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종사촌

중년 게이 부부의 제주 한달살이 3

by 선우비
평소라면 절대로 읽지 않을


오전 시간을 오롯이 오르머로 살았다면 오후엔 책방 순례자가 되었다.

이 역시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동네 정보를 뒤지던 중 서울 성균관대학교 앞에서 주로 인문사회과학 책을 팔던 책방 ‘풀무질’이 이 근처로 이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옛날에 한창 데모할 때 제집 드나들 듯 했던 서점이야. 비합법 운동권 조직들이 발행하는 기관지도 취급해줬거든.”


90년대 초 대한민국은 오랜 군부독재를 끝내고 문민정부를 탄생시키기 위한 마지막 산고를 겪고 있었다. 대학 새내기였던 나 역시 시대의 급류에 휩쓸렸다.

십 대 중반에 이미 성(性)적 취향이 남들과 다름을 자각했고, 때마침 첫사랑에 ‘격렬하게’ 실패한 후유증으로 반항아의 자질은 충분했다. 점수에 맞춰 들어간 학과라 전공 공부도 관심 밖이었다.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빵 터질 준비가 된 X세대였다.

어느 날 정우성을 꼭 닮은 과 선배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전까지는 멀리서 바라보며 흠모했을 뿐, 말을 섞어본 적도 없었다.


“걸리면 안기부에 끌려갈 수도 있는 비합법조직이야. 각오가 되면 들어와. 그런데 너 눈빛이 마음에 든다. 내가 키워보고 싶은데, 같이 할래?”


오래전 일이라 기억은 흐릿하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삼류 첩보 영화도 이 정도의 유치한 설정은 아닐 텐데, 나에겐 제대로 저격이었다.

어쩌겠는가. 상대 배우가 정우성인데.

정우성과 밤새 화염병 만들다 좁은 골방에서 쪽잠 자고, 어깨동무하면서 구호 외치고, 엠티 가서 같이 빨가벗고 목욕하고...

그걸 어떻게 거부해.


물론 나 역시 거리에 나와 있는 수백만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여러 번 뒤집혀야 마땅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나의 열망은 동시대 투사들에 비하면 어딘가 비릿한 데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난 예나 지금이나 운동권의 순수를 믿지 않는다. 거리를 함성으로 뒤덮는 거대한 열정 속에는 반드시 사랑에 떠밀려온 애잔한 욕망이 포함되었으리라.

연민 받아 마땅한 욕망이.


오스씨는 시대가 더 엄혹했던 8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다.

그러나 그의 운동장은 거리가 아닌 디스코 클럽이었다. 땡전뉴스(모든 뉴스의 첫 꼭지는 반드시 전두환 근황)가 횡횡하던 시절, 그는 땡디(클럽 오픈할 때 들어가는 죽순이)로 20대를 보냈다.

누군가와의 만남이 목적이 아니었다. 플로어에 나가 매직아이 하는 사람처럼 흐릿한 눈빛으로 오로지 춤만 출 뿐이었다.

새벽까지.


“왜 그랬어?”

“몰라. 그냥 춤에 미쳤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이십 대를 보냈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그쪽 정당을 지지한다고 했을 때 어찌나 놀랍던지. 그는 내가 게이 커뮤니티에서 처음 만나는 그쪽 지지 게이였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사귀게 된 거지?


제주 풀무질은 일부러 알고 찾아가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장소에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제주도 독립서점들이 대체로 그러했다. 살림집 한쪽을 가게로 내거나 임대료가 싼 공간에 자리해서가 아닐까? 아무튼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각종 SNS가 나침반 역할을 톡톡히 해내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책방은 사진 찍기 딱 좋은, 킨포크 잡지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정겹고 아기자기한 건물 안이었다. 주인은 서울 풀무질에서 26년을 일하고 제주로 내려온 지 3년 차라고 했다.

계산해보면 내가 서울 풀무질을 한창 드나들던 시절에 그가 있었다.


“그때는 창문이 이렇게 깨끗하지 않았잖아요. 마르크스의 『자본론 완역판』,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책 광고지랑, 집회를 알리는 포스터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죠. 『월간 말』 포스터는 언제나 가장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하고요.”


주인과 함께 어, 그래그래, 그랬지. 그걸 다 기억하네요. 그때 말이지, 우리가 말이지. 꺅꺅! 해볼까?

내 나이대의 손님 중에는 그런 사람이 꽤 많지 않을까?

서점에 놓인 책들을 쓱 훑어보니 여전히 인문사회과학 중심이었다. 주인은 여전히 세상을 향한 변혁의 날을 벼리며 사는 사람이었다. 내가 예전에 불법 유인물을 들고 찾아가 진열을 부탁했던 학생이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일까?

