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데 별로다, 그치?

중년 게이 부부의 제주 한달살이 2

by 선우비
“예쁜데 별로다, 그치?”


지도를 펴보면 알겠지만, 제주 동부는 바닷가가 아니면 중년 여행객을 꼬드길만한 스팟이 많지 않다. 승마를 제외하고는 즐길 거리를 찾기가 어려워 숙소 홈페이지를 뒤져보니 오름 여행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오름은 기생화산을 뜻하는 제주말이다.

보통 소나 말을 키우는 사유지라서 예전에는 외부인 출입을 막았지만, 요즘은 대부분의 오름을 개방하고 등반로, 주차장 등을 관리해 여행객들의 접근을 쉽게 했단다.

제주에는 크고 작은 오름이 삼백여 개가 있지만, 오름 안내 책자에서 추천하는 것은 대략 육십 개 정도. 그중 절반이 숙소에서 30분 이내였다.

이건 안 할 수가 없었다.


오스씨는 내켜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난 살살 꼬드기기 시작했다.

소개 책자에 따르면 오름 대부분은 이십 분이면 정상에 도달한다.


“위에서 구경 좀 하다가 내려와도 한 시간 내외야. 오전에 여유 있게 하나 오르고 돌아와서 오후엔 늘어져 버리자! 여기 사진 좀 봐봐, 전망 끝내주지? 적당히 운동해야 더 잘 뒹굴뒹굴 할 수 있는 법이야.”


위험수위에 오른 우리의 뱃살들, 늙을수록 허벅지 근육이 중요하다는 상식도 내 주장을 돕고 나섰다.


“오전에 한 개? 네가 퍽도 그렇게 하겠다. 반드시 무리할걸?”


NO, 이번에는 절대! NEVER!를 외쳤다. 내 나이도 이제 오십이다. 게이씬에서 나를 ‘남자다운 게이’로 오해하게 만든 저돌성, 객기도 우울증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실 난 이명박 정부 <4대 강 사업>의 피해자였다. 4대 강을 따라 만든 자전거도로를 전부 정복한답시고 미친 듯이 페달을 밟다가 왼쪽 무릎에 퇴행성관절염 진단을 받았다. 한때 오토바이에 미쳐서 전국을 싸돌아다니다 추풍령 고개에서 넘어져 갈아버렸던 바로 그 무릎이었다. 무언가에 한 번 꽂히면 끝장을 봐야 했다.

슬프게도 끝은 항상 좋지 않았다. 무리하면 꼭 탈이 난다는 어른들 말씀의 표본 같은 인생이었다.


“이번엔 무리 안 해. 의사도 무릎 연골 아껴 쓰라고 했단 말이야.”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동의하면서도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던 오스씨는, ‘가벼운 등산에 어울리는 등산복과 등산화’를 사러 백화점에 가서야 비로소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오스씨는 게이에 대한 편견이 가리키는 딱 그대로 ‘패션’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했다.


소개 책자는 오름을 인기도, 접근성, 난이도에 따라 상중하로 나누었다. 난도가 높을수록 전망이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무리하지 않기 위해 접근성이 낮은 오름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첫 도전은 안돌오름, 드라마에 나오면서 유명해진 편백숲 바로 옆이었다.

아침 일찍 갔는데도 편백숲 입구에는 이미 차량이 빼곡했고,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깜찍한 민트색 카라반(매표소로 사용되는 듯) 앞에 줄을 서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 ‘여행하는 한국인’이라는 속설을 증명하는 풍경이었다. 우리는 조금 더 들어가 주차를 하고 오름 입구로 걸어갔다.

불과 백여 미터 떨어져 있는데도 딴 세상처럼 조용했다. 사람이 없으니 마스크도 필요 없었다.

오름의 난이도는 중등급이었지만 관절을 위해 무릎보호대를 장착하고 등산스틱을 양손에 쥐었다. 거의 한라산 등반급 착장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발을 떼고, 영차영차 하다 보니 순식간에 정상이었다. 책자에서 소개된 등급의 의미가 체득됐다.

중등급 : 숨은 헐떡이지만 저질 체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사방이 막힌 곳 없이 뻥 뚫린 정상에서는 한라산과 동부 오름의 대부분, 멀리 성산 일출봉과 바다까지 보였다.

뭐지? 이 저렴한 가성비는? 겨우 십오 분 올랐다고 제주 동부 전체를 볼 수 있다고?

분화구를 한 바퀴 돌며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오름들을 찾아보았다. 거의 다 비슷비슷한 높이들. 이 정도면 하루에 두 개는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겨우 이거 하나 하고 들어가면 기름값이 아깝다. 기왕 나온 김에 하루에 중등급 한 개, 하등급 한 개 어때?”

