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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Jun 21. 2024

꼰대야, 그냥 퀴어 축제를 즐겨!

도쿄를 퀴어하게 여행하는 법 4

우리가 묵은 포드셀렉트 호텔의 더블베드는 깜짝 놀랄 만큼 작았다. 그런데 전날의 피로가 수면제 역할을 톡톡히 했는지 집에서보다 더 꿀잠을 잤다. 우리 몸뚱이 정도로는 더블베드도 충분하다는 반증. 어쩌면 우린 너무 많은 것들을 가지고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물건도, 공간도.

"알면 좀 작작 사!"

나의 반성 모드에 오스씨가 찬물을 끼얹는다. 정신을 바짝 차린 나는 곧바로 응수했다.

"생각해 보니 난 아직 배고프다..."

그렇게 결론 냈다는 이야기.


나카메구로에서 아침을 먹을 생각에 조식을 예약하지 않아 근처 커피숍(일명 킷사텐きっさてん)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일본의 킷사텐은 카페라고 번역되지만, 한국의 커피숍과는 조금 다르다. 담배도 피우고, 간단한 식사도 가능하다. 우리끼리는 된 발음 좋아하는 한국인답게 '키싸뗑'이라고 불렀는데, 글을 쓰려고 검색하다가 킷사텐이라고 불리는 걸 이제야 알았다.

우리가 찾아간 킷사텐은 역시나 담배 냄새가 심하게 났지만, 음식은 꽤 괜찮았다. 오스씨는 샌드위치를 먹고, 나는 미역이 들어간 계란죽을 먹었는데, 목 넘김도 좋고 숙취해소에 효과가 있었다. 미역국에 계란은 상상 못 한 조합인데, 역시 이래서 여행을 다녀야 시야가 넓어지는 모양이다.

밥을 다 먹고는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마시며 전날 있었던 일을 노트에 정리했다. 속초에서 샀던 무지 노트에, 한국에서 공수한 스티커를 이리저리 붙여가며... 일명 노트 꾸미기는 이제 여행의 필수 스케줄로 자리 잡았다.

"몸에 담배 냄새 밴 거 같아. 내일은 여기 오지 말고 다른 데 알아보자."

툴툴거리며 계산을 하는데, 점원이 또 오세요~ 하며 100엔 할인권 두 장을 주었다. 가뜩이나 값도 싼데 할인권까지? 내일도 또 와야지.

오늘은 퀴어프라이드축제에 참석하는 날이다. 장소는 시부야구 요요기 공원 이벤트 광장이다. 공원입구에는 '2024 도쿄 레인보우 프라이드' 간판이 커다랗게 걸려있었다. 원래는 전날부터 축제가 시작되어야 했지만, 강한 바람이 불어 텐트가 날아가는 바람에 갑작스레 취소되었다. 총 3일 중 하루가 빠져서인지 행사장에는 사람들이 미어터질 정도로 많았다.

각종 퀴어 단체와 후원 단체의 부스가 길 양쪽으로 끝없이 늘어섰고,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푸드트럭들이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띄우며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행사 무대는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차려졌는데, 이미 관람객으로 꽉 차 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출연자가 일본어로 끼 떠는 소리가 흘러나왔는데, 당연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부스는 일본 퀴어 단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나눠주는 '알아볼 순 없지만 유용한 정보가 가득해 보이는' 선전물을 받아 들고는, 사람들에 밀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각 나라 대사관의 부스가 쭉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기업들의 부스가 나타났다. 한국 퀴어축제도 후원하는 이케아 등 여러 다국적기업들과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스포티파이, 라쿠텐 같은 IT기업들, 닛산, 파나소닉, 소니, 산토리, 아사히 등 굴지의 일본 기업들도 보였다. 루이뷔통, 샤넬, 로레알 같은 세계적인 패션 뷰티 업체들도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부스가 어찌나 많던지 마치 기업박람회에 온 느낌까지 들었다.

"이 정도면 거의 주객이 전도된 거 아니야?"