잘 받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꾸벅 한다면?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 90년대 운동권 라떼는 순수한 우유가 아닌 프리마 두 스푼을 섞은 다방 커피 맛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어, 하다 보니 사회적으로 집중포화를 받는 중이다. 과거에 대해 입 다물고 사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

“그래서 요즘에는 어떤 전선에서 싸우고 계세요?”라는 질문을 받고 싶지 않을 때는 특히나!

난 꽤 오래전부터 그런 대화가 불편한 삶을 살아왔다.


내가 일부러 여행 관련 코너 앞을 서성일 때, 정작 사회과학책을 집은 건 오스씨였다.

김한민의 『착한 척은 지겨워』라는 책이었다.

평소 화집이나 공포소설이 아니면 책을 보지 않는 사람이 웬일인가 싶었다. 흘끔 보니 내용은 좀 어려운데, 삽화가 꽤 좋았다. 작가 소개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래픽 노블이 주전공인 사람이었다.


“어때 보여?”

“그림 끝내준다. 사라, 사.”


오스씨가 사회과학책을 골랐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사라고 부추겼다.

그렇게 우리의 첫 번째 제주 서적은 ‘내용보단 껍데기에 홀려’ 가볍게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책이 우리의 제주 생활을 완전히 뒤흔들게 될 것을.

그 책을 고른 자신을 오스씨가 얼마나 저주하게 될지를.


책을 계산하려는데, 주인이 말을 걸었다.


“그런데 두 분은 어떤 사이에요? 너무 닮았는데 형제신가?”

“이종사촌이에요!”


우리의 공식 답변이다.

부부라고 밝힐 수 없으니 일단은 거짓의 투명 커튼을 친다. 성이 다르니 친형제라고 했다가는 나중에 들켜 의심만 산다. 이종 사촌지간이 딱이다. 그냥 아는 사이라고 대충 넘겨도 되는데, 사실 누가 봐도 우리가 많이 닮았다. 쌍둥이냐는 소리도 종종 듣는다.


부부는 닮는다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같은 미용실에서 같은 원장님한테 같은 스타일로 자른다. 최대한 귀여워 보이도록 동그란 안경만 쓴다. 둘 다 수염을 기르는데 모양과 길이도 비슷하다. 옷도 니꺼내꺼 구분하지 않은 지 오래다. 결과적으로 멀리서 보면 꽤 비슷해 보인다.

처음엔 당연히 이렇지 않았다.

전형적인 운동권이었던 난 생활한복을 즐겨 입었고, 오스씨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고 다니는 차도남이었다.

나란히 서 있으면 어떤 훈훈한 이야기도 생성되지 않는 강 대 강의 조합.

그런데 클럽 죽도리와 운동권, 아르마니 양복과 생활한복이 만나 어찌어찌 서로를 깎고 다듬다 보니 이제는 쌍둥이 소리를 듣게 되었다.

사랑이 위대한 건지, 세월이 위대한 건지 모르겠다.


우리가 선택한 책을 계산하던 주인은, 참, 이거... 하면서 <제주독립서점지도>라는 것을 펼치더니 풀무질이 그려진 부분에 도장을 꽉 찍었다. 크고 멋진 도장이었다.


“돌아다니면서 도장 찍는 맛이 있을 거예요.”


세상에, 도장 찍기 미션이라니. 퇴행성 관절염의 원인이 그놈의 4대강 종주 수첩(여권처럼 생겼다)에 도장 찍기 때문이었는데.

우리는 이런 미션에 너무 약하단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제주 독립서점 순례가 시작되었다. 한 달 동안 총 14개의 도장을 찍었고, 열여섯 권의 책을 읽었다. 이틀에 한 권 꼴로, 거의 독서 행군이라고 할 만했다.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딱 하나.


“평소에 절대로 읽지 않을 것 같은 책!”


굳이 큰돈 들여 다른 ‘살이’를 하러 왔으니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다.

평소 멀리하던 정치, 부동산, 의료, 명상 관련 책들을 겁도 없이 집어 들고, 아이들이나 본다고 생각해왔던 그림책을 샀다.

제주 독립서점들은 대체로 기후, 비건, 젠더 문제에 열정적이었다. 우리도 그 열기에 동화되어서 관련 책들도 골랐다.

하나의 지역을 여러 가지 각도로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오름 투어.

한 권의 책을 클리어할 때마다 낯선 세상이 펼쳐지는 독립서점 투어.

확실히 뒹굴거리기와는 거리가 먼 살이였다.


독립서점 북덕북덕의 마스코트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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