“뭐... 그래도 되겠네.”


오스씨도 쉽사리 동의했다. 그만큼 오른 수고에 비해 얻어지는 풍광이 풍요로웠다.

평소에 쓸 일이 없는 스마트폰 카메라의 파노라마 기능도 맘껏 썼다.


오름의 매력은 또 있다. 나무로 빼곡한 육지의 산과 달리 낮게 자란 잡목과 목초들로 이루어져서인지 풍경의 선이 부드럽고 눈이 편안하다. 노란 서양 민들레꽃, 보라색의 엉겅퀴꽃, 하얀 찔레꽃 군락을 비롯해 다양한 야생화가 색과 향을 뽐내는 한편, 연두색 새순을 키워낸 들풀과 하얀 억새들이 시원하다 못해 살짝 무섭기까지 한 제주 바람에 흔들리며 윤슬처럼 반짝였다.

여행의 출발로 이보다 완벽할 수 없었다.


내친김에 편백숲도 구경했다. 줄기가 기이하게 뻗어있어 신비롭기까지 한 편백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어 과연 인스타 성지로 추앙받을만 했다.

하지만 사람들로 넘쳐나니 마스크는 필수였다. 사진 찍기 딱 좋다 싶으면 어김없이 여행객이 줄을 섰고, 온갖 자세를 취하며 도무지 양보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 탓에 기다리는 무리에서 욕설이 터져 나오곤 했다. 누가 정해주지는 않았지만 ‘한 스팟 당 한 자세로 3초!’ 룰을 지키며 스팟에서 스팟으로 징검다리 관광을 하자니 금방 피곤해졌다.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이상하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오름에서는 방풍 잠바가 필요할 정도였는데, 빽빽한 나무들 때문인지 제주 바람도 비켜 가는 느낌이었다.


“예쁜데 별로다, 그치?”


자연 그대로의 자연과 인간이 관리한 자연의 대결은 싱겁게 끝난 셈이었다.

이후 여행에서 이러한 대결은 두세 번 더 진행됐고, 언제나 오름의 승리로 끝났다.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입장료를 내야 하는 ‘아름다운 정원’류를 모두 패스하기로 했다.


첫날의 짜릿한 경험은 하나라도 더 많은 오름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으로 금세 승화됐다.

멀리서 보면 비슷비슷해 보여도 막상 그 안으로 들어가면 저마다 개성이 뚜렷했다. 하루에 두 개 약속은 근처에 난도가 낮은 오름이 있으면 여기까지 왔는데... 하면서 깨지기 일쑤였다. 체력을 고려해서 한참 뒤로 미뤄두었던 난이도 상에 해당하는 다랑쉬오름과 성산 일출봉을 1주 차에 정복하고 나니 욕심은 더욱 커졌다.

상등급 : 숨이 헐떡헐떡꼴깍이지만 그래서 더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어 도전하고 싶어지는!


오름 여행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오르머 100대 오름 스크래치 지도>도 사서 벽에 붙여두었다. 정복한 오름의 위치에 있는 은회색 스크래치 덩어리를 동전으로 긁으면 해당 오름의 귀여운 일러스트가 ‘짠’하고 나타났다. 우리는 서로 스크래치를 긁기 위해 눈치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동전을 들고 지도 앞에 선 오스씨의 눈이 아주 벨롱벨롱(반짝반짝을 뜻하는 제주어)했다.


“비가 올 때 가야 더 멋진 오름들이 있대.”


비 오면 맛있는 거 해 먹고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책이나 읽자는 계획은 어느새 잊혔다.

오스씨도 군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 산 멋진 우비를 입어볼 기회로 여겨 반기는 기색이었다.

이틀 동안, 장대비가 쏟아지고 안개가 자욱한데도 오름 책자에서 추천하는 붉은오름, 말찻오름, 물영아리오름을 내리 올랐다. 하나같이 난이도 상에 해당하는 오름들이다.

비로 깨끗하게 씻긴,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빼곡한 삼나무 군락이 뿜어내는 피톤치드의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평소 비염 때문에 공기 중 습도가 조금만 올라도 숨쉬기가 힘든 체질이다. 비가 오면 우울증 증상도 더 심해진다. 하지만 오름 속에 있으니 코가 뻥 뚫리고 오싹할 정도의 상쾌함이 몸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급속도로 오름에 중독되어 갔다.


202205제주 (654).JPG 비오는 말찻오름 하산길. 예쁜 우비지만 비오는 날 산에서 마주치면 섬찟할 듯...


keyword
이전 01화중년 게이 부부의 제주 한달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