처음엔 아는 기업 이름들이 줄줄이 나오니 마냥 신기했지만, 그 수가 오십여 개를 넘어가자 조금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업이 돈이 되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가는 습성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이 기업들이 평소에도 일본 동성애자 단체들을 후원하고, 일본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위해 같이 싸우는 걸까? 이 회사들에서 근무하는 동성애자도 이성애자와 같은 혜택을 받고 있을까? 지금 행사 부스에서 방긋방긋 웃으며 인쇄물을 나눠주고 있는 저 무지개 티셔츠 입고 있는 아저씨는 게이일까, 아니면 휴일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시켜서 억지로 끌려 나온 홍보실 직원일까?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아내랑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거지.

"오늘 오랜만에 쉬는 날인데, 거기 꼭 당신이 가야 돼?"

"몰라, 변태들 축제하는데 가서 홍보물 돌리라는데 샐러리맨인 내가 무슨 힘이 있어. 까라면 까야지."

확정 지어서 말할 순 없지만, 내 오랜 게이다(게이를 찾아내는 레이더)에 따르면, 홍보 부스에 있는 사람들 중 퀴어 같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직원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그냥 고용된 아르바이트생처럼 보였다. 대기업 홍보실에서 일하기엔 다들 너무 어렸다.

일본은 최근 법원 쪽에서 성소수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이 속속 나오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차별이 공공연하게 존재하는 나라다. 일본 회사에서 성소수자들이 일하기 편하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 없다. 그런 나라의 퀴어 프라이드 축제 부스가 이렇게 상업화되어도 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마냥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 정치계가 게으름 피우고 있으면 이렇게 기업들이 분위기를 만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뭐가 우선해야 한다는 법은 없는 거 아니야?"

이렇게 딱 정리해서 말하진 않았지만, 대충 이런 뜻으로 오스씨가 나의 조바심을 달래준다.

그 말을 들으니 거대한 상업화의 개입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어쩌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순서의 차이인 건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대한민국 민주화세대를 꼰대라고 지칭하는 이유가 있구나, 나 참 꼬였다 싶다.

좋게 좋게 생각해도 되는데 말이지.

"그러네. 나 참 웃긴다. 해준다는 데도 고까워하고 난리야. 우리나라에선 꿈도 못 꾸는 상황인데."

반성하면서도 어쩐지 초반의 들뜬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아버린 건 사실이다. 행사장을 누비는 드랙퀸들이나 아찔하게 차려입은 고고보이들과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업 부스에서 일하는, 일종의 알바로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분들에게는 중요한 수입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자각하니 사진 찍기도 시들해졌다. 그들과 사진을 찍을 땐 반드시 판넬 같은 거를 들고 있어야 했는데, 기업의 홍보물이 태반이었다. 이벤트 광장 전체가 무지개로 치장되었지만, 성소수자들이 만든 축제가 아니라, 기업들이 차려낸 성소수자들을 위한 잔치(저가 단체여행처럼 반드시 제품 설명 코스가 곁들어진...)에 참여한 것 같았다.


'꼰대야, 정신 차려! 그런 마이너 한 감상에 빠지지 말고, 이런 거대한 축제를 만든 주최 측의 노고를 생각하라고! 넌 그냥 즐기면 돼!'


하지만 한번 흥이 떨어지니 우울한 것만 눈에 들어왔다. 축제장 어디에서 한국어가 없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프라이드 행사를 기꺼이 후원하는 삼성과 엘지, 현대 같은 대기업도 일본에서는 몸을 사리는 모양이었다. 한국 대사관은 뭐 기대조차 안 했지만, 한국 동성애자 단체가 참여하지 못한 건 조금 서글펐다. 작년에는 분명 부스가 있는걸 사진과 영상으로 봤는데, 올해는 한국 단체들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나 보다. 한국 지자체에서 오죽 퀴어퍼레이드를 방해해야 말이지. 아닌 게 아니라 축제 한번 하려해도 지자체랑 장소를 허락해주네 마네로 싸우다가 시간 다 보내는데 이웃나라까지 신경쓸 틈이 있을까 싶다.

원래 이번 도쿄 프라이드에 참석하는 우리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1. 일요일(내일)에 퍼레이드에 참여해서 같이 행진을 하겠다.

2. 그러기 위해선 일단 오늘 신청 부스에 가서 퍼레이드 참여를 등록해야 한다.

