 도착하니 직원이 나왔다. 셀프가 아니었다.

"제가 직접 주유해보고 싶은데요.."

라는 말을 일본어로 구사할 수 없어, "만땅 구다사이"라고 외쳤다.

그나저나 한국은 차에 기름을 가득 실으면 연비가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누가 기름 넣어준다고 할 때 말고는 만땅하는 문화가 아니다. 일본은 자동차 선진국이고 연비 문제에 민감한 나라인데(프리우스를 만든 나라), 왜 만땅 버튼이 있을까? 허세 문화가 있나? 여기서 일본에 대한 호기심 하나를 더해본다.


우여곡절 끝에 여행을 마치고 이제 돌아가는 배를 타는 것만 남았다. 조금 전 미우다 해변에서 본 파도가 걱정됐지만 방파제로 보호되는 항구에서는 파도를 실감할 수 없어 어제 사 둔 멀미약을 먹고 여행의 마무리 수다를 즐겼다.

그리고 배를 탔고, 내해를 벗어나자마자 미친 롤러코스터가 시작됐다. 귀에 꽂은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음악을 더 차분한 것으로 바꾸려고 핸드폰을 조작하다 그제야 발견한 문자. 두 시간 전에 온 것이었다.

아이고... 어쩌면 대마도에서 하루 더 묵었을 수도 있었겠구나. 이 배에 탑승한 승객들과 선사 관계자들은 꽤나 심각했는데, 우리만 몰랐다. 어쩌면 미리 안 본 것이 다행이었다. 차가 퍼진 데다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정보까지 더해졌다면 남은 시간 내내 걱정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안심이 되는 상황은 아니다. 적혀있는 대로 여차하면 다시 대마도로 회항을 할 수도 있으니까. 제발 무사히 부산에 도착하게 해 달라 기도하며 뒤집어지는 속을 달래는데, 건너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토를 하기 시작했다. 올 때 내가 멀미가 났다고 하자, "난 아무렇지 않던데?" 라며 부산 토박이임을 증명했던 오스씨조차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해로 나가자 배는 더욱 요동을 치기 시작했고, 사방에서 고통의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난번 니나호에서의 체험이 아메리카노라면 이건 라떼에 바닐라시럽까지 얹은, 아주 찐한 배 멀리였다.

'왜 내 돈 내고 이런 체험을 하는 거지? 내가 두 번 다시 대마도에 오면 성을 간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정신줄을 부여잡고 이를 악물었다. 배는 다행히 회항하지 않았지만 예상 시간보다 30분 넘게 바다에 머물며 승객들의 정신을 쏙 뺐다. 마침내 멀리 부산항다리가 보이고, 파도가 잔잔해지는 게 느껴졌다. 뒤틀렸던 뱃속도 가라앉고 나니 갑자기 모든 게 평안해졌다. 발표를 기다리는 내내 불안해하다 합격통지를 받았을 때의 그 시원함, 앓던 이가 빠진 듯한, 드라마의 뒤끝 없는 완벽한 결말의 쾌감 같은 게 느껴졌다.

그럼 대마도에 또 갈 거 같나?

불과 삼십 분 전만 해도 죽어도 안 가 였는데, 몇 번 더 타면서 익숙해지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의문문, 또는 희망문으로 바뀌었다. 역시 화장실 들어갈 때 인간과 나올 때가 인간은 다른 존재인 것이다.

그 얄팍함이 우습다가도, 그러니까 어쨌든 다들 제 자리에서 잘 살아가는구나 싶은, 그런 교훈까지 주는 대마도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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