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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Jun 20. 2024

호박바지와 나나미카 폴로셔츠

도쿄를 퀴어하게 여행하는 법 3

원래 나카메구로는 둘째 날 아침, 그러니까 토요일 아침에 오려고 했었다. 아침 일찍 여는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도쿄>에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오니기리 카페>의 주먹밥으로 아침식사를 하려 했다. 근처에 BTS의 RM이 사랑하는 브랜드 <비즈빔 visvim> 매장이 있어서 그곳을 구경하고, 점심은 RM이 먹었다는 <헨리스버거>에서 먹고, 퀴어프라이드 축제가 열리는 요요기공원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금요일 오후, 도쿄매트로에 대한 무지가 우리를 나카메구로 전철역으로 인도하자, 그냥 근처 매장들을 둘러보며 다이칸야마까지 걸어가는 걸로 결정했다. 여행 중 이렇게 갑자기 일정이 바뀌는 경우, 우린 별다른 스트레스 없이 새로운 일정을 금방 받아들이는 편이다. 여행이란 게 원래 그렇다. 발길 따라 흘러가도 새롭게 즐거운 것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사악한 가격으로도 유명해 어차피 갤러리처럼 구경만 하려던 <비즈빔> 매장은 다이칸야마 방향이 아니어서 포기하고, 메구로강 쪽으로 걸었다. 벚꽃 명소로 유명한 곳이지만, 이미 벚꽃엔딩이 시작된지 한참이라 꽃잎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푸릇푸릇한 연두색 잎들이 터널처럼 강을 둘러싼 풍경은 도심 한복판인데도 여유가 흐르는 카페거리의 명성을 지켜주기에 충분했다.

골목에 접어들자마자 마주친 스위츠가게에서 900엔짜리(비싸!) 딸기산도를 하나 사서 나눠먹었다. 평상시에는 샌드위치를 즐겨 먹지 않는데, 일본에만 오면 꼭 '산도'가 먹고 싶어 진다. 여행의 흥분으로 호르몬이 바뀌는 걸까? 생맥주 잘 안 마시는데 일본 오면 끼니때마다 마시고 말이지.


가장 먼저 들른 가게는 <1LDK nakameguro>였다. 요즘 유행하는 와이드 핏의 옷이 많았는데, 스트릿 브랜드 <그라미치 Gramicci>와 <1LDK>가 콜라보한 호박바지 쇼츠팬츠가 눈에 띄었다.(제품 링크 : https://onlinestore.1ldkshop.com/c/brand/is-ness/gd8090)

그라미치는 한국의 편집샵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제품으로, 우리도 그라미치 바지를 여러 개 가지고 있다. 기본 형태 옷들이 많아  무난하게 입기 좋은 브랜드인데, 저 호박바지는 장난기가 덧붙여져 무척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걸 집어 들자, 우리가 가게를 둘러보는 내내 제 할 일 하던 점원이 후다닥 다가와 제품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 가게와 콜라보한 제품이라는 사실도 그래서 알았다. 수많은 제품 중 딱 그 제품을 고른 우리의 안목을 칭찬하며, 너무나 뿌듯해하고 기뻐해서, "우리가 입기엔 너무 장난스러워."라는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와이드 핏인데도 S사이즈가 없어서 결국 내가 실험체가 되어 옷을 입어보았다. 어? 생각보다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고 귀여운데? 하지만 이 나이에 호박바지라니, 못 살 것 같았다. 도리도리를 시전 하려는데 낌새를 차린 점원이 계산기를 가져와서는 할인+면세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 환율까지 대입했더니, "그냥 특별한 날, 한번 입어볼 수 있겠는걸?" 정도가 되었다. 너무 과감해서 손대기 싫지만 그래도 가지고 싶은 옷을 살 땐 항상 그렇듯이, "이거 자기한테 어울린다. 너무 귀엽다!"를 시전 하며 결국 오스씨가 입는 것으로 결론 내리고 바지를 샀다.

나중에 호텔에 들어와서 입어 본 바지는 생각보다 그렇게 튀지 않고 멋있었다. 이후 한국에 돌아온 후로는 서로 입겠다고 난리다. 아주 만족스러운 쇼핑이었다.