3. 오늘 밤은 시부야 파르코 백화점 옥상에서 열리는 전야제 파티에 가서 드랙퀸 선발대회를 구경하고 춤추고 놀 거다.

4. 내일 퍼레이드가 끝나면 시부야 타워레코드 건물 지하에서 열리는 애프터 파티에 가서 역시 춤추고 놀 거다.


한국어 사용 단체가 없으니 이 중에서 두 번째, 참가 신청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굳이 하려면 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떨어진 흥이었다. 더구나 날이 너무 더웠고, 많은 부스를 돌아다니느라 무척 지친 상태였다. 푸드트럭마다 줄이 길었다. 행사무대에선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출입문을 가드가 막고 있어서 구경할 수가 없었다. 보통 퀴어 축제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드는데, 협소한 장소에 무대를 꾸려서인지 출입문을 두고 인원제한을 했다. 두 타임으로 나눠 공연을 하는 모양인데, 한 시간이 남은 상태에서 벌써 다음 타임에 입장하려는 사람들이 선 줄이 끝도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 노래,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青い珊瑚礁 )를 커버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무대 쪽에서 흘러나왔다.

순간, 짜증이 확 올라왔다.

기업 부스들을 줄이면 더 넓은 공간에 무대를 만들어 모두가 즐길 수 있었잖아! 소리치고 싶었다.


"퍼레이드에 참여해서 직접 행진하는 건 포기해야겠다. 그냥 옆에서 구경해야겠어."

그냥 다 놓아버린다는 마음으로 내뱉고는 오스씨를 바라보았다.

끄덕끄덕.

이날 최고의 드랙퀸! 이 날씨에, 이 차림이라니! 오츠카레사마데시타!

물론 우울한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었다. 부스가 많았던 만큼,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벤트도 많았다. 얼마 전에 읽고, 브런치에 리뷰를 올렸던 만화 <하트스토퍼>의 출판사 부스가 있었다. 고맙게도 스티커를 무료로 나눠줘서, 이후에 노트를 꾸밀 때 잘 사용했다.

가장 인기 있는 부스는 NHK 부스였다. 캐릭터 인형이 돌아다니며 귀여움을 떨고 있었는데, 같이 사진 찍으려고 선 줄이 어마어마했다. 일본인은 정말 줄 서기 좋아하는 민족이다.

여자 아나운서는 한쪽에서 축제 현장을 설명하는 방송을 찍고 있었다. 공영방송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수행하는 NHK를 보니 한국의 KBS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큰 만족을 주지는 않았지만 요즘 들어 특히나 국민을 우울하게 만드는 공영방송 KBS. 경제적으로는 이젠 일본을 거의 다 따라잡았니, 하는 소리도 들리지만, 사회 전반의 성숙도의 측면에서 한국은 아직 갈 길이 참 멀다 싶었다. 그런 의미로 힘내라, 진정한 공영방송이 되고 싶은 KBS!

도쿄 프라이드 공식 궂즈를 파는 텐트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그놈의 줄... 줄...

뭘 살까, 말똥말똥한 눈으로 훑어보았는데, 아... 궂즈의 퀄리티가... 뭔가 기념할 것을 사고 싶은데, 선뜻 손이 가는 게 없었다. 차라리 각종 기업 부스에서 나눠주거나 파는 궂즈가 더 탐이 났다. 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겨우 저걸 산다고?

스미마셍, 속으로 외치고 공식 판매부스를 벗어났다.

우리는 원래 고프로를 가지고 가서 축제장의 열기를 실감 나게 담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핸드폰으로도 사진을 잘 찍지 않는 분위기였다. 서로서로 행사장에 온 퀴어들을 배려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우리도 고프로는 집어넣고 가급적 사람들의 얼굴이 나오지 않도록 넓게 넓게 풍경모드로 사진을 찍었다.

푸드트럭들이 경쟁적으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어서 조금 시끄럽다 했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모두 게이바에서 운영하는 푸드트럭이었다고 한다. 어쩐지 점원들이 하나같이 다 멋지더라니. 뭐라도 하나 사 먹을걸, 후회했지만, 시간을 되돌려도 그냥 지나칠 것 같긴 하다. 그만큼 찌는 듯이 덥고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프라이드도 좋지만, 일단 살고 보자!

"나는요(내 겨땀파크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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