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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Jul 15. 2024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다짐

광주, 선유도, 군산의 초여름 열흘 5

둘째 날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셋째 날이 되어서도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물바다에 잠길 거라는 공포의 일기예보가 점차 현실화되고 있었다. 그래도 여행씩이나 와서 호텔에서만 뒹굴거릴 순 없다. 비오니 또 미술관에 가야지. <광주시립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10시에 오픈인데, 숙소에서 30분 거리라 우리가 도착할 시간은 열 시 반쯤. 고속도로 입구에 위치한 데다가 주변에 식당도 없어 보였다. 아침을 변변찮게 먹어서 전시장 돌아다니다 보면 분명 당 떨어질 거 같은데...

"<궁전제과>에서 나비페스츄리를 사가지고 가자."

궁전제과는 충장로 한복판에 있어서 주차장에 세워두고 다녀오려고 했는데, 골목 입구에 있는 주차장 요금에 입이 떡 벌어졌다. 비싸도 너무 비싸! 싼 곳을 찾아보자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궁전제과 앞 공간이 마침 비어있었다. 깜빡이 넣고 오스씨에게 후다닥 다녀오시라 부탁했다. 일요일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다행히 궁전제과에도, 거리에도 사람이 없어서 순식간에 문제를 해결하고 골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주차요금 비싸도 너무 비싼 거 아니냐. 10분에 5천 원이 뭐야!"

마구 욕을 해댔는데, 나중에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니 그 가격이 아니었다. 60분에 5천 원. 그러면 그렇지... 비 때문에 멀리 붙어있던 요금표 숫자가 잘 안 보였던 듯. 아이고, 욕해서 미안합니다. 그래도 비싼... 거겠지? 사실 부산에선 대체로 요일제 할인을 받는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니까 시세를 잘 모른다.


오스씨가 사 온 빵을 야무지게 먹고 시립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진행 중인 전시는 <우주의 언어-수>와 <한국미술명작> 두 개였다. 현장에서 표를 끊으려다 보니 네이버로 바로 예약/발권이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네이버플러스 회원이어서 그쪽에서 예약하면 포인트를 준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

시립미술관은 노출 철기둥으로 되어있는데, 기둥에 칠해진 페인트가 벗겨져 붉은 속살이 보이는 곳이 꽤 많았다. 이렇게까지 페인트가 마구 벗겨진 공공건물은 처음 보는 데다가, 일부러 벗겨낸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예술적인 면모'도 없지 않아서, 목에 명찰을 걸고 지나가던 사람에게 물어봤다.

"저 페인트 일부러 벗겨낸 건가요?"

"전 아트샵 파견 직원이라서 모르는데, 사실 저도 궁금했어요."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아무래도 표를 접수하는 직원에게 물어봐야 했는데, 순간, "아닙니다. 예산이 없어서 못하고 있는 거예요."라는 말을 듣는 게 싫어졌다. 진짜 예술일 수도 있지만, 아니면 실망할 것 같으니 그냥 모르고 싶어 졌고, 나 혼자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게 모두에게 좋을 것 같아 묻지 않기로 했다.

<우주의 언어-수> 전시는 나보다 오스씨에게 더 적합한 전시처럼 보였다. 산수 이상으로 나아가는 수의 세계를 싫어해서 그쪽으로는 관심을 둬 본 적도 없는 나완 달리, 오스씨는 수학을 다루며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전시관 입구에 거대하게 펼쳐진 이이남 작가의 그래픽 작품에 유명 수학자들이 소개될 때마다 아는 척을 했다. 나 역시 역사책이나 상식책에서 들어본 이름이 몇몇 있었지만, 진짜 이름만 아는 정도여서 아무래도 이 전시는 지루할 것이 뻔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물론 착각이었습니다.

전남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김현호 작가가 만든 <경제의 수리적 표현: 최적화의 균형>은 칠판 판서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품으로, 네 가지 색깔의 분필로 표현된 도형과 숫자, 글자의 디자인적 표현도 훌륭하지만, "지식을 꼼꼼하고 끈기 있게 나열하기"라는 추상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과정 자체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점에서 물개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참신해!"

다소 생활의 달인 느낌도 없지 않지만, 학창 시절 선생님과 함께 했던 수업들이 어쩌면 예술적 교감을 나누는 현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혼자만의 재해석에 가슴이 몽글몽글해지기도 했다.

김현호 교수가 작성한 판서는 당연히 뭔 내용인지 1도 모르겠는데, 오스씨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AI 강화이론의 알고리즘을 써둔 거구만. 저건 OO경제이론이고, 다이내믹 프로그래밍 언어도 있고..."

뭐시라? 저걸 알아본다고잉! 그야말로 깜놀했다.

이런 사람이었구나, 내 남자. 오... 뭔가 달라 보여. 내년이면 이십 년 차 부부지만. 서로에게 놀랄 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나도 뭔가 놀래켜주고 싶지만, 그 당시엔 쉽사리 떠오르는 게 없었다. 방구라도 뀌었어야 했나? 감탄은 모르겠지만 놀라기는 했을 텐데...

