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쿠바 스키여행 2
“그런데, 이제 우리도 스키 타는 모습을 제대로 찍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어?”
오스씨를 떠보았다.
맞다. 스키 기술을 연마할 때는 자세가 어떤지를 체크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상대를 찍으며 슬로프를 내려가는 일은 상당히 어렵고 위험하다. 전문 장비가 필요할 때다!… 는 핑계고, 그냥 매 년 찾아오는 겨울 감기처럼 고프로(Gopro) 뽐뿌가 온 것이다.
“스키 탈 때만 찍고 금방 서랍에 처박아둘 거면서!”
나의 소비패턴을 너무나 잘 아는 오스씨의 단호함 덕분에 그동안 고프로 감기를 효과적으로 치료해 왔는데, 웬일인지 ‘그럼 사볼까?’ 긍정의 시그널을 보내왔다. 오스씨조차 간만의 해외여행에 제대로 들떠버렸다.
최저가를 보장하는 인터넷 면세점에서 세트상품을 주문하고, 공식홈에서 스키 전용 액세서리도 따로 구매했다. 전문가 영상을 보며 스키 탈 때는 어떤 방식으로 찍어야 하는지도 공부했다. 마침내 여행 당일, 김해공항 면세점 인도장에서 제품을 건네받고 두근두근 언박싱을 했는데…
에휴,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절망의 한숨을 흘러나왔다.
박스 안에 메모리카드가 없었다.
이게 뭔 일이야, 검색해 보니 원래 따로 사야 하는 모양이었다. 판매 사이트에는 구성품만 죽 나열할 뿐, 메모리 카드가 없으니 별매를 하라는 경고문구조차 적혀있지 않았다. 수십 년 간 디지털카메라 시대를 거쳐오는 동안 숱하게 많은 카메라를 사 왔지만 가장 중요한 저장장치를 빼고 파는 상술은 또 처음이었다.
요즘 우리는 이런 일을 많이 경험하고 있다. '기본'이라 여겼던 일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꼼꼼한 확인절차 없이 습관적으로 행동하면 꼭 이 같은 일이 벌어진다. 키오스크 앞에서 좌절하는 노인들처럼, 익히고 배워 편안해진 세계가 계속해서 사라지고 매번 새로운 매뉴얼에 당혹해하는 나이가 된 걸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자, 이번 여행의 첫 번째 교훈이었다.
부랴부랴 메모리카드 판매처를 찾아봤지만 김해공항에는 없었고, 나라타공항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져도 전자제품을 팔만한 가게는 없었다. 일단 일본에 도착하면 또 찾아보자 하고 비행기에 탑승했지만 이미 여행의 기대감은 한 풀 꺾인 채였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오스씨는 건물 위아래를 다니며 메모리카드를 찾아다녔고, 수 십 분이 흐른 후 편의점에서 파는 저용량의 메모리 카드를 찾아내고는 '이거 어때?'라는 카톡을 보내왔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전문가들의 추천 제품에 비해서 용량 차이가 너무 컸다. 우리가 원하는 고화질의 동영상을 저장하기엔 무리일 것 같아서 사지 말라고 했다.
그러지 말 걸...
나중에 스키 투어 일행 중 고프로 사용자와 대화를 나눴는데, 그 정도 용량이면 하루 찍을 정도로는 충분하다고 했다.(대신 매일 클라우드에 업데이트를 하고 지워야 하지만)
인터넷 블로그에 서식하는 속칭 전문가들의 말을 맹신하지 말자, 이번 여행의 두 번째 교훈이었다.
