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영화
블랙이즈킹
라이온킹 오리지널 OST인 한스짐머의 곡이 아닌,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독자적인 프로젝트였던 [라이온킹 : The Gift] 앨범의 곡들로 만든 일종의 음악 영화다.
영화 라이온킹의 실사판 제작에서 여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팝가수 비욘세를 내세워, '누군가에게 더 이상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왕이 돼라'라고 흑인들에게 외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화려한 의상과 현란하다 못해 감탄이 나오는 헤어스타일이 계속해서 화면을 수놓는다. 역동적인 춤과 때론 감미롭고 때론 힘이 넘치는 비욘세의 아름다움은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요즘 도파민 중독 때문에 영화 한 편을 쉬지 않고 보는 게 힘든데도 불구하고, 1시간 20분 정도의 러닝타임 내내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케이팝스타들의 뮤직비디오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멋지긴 하지만, 할리우드가 작정하고 만든 쇼를 보면 '역시 대자본의 힘이 란 이런 것인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비욘세를 비롯해 출현한 흑인 스타들의 원하는 바는, 아프리카의 아름다움과 흑인들의 문화유산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할리우드 자본으로 최대한 화려하게 구현한 그 '멋'에 충분히 공감했다. 그들의 의도는 성공했다.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
OTT로 영화를 보는데도 한눈팔지 않고 끝까지 다 보는 일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작년만 해도 TV화면으로는 그 무엇이라도 이십 분 이상 집중해서 보는 게 불가능할 정도의 도파민중독자였다. 올해 목표는 유튜브 프리미엄을 해지하는 것인데, 부디 스스로에게 건투를 빌어본다.
각설하고, 영화는 나 정도 나이대 팬들에게 익숙한 배우들을 소환해서, 즉 미국의 현실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연배들을 동원해, 요즘의 미국사회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영화적 효과를 사용해 스릴 넘치게 나열한다. 세대 간의 소통의 부재(줄리아로버츠와 아이들의 관계, 영어를 못하는 히스패닉 문제), 흑백갈등(아무리 부자이고 우아한 취미를 가진 흑인이어도 일단 경계부터 하고 보는 줄리아로버츠), 남녀갈등(처음 만난 여자지만 일단 몰카부터 찍고 보는 남자애), 케빈베이컨이 상징하는 남부인들의 공포+제3세계 관련 음모론 등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등장해 주인공들의 신경을 건드린다.
갈등이 계속해서 고조되는 동안 등장인물들을 그나마 위로해 주는 것은 결국 서로에 대한 믿음과 가족애, 그리고 시트콤 프렌즈 정도다.
트럼프발 미국사회의 갈등은 이제 전 세계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 나라가 기침을 하면 죽어나가는 인생들의 도처에 깔렸으니 어쩔 수가 없다. 영화는 그런 미국 사회의 갈등이 어쩌면 소수의 이기적인 인간들의 욕심 때문에 시작되었고, 이제 그들의 통제를 벗어나 미국사회를 집어삼켜버렸다고 주장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할리우드가 좋아하는 가족애가 그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문제가 생기면 일단 총력투쟁으로 나서는 게 당연한 나라에서 살다 보니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할리우드 발상은 정말 손톱만큼도 공감이 되지 않지만, 그 조차도 없는 세상은 더욱 상상하기 싫으니 일단은 영화적 해법에 한 손 거들기는 해 본다.
추락의 해부
남편의 자살? 부인의 살인?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이 시신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리고 영화의 흐름이 법정에서 누구의 잘못으로 인한 죽음인가를 가리는 이야기라면 딱히 신선할 것 같지 않아 솔직히 기대감 없이 오로지 칸영화제의 명성을 담보로 관람을 했는데,
와, 영화제들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이번에도 증명한 영화였다.
영화적 장치로 인한 재미들은 다 차치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들은 역시 남편과 부인의 격렬한 부부싸움이었다. 프랑스 남자와 독일 여자의 싸움은, 일을 저지르는 남성성과 그것을 수습하는 여성성의 대립, 프랑스 철학과 독일 철학의 대립, ENFP와 ISTJ의 대립 등등 수많은 상징들의 격렬한 표현들로 가득해진다. 감독은 젊은 프랑스 여자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카메라는 여주인공의 독일스러움 - 지독한 현실 인식과 명확한 책임소재 인식-을 지지하기도 하고 의문을 보내기도 한다. 그녀가 스트레스를 '성적인 자유'로 풀어버리는 점까지 포함해서.