내가 쓴 척 포즈 잡기... 헤헤.

하품하기 일보 직전인 나를 확 깨워준 작품도 있었다. 이다희 작가의 <J.S.Bach-Prelude in F# Major bwv858>는 바흐의 푸가를 수학적으로 분석한 작품이다. 전주곡과 푸가에서 사용되는 화음마다 색을 지정하는 식으로 '음악번안시스템'을 만들어, 소리를 이미지로 변환한 작품이다. 작품에 해당하는 QR코드를 인식시키면 해당 곡을 유튜브로 들어볼 수 있다. 몇 개 들어봤는데, 화음이 적을수록 원색에 가깝고, 중첩될수록 탁해지는, 또 장조면 붉은 계열, 단조는 푸른 계열, 이런 식으로 구현되는 번안시스템인 듯했다.(그냥 내 추측일 뿐이니 궁금하신 분은 검색으로 알아보세요~)

아이디어가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다. 세상엔 천재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다 들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유튜브 프리미엄 회원을 그만둔 터라 짧은 전주곡 하나 듣는데, 광고를 두 개씩 봐야 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리를 떠야했다.

그 외에도, 빛에 감탄하고, 조형미에 눈이 즐겁다가도, 번뜩이는 '이과적' 표현에 '문과둥절' 기가 죽는 전시가 쭉 이어졌다. 종이 접기만으로도 복잡한 말과 악어를 표현한 작품 앞에서는 와.. 와.. 만 내지를 뿐. 수라고 하는 게 계산기 속이나, 컴퓨터 화면이나 은행 액정에서 기호로만 떠도는 건 줄 알았는데, 구체적인 물성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아주 유익한 경험이었다. 어제의 ACC 전시도 그렇고, 이번 전시도 그렇고, 광주의 전시 기획자들, 정말 리스펙 한다! 비엔날레를 하는 도시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여러 번 감탄하게 되었다.

올해 비엔날레에도 한번 와볼까? 싶어졌다.

두 번째 전시는 <한국미술명작>, 이름만 대면 알만한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오다가다 어찌어찌 봤던 작품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처음 보는 작품이었다. 역시 명작은 좋다. 끝.

아니다, 사실 전시가 끝난 후, 오스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더니즘 시대의 작품을 보면, 자나 깨나 휴머니즘이 넘쳐나는 거 같아. 해체주의와 추상미술에서 사람 냄새가 너무 많이 나. 자연을 그린 작품도 많지만, 그냥 쌩 자연이 아니라 따뜻하고, 포근하고, 그리운 자연이라고 할까? 사람 냄새나는 자연. 그래서인가? 난 요즘 그 시대 작품들을 보면 그렇구나, 인간답구나, 단순하게 반응하게 돼. 인간을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거, 지겨운 거 같아. 유럽 미술관에 갔을 때, 종교화 계속 보다 보면 그 종교 자체가 아주 징글징글하게 느껴지잖아. 그런 느낌? 미술에서 인간을 떼어놓으면 소음과 착시만 남을까?"

아주 잘난 척을 오지게 했다. 저 작품들 중 아무거나라도 프린트해주면 냉큼 받아가 액자에 소중히 넣어 벽에 걸어둘 거면서.

오스씨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글 쓰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생각도 어디로 뻗어나갔는지 기억나지 않고. 이후에는 현대미술 전시를 더 보러 다녀야겠다는 다짐만.

그래도 장욱진은 너무 좋아...

셋째 날엔 양림문화역사마을 <러브앤프리>에서 책을 사고, 그 책을 읽기 위해 <우주의 언어-수>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한 이이남 작가가 운영하는 갤러리형 카페 <이이남 스튜디오>에 갔다. 전통 산수화를 표구해 놓은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면 그림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디지털 액자였어!라는 반전미 넘치는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인 걸, 가게에 가서야 알았다. 예전에 어딘가 갤러리에서, 또 유튜브에서 작가의 작품을 본 적이 있었다. 넓은 공간을 이용해 빛을 쏘는 작품들도 인상 깊었는데, 사진 찍기 아주 좋았다.

갤러리 중앙에 배치된 피에타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본래의 피에타라면 마리아가 무릎에 누운 예수를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 속 예수는 마리아의 품을 떠나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라 하늘로 올라갔.... 는 줄 알았는데, 건물의 유리천장에 막혀서 3층 언저리에 멈춰있는 중이었다. 유리 천장에 막혀 승천하지 못한 예수라니, 묘사에 동원된 단어 조합들이 상상력을 부추긴다. 마리아와 예수 모두 원하는 걸 얻지 못한 것 같아 쓸쓸해 보였다. 몸이 너무 노곤해서 산 책을 읽지 못하고, 도파민 충전을 위해 인터넷 서핑만 하다 온 나도 꽤 쓸쓸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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