이번 스키 여행은 부산에서 온 팀과 서울에서 온 팀이 나리타공항에서 만나 같은 버스를 타고 하쿠바까지 가는 시스템이었다.(부산팀이 먼저 도착해 서울팀을 기다리는 동안 메모리 카드를 찾으러 다닐 수 있었다.) 부산 팀의 숫자만으로는 여행상품을 꾸리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다. 서울에서 와주신 분들, 덕분에 상품을 구매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하쿠바 숙소까지 우리를 데려다줄 송영버스는 나리타 공항을 1시에 출발했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르긴 했지만, 여섯 시간에 걸친 장거리 버스 여행은 지독한 체험이었다. 요즘 나오는 세련된 고속버스가 아니라 옛날 관광버스 스타일이어서 좌석도 좁고 세월의 냄새도 살짝 났다. 세 시간이 넘어서자 엉덩이가 배기고 온몸이 배배 꼬였다. 다운로드해 뒀던 네이버 웹툰도, 클래식 오디오북도 그 지루함과 답답함을 상쇄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돌아올 때 다시 한번 이 경험을 해야 한다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시간은 흘러 흘러 마침내 하쿠바 시내에 들어섰다. 숙소에 도착하기 전 큰 슈퍼마켓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도록 배려해 줬다. 같이 온 일행들은 다들 양손 가득 거대한 보따리를 챙기는데, 우리는 어차피 조식 석식 다 주는 호텔이라 저녁 먹고 나면 더 먹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사케 한 병과 안주 몇 개만 샀다. 사실 이때도 메모리카드 찾아서 마트를 다 뒤지고 다니느라 다른 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스키장엔 물이 비싸니 물을 많이 사라는 일행의 조언도 있었지만 그깟 물 몇 푼 한다고 악착같이 구나 싶어서 당장 마실 세 개 정도만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러지 말걸...
호텔에 도착해 보니 150엔짜리 '프리미엄 생수'만 판매했다. 마트에서는 33엔짜리 생수도 많았는데... 5일간 머물면서 물 값만 만 원이 넘게 쓰고 말았다. 경험자의 조언은 꼭 세겨듣자, 이번 여행의 세 번째 교훈이었다.
호텔은 스키장으로 바로 나갈 수 있다는 장점을 빼곤 봐줄 게 별로 없는 전형적인 시골 호텔이었다. 트윈 침대 옆에 이불장 딸린 다다미방이 있는 료칸 구조였고, 충격적일 정도로 화장실이 작았다. 변기에 앉으면 무릎이 화장실 문에 닿았다. 일본인 평균 신장이 아주 작을 때 지어진 호텔이었다.
그래도 노천탕 딸린 목욕탕이 있어서 맘껏 목욕을 즐길 수 있었고, 호텔의 뷔페도 만족스러웠다. 일본 스키장 호텔 뷔페 음식은 대체로 간이 짜서 먹기 힘든데, 계란프라이도 소금 없이 먹을 정도로 짠맛에 민감한 내 입에도 간이 적당했다. 식당 한쪽에서 파는 생맥주나 하쿠바산 와인도 좋았다.
술 한 잔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져 근처를 둘러보았다. 마침 옆 테이블에 부산에서부터 같이 온 팀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호텔에서 파는 사케를 마시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습관적으로 스몰토크를 시전 했다.
“여기 생맥주가 아주 맛있네요. 드시고 계신 사케 맛은 좀 어떤가요?”
맛있다고 하면 우리도 시켜 먹을 요량이었다.
60대의 잘 차려입은 할아버지는, 순간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까마귀 몇 마리가 지나갈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표정을 수습한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맛이 괜찮다고 하더니, 갑자기 “우리 같은 사람은 사케 먹을 줄 몰라서… 뭐 맛을 알겠습니까.”하며 과장되게 웃었다.
갑자기 커진 웃음과 말의 뉘앙스가 싸했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입은 웃는데, 눈은...
아…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왠지 주접떨면서 나대는 인간이 된 기분이 들었다.
오스씨는 어쩌면 부산사람이라 그렇게 말한 걸 지도 모른다고 했다. 부산식 유머라면서.
엥? 그런 거였어? 그렇다면 나도 부산식 유머로 대꾸를 해줬어야 했을 텐데… 지나치게 뻘쭘하게 반응해 버렸다. 부산에서 십수 년을 살았지만 부산 사람을 대하는 것은 아직도 어려운 숙제다.
지금도 모르겠다, 저런 반응에 어떻게 리액션을 해야 하는지. 혹시 부산 분들이 있으면 조언을 부탁한다.
온천에서 목욕하고 열 시쯤 잠에 들었지만 지나친 난방 때문에 새벽 3시쯤 깼다. 그때부터 어영부영 비몽사몽 6시까지 뒹굴었다. 여행 전날은 긴장해서 잠 못 자고, 여행 첫날은 낯설어서 잠 못 자는, 하여간 짜증 나는 예민만땅 몸뚱이. 나 같은 사람에게 여행의 시작은 익숙한 집에 찰떡으로 적응되어 있는 몸뚱이와 싸우는 일부터다.
아침 목욕을 하고 밥을 먹고 스키를 챙겼다. 진짜 여행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