극 중 남자는 죽고 여자는 살아서 자신을 변론하기 때문에 관객은 자연스럽게 여성의 입장에 감정이입하기 쉽다. 그래서 보는 내내 괴로웠다. 지질하기 그지없는 남편에 자꾸만 감정이입이 되어버린 탓이다.
"상황은 잘 알겠는데, 그게 죽을 만큼 괴로운 일이었던 건가?"
모르겠다. 만약 내가 그 상황이라면, 난 꽤나 뻔뻔한 자기 합리화 갑옷을 심장에 두른 채 살아가면서, 심지어 부인과 자식들에게 이 정도 살아내는 것도 대단한 것이니, 나에게 존경을 보이라고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난 죽은 남자처럼 '실존적이게' 사유하지 못하는 인생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네가 그 정도로 죽으면 나 같은 애들은 어찌 살라는 거니!"
호통치고 싶었다.
아무튼, 극장을 나서는 순간 생각이 쏟아지는 영화가 좋은 영화 같다고 이동진 평론가가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참 좋은 영화였다. 슬프고, 쓴 영화였다.
오키쿠와 세계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이 똥을 푸기 시작한다. 사전정보라고는 일본의 권위 있는 영화평론지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보다 더 높게 평가를 받았다는 문구 하나였다. 정말 소재가 똥인 영화인 줄 전혀 몰랐다. 똥을 푸는 소리까지 너무 리얼해서 윽, 아흑, 크으으, 옆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지만 꽤나 격렬하게 신음을 흘려야 했다. 몸을 배배 꼬고 가끔은 눈과 귀를 막았다.
어릴 때 똥과 친해지는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한 탓에 난 똥을 대하는 게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다. 타인과 똥에 대한 얘기도 못한다. 슬픈 얘기 하나 해야겠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온통 운동권 투성이었다. 그들은 NL노선(친북)과 PD노선(친쏘?)으로 갈라져 격렬하게 싸웠는데, 난 두 번 생각도 없이 PD 쪽으로 갔다. 내 성격과 사주팔자로 따지자면 NL 쪽에 더 친근함을 느껴야 마땅했다. 난 착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을 좋아하니까. NL은 품성론을 공부해서 하나같이 애들이 착했다.
그런데... 당시 우리 과 NL 대빵은 화장실 가자는 말을, "똥 때리러 간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아서 그 선배(와 무리들) 근처도 가지 않았다.
영화는 1시간 30분의, 요즘 영화치고는 짧은 러닝타임이다. 심지어 코미디가 많아서 젼혀 지루하지 않다. 주제도 훌륭하다. 감독은 누구나 똥을 싸고, 그 똥을 퍼서 거름으로 쓰고, 우리의 입안으로 들어갈 음식을 키워내는 순환경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좋은 주제다.
극 중 똥장수의 입을 빌어 냄새나고 더럽다고 하는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고상한 척하는 모든 것들이 다 탈이 난다고 세태를 화끈하게 풍자하기도 한다. 똥냄새를 이겨낸 진정한 사랑도 보여준다.
그런데 난 이 똥잔치가 언제 끝나나... 계속해서 시계를 훔쳐봐야 했다. 그리고 오와리, 한자가 나타나자 탄성이 튀어나왔다.
"아... 하얗게 불태웠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으러 갔다. 극 중 야스케 말대로 똥을 만들러 간 것이다. 솥밥을 먹는데 옆자리 손님이 너무 노골적으로 기침을 하고 나중에 코도 팽팽 풀어댔다. 밥상머리 앞에서 천박하게 뭔 짓인지, 속으로 욕을 하는데, 맞은편에서 먹던 오스씨도 똑같이 기침을 하고 이후 수도 없이 코를 풀어댔다. 세트에 딸려 나온 고추장찌개가 매웠나 보다.(옆 사람도 같은 거 먹었음)
남이 코 풀 땐 짜증 났는데, 내 애인이 코를 풀자 시원해 보여...
왜 감독이 그렇게 똥을 들이댔는지 새삼 이해가 갔다.
똥 폭탄을 투여해야만 깨닫는 인간도 이렇게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