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2만 보 도시

by 선우비

재난 지역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가을 숙박페스타 5만 원 할인권.
왜 이런 할인에 매번 잘 넘어가는 걸까. 마트에 가서도 늘 할인 제품에 눈이 먼저 가는 걸 보면, 사람 마음이란 참 단순하다.

아무튼 그래서 이번 가을, 2박 3일의 순천 여행을 떠나게 됐다. 순천만 갈대밭은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를 정도로 익숙한 곳이다. “이제 좀 지겹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이 계절의 정취를 이만큼 ‘가성비 있게’ 느낄 수 있는 곳도 없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단순했다. 낙안읍성 축제도, 유네스코 사찰도 모두 제쳐두고, “맛있는 거 먹기 + 순천 국가정원 산책” 이 두 가지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뿐인데도 이틀의 일정은 생각보다 빡빡했다.


부산에서 출발해 순천에 도착하자마자 유명한 참숯 닭구이집에서 점심을 먹고, 근처 대형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이어 갈대밭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용산전망대에 올라 순천만 전경을 한눈에 담았다. 호텔 체크인 하자마자 테이블링으로 맛집 예약. 보리굴비와 진도홍주를 곁들인 저녁을 즐겼다. 소화도 시킬 겸 호텔 근처 다이소에서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사고 돌아오니, 피로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침대에 몸을 던지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겨우 10시.

지금의 내 체력으로 야트막한 높이의 용산전망대 왕복도 큰 운동이다. 여름 내내 얼마나 몸을 방치했는지 새삼 깨닫는다. 예전 같으면 대수롭지 않았을 코스가 이렇게 힘겹다. 돌아가면 다시 수영을 시작해야겠다는 다짐!


대숲골농원, 좌우로 대나무가 울창하게 뻗은 공간에서 숯불에 구워낸 토종닭은 미친 조합이었다. 고소한 냄새를 맡고 나타난 새끼 고양이들이 식탁 옆에서 자리를 잡고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곁들여지니, 맛뿐만 아니라 분위기까지 완벽했다. 친절한 종업원의 서비스까지, 여행의 시작을 기분 좋게 열어준 식사였다.

순천만 487 카페,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라는 ‘487 갈대커피’는 예상보다 꽤 달달했고, 용과를 넣은 ‘487 노을 에이드’ 역시 특색 없는 무난한 편이었다. 시그니처라는 말이 상술의 일환으로만 활용되는 느낌이다.

남녘들 밥상, 테이블링으로 약 40분을 기다린 끝에 마주한 한정식 세트는 기다림을 보상해 줄 만큼 정성스러웠다. 석쇠불고기는 부드러웠고, 반찬 하나하나가 깔끔하고 훌륭했다. 다만 보리굴비는 크기만 하고 지나치게 말라버린 느낌이라 아쉬움이 남았다. 다음에 간다면 굴비 대신 다른 메뉴를 조합한 세트를 선택할 듯하다. 함께 곁들인 진도홍주(35도)는 의외로 깔끔하고 한식과의 궁합도 좋았다.

호텔 라움, 주차타워형이라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바렛파킹이 기본이고 외출 전 전화를 하면 미리 차량을 꺼내두는 세심한 서비스가 인상 깊었다. 갑작스러운 비가 내렸을 때 우산을 챙겨주는 배려도 있었다. 이름만 ‘호텔’이고 실상은 모텔 수준인 숙소들이 많은데, 이곳은 이름값을 하는 몇 안 되는 호텔이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편안한 숙박 경험이었다.


이튿날, 줄 서서 먹는 맛집을 찾아가 첫 번째 손님으로 입장해 멋진 아침 밥상을 받았다. 배를 든든히 채운 뒤 순천만 국가정원으로 향했다. 입장하자마자 저녁 유람선 표를 미리 사두고 천천히 정원을 산책했다. 지난 번 왔을 때보다 나무들은 크게 자라 있고, 가지는 더욱 풍성해져 있었다. 수목이 많은 정원이라는 특성상 이곳은 올 때마다 이전보다 더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다은 번엔 더 새로워져 있겠지? 이걸 기획하고 꾸준히 관리해온 순천 시민 모두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점심은 옥천동의 모밀우동집에서 해결했다. 근처 베이커리에서 치아바타와 과자를 사고, 핸드드립 커피 한 잔으로 여유를 즐겼다. 서점에 들러 주인장에게 “박준 시인 느낌 나는 여성 시인을 추천해 달라”라고 부탁했고, 그렇게 김소연 시인의 『수학자의 아침』을 얻었다. 오스씨는 언제나처럼 서스펜스가 가미된 편혜영의 『홀』을 골랐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오후 3시. 잠시 호텔에서 쉬었다가 다시 정원으로 향했다.

예매해 둔 ‘정원드림호’를 타고 동천의 해 질 녘 풍경과 야경을 즐기고, 조명으로 꾸며진 정원과 실내 식물원까지 둘러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가왔다. 전날 갔던 한정식집에서 운영하는 또 다른 가게에서 해창막걸리(12도)와 서대회보쌈을 시켰다. 역시 극상의 전라도 식탁!

