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 커플은 무엇으로 사는가 02
Q: 선우비와 오스씨 커플도 명절에 고향에 가나요?
A: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갔었는데, 이제는 안 갑니다.
선우비는 ‘이유 있는 똥고집’ 때문에 명절을 패스합니다.
명절에 가족들끼리 모여서 음식도 만들어 먹고, 영화도 같이 보러 가고, 조카들 돈도 나눠주고, 고스톱도 치고, 즐거웠는데...
차례상을 책임지던 형수가 별거를 선언하고 집을 나가버리자 갑자기,
“올해부터 차례는 절에서 지내기로 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 한창 <며느라기>라는 웹툰에 빠져서 형수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딱 우리 집이 사린이(며느라기 주인공) 시댁 같은 곳이었구나!’ 깨달았습니다.
부끄러우면서 짜증이 나더군요.
형네 부부의 문제를 거론할 필요 없이, 그렇게 쉽게 남에게 맡길 수 있는 차례상이라면 뭐가 중요할까 싶더라고요.
그 점을 콕 집어서 불만을 표했다가는, 그럼 네가 와서 차례상 차려라! 시킬까 봐 겁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도 내 나이쯤 됐을 때 더는 명절에 친정으로 가지 않으셨죠?
저도 그렇답니다.
여기서 같이 명절을 보낼 사람들이 생겼으니, 이제는 명절은 각자 보내는 거로 하죠.”
반응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같이 보내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묻길래 그냥 불우한 이웃이라고 말했더니 다 알아듣더군요.
오스씨는 어머니가 살아계실 땐 꼬박꼬박 갔었는데, 그 이후로는 안 가고 있습니다.
코로나에, 차례상을 차리던 형님네가 공사 중이어서 모일 장소도 없었고요.
“이제 공사가 끝나면 형님이 차례 지내러 오라고 할 텐데, 갈 거야?”
“몰라, 그때 가봐서.”랍니다.
가지....
Q: 왜 가라는 거죠? 연인과 명절을 같이 보내면 좋잖아요.
A: 오스씨는 독점욕이 강하고 분리불안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친구들과 게이바에 놀러 간다고 하면 인상을 팍 구기죠.
“자기는 너무 귀여워서 항상 조심해야 해. 술집에 가면 다 자기만 쳐다보더라.”
눈도 안 좋고, 망상증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18년을 같이 지내면서, 게이바에 천 번은 간 것 같은데, 따로 간 적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것도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더는 명절에 고향에 안 가고, 오스씨 혼자만 고향에 가면서,
즉 명절에 나 혼자 집에 남게 되면서, 앞서 말한 불우이웃과 함께 게이바를 가면서 횟수가 늘어난 것이죠.
명절 전날에, 저와 같은 이유로 혼자 남은 게이 커플 친구와 설마다 스트레스를 받는 솔로 게이 친구들을 그러모아 게이바 원정대를 꾸립니다.
명절은 게이바로선 1년 중 최고의 성수기입니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게이들은 ‘자기가 살던 동네에선 볼 수 없는 (익숙한 사투리의) 고향 게이’를 만나러 오고,
지역 게이들은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얼굴들’을 보러 갑니다.
어느 바에 가도 새로운 얼굴들이 바글바글합니다.
이성애자나 동성애자나 남자란 것들은 “New face=Best face!”입니다.
뭘 어떻게 해보려고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물 구경인 거죠.
살 것도 아닌데, 유튜브에서 디올 2023 SS 패션쇼를 보는 느낌?
멋진 남자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면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지잖아요.
Q: 그럼 이번 명절에도 불우이웃과 게이바 원정을 다녀왔나요?
A: 오스씨가 명절을 쇠러 가지 않았기 때문에 원정대는 발족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이번 설에는 홍예당에서 하는 ‘새해 복-파티’에 참여했어요.
Q: 그게 뭔가요?
A: 서면에 있는 홍예당 사무실에 모여서 술 마시고, 떠들고, 게임도 하며 노는 거예요.
무지개색 중 하나가 포함된 상의를 입고(드레스코드) 먹을 걸 들고 와야 해요.
나는 녹색, 오스씨는 주황색 니트를 입고, 프랑스산 화이트와인을 들고 갔어요.
그런데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와인을 들고 와서 먹을 건 배달시켰답니다.
열 명 정도가 모였는데,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등 퀴어한 조합이었고,
다음 달에 결혼하기로 했다며 청첩장을 돌리는 분도 있었습니다.
원래는 비혼주의자였는데,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 ‘혼인신고 축하 파티’라는 이름으로 결혼식을 한다고 해요.
식순을 보니까 나중에 동성결혼 합법화를 대비해서 혼인신고 공증을 하는 절차까지 있는 등, 상당히 재미있어 보였어요.
다들 와인을 마시며 근황 토크를 나누다가, 럽미큐브, 카탄 같은 보드게임을 했는데, 럽미큐브에선 내가 우승했습니다.
다들 가수, 배우, 팟캐스터 등 재주꾼들의 조합이다 보니 시종일관 왁자지껄, 생각 이상으로 엄청나게 즐겨버렸습니다.
4시간 동안 앉아서 부어라 마셔라 하며 떠들었는데 전혀 피곤하지가 않더라고요.
(1회성으로 끝내지 않고 명절마다 한다고 하니 관심 있는 부산 퀴어는 홍예당 인스타에서 확인하세요.)
Q: 말만 들어도 재미있어 보이네요. 4시간이나 술을 드셨으면 곧바로 집에 들어가셨겠군요.
A: 그럴 리가 있나요. 당연히 불우한 이웃을 만나러 게이바에 갔죠.
나의 가장 오랜 게이 친구, 녀석이 27살 때 처음 만났는데, 올해 나이가 47이라고 하더군요.
만나면 맨날 허접한 이야기만 나누는 관계인데, 이번에도,
“요즘 뉴진스만 들어, 디토 너무 좋지 않니?”,
“난 심심해서 싫더라고요. 여자 케이팝 노래라면 역시 아이브처럼 뭔가 터지는 맛이 있어야...”
뭐 이런 이야기를 하다 헤어졌습니다.
Q: 뭔가 알차다기보다는 꽉 찬 명절을 보냈네요.
A: 알도 차고 속도 차고, 아무튼 가족들과 만나서 전 부치고 고스톱 치는 것보다는 재미있었어요.
내 나이가 되면,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서 하는 것보다 그냥 주어진 관습을 따르는 게 편하다는 걸 깨닫게 돼요.
자유여행보다 패키지여행, 해외에서 낯선 골목길을 헤매는 것보다 리조트에서 참방거리는 게 편한 것처럼요.
몸이 그걸 원하는 게 느껴져요.
그런데... 편하긴 한데, 재미가 없어.
삶에서 재미만 추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기왕 동성애자로, 성소수자로, 퀴어로 태어난 거, 남들과 달라서 차별받을 거라면,
식은 음식 차려놓고 조상님 앞에서 절이나 하며,
“그런데 너 결혼은 언제 할 거니?”,
“아이, 내가 그런 거로 스트레스 주지 말라고 했잖아!”
소리 빽 지르며 가족끼리 할퀴는 명절을 보내는 것보다는 재미있는 일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게 더 낫다 싶네요.
명절 관습들은 죽어서도 자손에 연연하는 이성애자들의 문화로 남겨두고,
오스씨랑 나 둘만의 무언가를 계속 찾아보고 만들어봐야겠다는,
갑자기 탁 튀는 결론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