계속해서 다이칸야마 쪽으로 이동하다가 갑자기 기시감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여기 온 적이 있지 않아?"

"아닌 거 같은데?"

"저기 모퉁이 돌면 <에비스 Evisu> 나오지 않았나?"

오스씨는 아니라고 확신했고, 잠시 후 모퉁이를 돌았다. 그런데, 짜잔~ 진짜로 에비스 매장이 나타났다. 오스씨가 관리하고 있는 ‘추억저장고’는 시시각각으로 낡아가고 있었다. 조금은 짠한 마음으로 에비스 매장에 들어갔다.

나에겐 에비스 바지가 두 개 있다. 하나는 2016년에 홍콩에서 산 져지 반바지이고, 하나는 2018년 바로 이곳 다이칸야마 매장(본점)에서 산 건빵바지(오버롤)다. 반바지는 당시 기준으로도 꽤 비싸서 정말 큰맘 먹고 산 거였는데, 여름 내내 이것밖에 안 입는다고 할 만큼 최애 반바지가 됐다. 9년째 수도 없이 빨았지만, 늘어진 곳 없이 새것처럼 쨩쨩하다. 이렇게 질 좋은 져지는 여태 본 적이 없다. 가격 대비 본전은 다 뽑았고, 아마 죽을 때까지 입지 않을까 싶다.

그 품질에 대한 믿음으로 2018년 도쿄 여행 때 일부러 이곳을 찾았다. 홍콩에서 산 제품이 너무 좋아서 여기까지 왔다고 하자, 매니저가 묘한 표정을 짓고는 이렇게 말했다.

"홍콩 에비스는 중국 업체에 상표권만 준 거고, 진짜 에비스는 아니에요."

따라서 진짜인 일본제와 비교하는 것은 자존심 상한다는 이야기였다. 상표권만 줘도 그 정도의 퀄리티라면 오리지널은 도대체 얼마나 좋은 걸까. 환호성을 지르며 매장을 둘러봤는데, 에비스 청바지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무늬가 진짜 요란하다. 아무거나 사서 입고 거리에 나가면 모든 사람이 내 엉덩이만 바라볼 것 같은 강렬한 프린트! 결국 내가 고른 건 민 무늬의 황토색 오버롤이었다. 심지어 시그너처라 할만한 에비스 로고도 없었다.

이유가 있었다. 본점만의 특별한 서비스가 있는데, 로고를 즉석에서 프린트해 주는 거였다.

굳이? 점원 말이, 원래 색상은 무료로 프린트해주고, 특별한 색상을 지정하면 금액을 더 받는 시스템이었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옷을 가진다…는 상술에 홀딱 넘어가 몇 만 원 더 내고 양 쪽 엉덩이에 다른 에비스 로고를 넣었다. 그깟게 뭐라고, 싶지만 각기 다른 색상이 포인트로 들어가니 확실히 달라 보이긴 했다. 뭐, 꽤 만족스러웠다.

2024년 4월에 다시 찾은 에비스 매장은 모든 제품의 프린트가 뭔가 아스트랄 한 것이, 정말 갈 때까지 간 듯한 느낌이었고, 오버롤 제품은 없다고 했다. 앞으로는 에비스 제품을 살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들어갈 때처럼 짠한 마음으로 매장을 나왔다.

본격적으로 다이칸야마 거리에 들어섰다. 예전에 왔을 때는 츠타야 서점이 최고의 핫플레이스였다. 책도 구경하고, 각종 궂즈도 사고, 서점에 딸린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도 돌돌 말며 세련된 선진국의 우아한 문화에 맘껏 취했었다. 요즘은 우리 나라 대형 서점들도 츠타야를 열심히 흉내내서 딱히 책을 사지 않아도 다양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 오리지널에 해당하는 츠타야는 어떻게 변했나 궁금했지만, 시간이 촉박해 이번엔 옷 가게만 가기로 했다.


<MHL마가렛하우웰>은 '고급스러운 무인양품' 같은 느낌의 옷이 많은데, 하나같이 다 예뻤다. 셔츠를 입어봤는데 어찌나 핏이 좋은지 거울 속의 내가 무척 차분하고 현명한 사람처럼 보였다. 안경으로 따지면 차분한 뿔테안경 같은 옷들이었다. 문제는 그동안 내가 축적해 온 옷들이 MHL과는 거의 정반대스타일이라는 거. 셔츠 한 장을 사려면 바지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아, 가지고 있는 옷이 너무 달라서 아쉽네요."   