배가 터질 듯 불러서 야간 산책을 나섰다. 그런데 30분쯤 걷다 보니, 여수·순천·광양을 통틀어 단 하나뿐이라는 게이바가 눈앞에 나타났다. 흐흐.

가게 안은 광양에서 온 손님들로 가득했고, 순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인 말로는 좁은 지역일수록 얼굴이 알려지는 걸 꺼려 게이바에 잘 오지 않는다고 했다. 처음 게이바에 발을 들였던 30년 전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다. 동성애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 그 영향을 받아 극도로 보수적으로 굳어버린 게이바 문화, 그리고 “혹시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늘 불안해하는 지방 게이들의 설움까지. 참 질기게도 변하지 않는다.

배부른 상태에서 맥주와 과일까지 먹었더니 속이 더부룩해져 호텔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하루 동안 무려 21,000보를 걸었다. 결혼 예물로 장만한 스마트워치에서 ‘2만 보 배지’를 획득했다는 알림을 보내왔다. 야호!


육사순회집밥, 하루 딱 30인분만 준비되는 ‘육사순회집밥’은 예약도 받지 않는다. 주말은 오전 9시부터 문을 여는데, 우리는 8시 45분쯤 도착해 운 좋게 1등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은 단 세 개뿐이고, 사진 촬영도 금지다. 인당 15,000원이라는 가격이 믿기지 않을 만큼 풍성하고 정갈한 밥상이 차려진다. 늦게 도착하면 최소 40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니, 일찍 움직이는 게 정답이다. 다소 까다로운 내부 규칙이 있지만, 조용히 식사만 하고 나오면 아무 문제없다. 최근 몇 년 사이 다녀본 집밥 스타일 식당 중 단연 최고였다.

1937모밀우동, 차가운 육수의 달콤하고도 독특한 맛이 인상 깊다. 육수를 따로 판매할 정도라는데,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면은 육수를 잘 머금도록 뽑아내어 마지막 한 젓가락까지 만족스럽다.

기고베이커리앤델리, 식사용 빵 전문점이라 가벼운 치아바타를 골랐다. 맛은 무난했지만 생각보다 무게감이 있어 한두 조각만 먹어도 포만감이 꽤 크다.

쾨르커피, 구운 과자만 샀다. 맛있어, 맛있어.

오윤커피하우스, 앞에서 산 구운 과자를 이곳에서 직접 내린 필터커피와 함께 먹을 수 있다. 지역 상생 모드인 가게 정책이 맘에 든다. 커피의 향과 맛 모두 훌륭하고 컵 디자인도 훌륭하다. 주인장의 친절함까지 더해져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골목책방 서성이다, 박준 느낌의 여성 시인 찾기라는 고객의 뻔뻔한 퀘스천에 너무나 진지하게 응답해준 사장님께 감사드린다. 원래 여성 시인이라는 단서를 붙이지 않았을 때 곧바로 황인찬 시인을 언급해줘서 능력자다! 속으로 박수쳤다.

정원드림호, 1인당 1만 원의 요금이 아깝지는 않지만, 다시 탈 것인지를 묻는다면 고민이 된다. 진주의 김시민호(8,000원)를 경험한 입장에서 보자면, 배 자체의 재미는 크지 않다. 정원 내부의 풍경은 걸어서 보는 편이 훨씬 낫고, 동천의 풍경도 특별히 인상적인 장면은 없다. 배가 작아 소음이 큰 것도 아쉬운 점이다.

남녘들 회국수보쌈, 남녘들밥상의 자매 식당으로, 분위기도 다르고 반찬 구성도 다르다. 보쌈에 서대회까지 곁들이면 말 그대로 ‘완벽한 한상’이다. 해창막걸리 12도의 판매가가 시중보다 크게 높지 않은 것도 고마운 부분이다(매장에서 19,000원). 반찬 하나하나까지 모두 맛있어 젓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게이바, 마지막 밤에 들른 게이바는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한 분위기였다. 인테리어부터 장사 방식, 손님들의 스타일까지 모두 ‘옛날 감성’을 간직하고 있다. 요즘 흔한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련된’ 공간에 질려 있다면 이곳이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레트로한 감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러볼 만한 곳이다.


다음 날 아침은 늦잠으로 시작했다. 몸이 피곤했고, 더 이상 어딘가를 돌아다닐 힘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순천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중간에 함안에 들러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산책을 즐긴 뒤, 부산으로 향했다.

여행 내내 “여기서 한 달 살기 하고 싶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갈대밭을 포함한 국가정원은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웠고, 올해 65세가 된 오스씨는 입장료가 무료였다. 매일 책 한 권을 들고 산책을 나가고 싶고, 반찬 하나하나가 맛있어 사온 반찬만으로도 한 달 식사가 가능할 것 같았다. 교통도 편리해 주변 도시를 오가기에도 좋다.

내년 봄이나 가을, 진지하게 ‘순천 한 달 살기’를 고민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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