점원에게 입 발린 말을 하고 나왔는데, 사실 너무 비쌌다. 비싼 무지 스타일? 나에겐 일 없다. 다만 오스씨는 두고두고 뒤를 돌아보며 아쉬워했다. 그가 사겠다고 달려들까 봐 손을 잡고 얼른 다음 가게로 이끌었다.


다이칸야마에 와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나나미카 nanamica> 매장이 여기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1년에 한 번 정도(보통 생일) 평소엔 엄두도 못 내는 비싼 옷을 서로에게 사준다. 그래봐야 명품 쪽은 관심이 없으니 50만 원 내외에서 고른다. 요 몇 년 신세계백화점 편집매장인 '비이커'에 입점된 나나미카 옷을 눈여겨본 나는 생일 찬스를 써서 구매한 적이 있었다. 입어보니 대만족! 기회가 되면 또 사고 싶다 침을 흘리고 있었는데, 다이칸야마에 나나미카 매장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현지 가격'을 보니 유혹을 참기가 힘들었다.

기대하고 고대하던 매장에 들어섰다. 멋진 인테리어, 세련된 점원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찬찬히 옷을 들춰보았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한국 비이커 바이어, 셀렉을 참 잘하는구나, 였다. 국내에서는 하나같이 다 이뻤는데, 여기는 안 이쁜 것들도 꽤 있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커서 정작 예쁜 것들에 집중을 못하고 그냥 밖으로 나와버렸다. 가을겨울 제품은 가격 대비 만족도가 컸지만, 여름 제품은 아무래도 천 조각 대비 훨씬 비싸 보여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빈 손으로 돌아가는 건 너무 아쉬워... 나나미카 마크 붙은 거 하나라도 사야겠다 싶어서 다시 들어가 가장 싼 와이드 폴로셔츠를 샀다. 얘도 세금 떼고 환율 정리하면 십만 원대 중반. 조금 전 산 와이드 호박바지와 매치하면 괜찮겠다 싶었는데, 나중에 호텔에 와서 입어보니 크... 퍼펙트!

"안 샀으면 어쩔 뻔했어."

"그래 그래, 잘 샀어."

서로 우쭈쭈 해주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내가 가진 다른 바지들과 매칭해 보니 어울리는 바지가 없었다. 충동구매의 결과물이 그렇지 뭐…

다이칸야마 거리에 들어섰을 때부터 사람들이 줄을 선 음식점이 있었다. 구글지도로 확인해 보니 일본가정식을 파는 가게였다. 쇼핑을 다 하고 나니 사람이 확 줄어있어서 우리도 줄을 섰다. <Sue zen 末ぜん>의 메뉴는 다음과 같다.

스에젠의 메뉴판

이렇게 사진을 찍어 파파고 번역을 돌리면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 여행하기 정말 좋은 세상이다. 예전에는 음식점, 특히 이자카야에 가면 뭘 주문해야 할지 몰라 버벅거렸다. 메뉴도 많고, 멋들어지게 쓰인 일본어나 한자를 전혀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건 다른 식당 메뉴판

요렇게 영어로 써주는 집은 양반, 대부분은 다 일어로만 적혀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저런 메뉴판도 파파고 덕에 겁내지 않고 주문 가능해졌다.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유 중 첫째가 엔저, 둘째가 근거리라면, 셋째는 언어 장벽이 거의 없어졌다는 것이다. 일본어 안 한지 오래돼서 다 까먹었는데도 핸드폰 하나 있으면 먹고, 마시고, 물건 사는데 조금의 지장도 없었다. 그런 세상이 되어버렸고, 아마도 AI 탑재된 핸드폰이 대중화되면 국내 여행과 차이를 느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좋은 세상인지, 나쁜 세상인지를 판단하는 일은 미래의 나에게 맡겨두고 당장은 편안함을 만끽하며 이 순간을 즐기기로 하자.

스에젠의 음식. 기대한 비주얼, 기대한 맛, 기대보다 많은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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