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고비 넘기며 떠나는 희망여행
행운의 숫자 ‘7’을 좋아하기에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우리 모녀 7번째 여행. 여수를 거쳐 순천만을 다녀오는 여정.
첫날부터 걷고 또 걸었다. 향일암도 오르고 오동도도 다녀오고. 평소 운동과는 거리가 먼 우리 모녀에게 불이 떨어졌다. 발등이 아닌 발바닥에.
‘걷는 운동이라도 좀 할걸.’
급 후회가 밀려왔다. 평소 체력관리 못 한 서로를 탓하며 말이다. 다행히 맨발걷기로 뜨거운 발바닥을 그나마 조금 식혔다.
다음날, 순천만 갈대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활한 자연 그대로 드넓은 길. 도착하자마자 숨이 헉 막혔다.
‘아! 진짜 이번 여행 잘못 잡았네. 실수다. 큰 실수!’
늘 재잘대던 나는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고 엄마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아니다! 이번 여행은 금강산도 체력이었다.
‘다시 버스로 가야 되나. 아니지. 여기까지 와서. 갈대밭을 언제 또 보러 오겠어. 그치. 이렇게 아름답게 넘실거리는 갈대를 두고 그냥 갈 수는 없지.’
내적갈등 끝에 내린 결론. 톤을 한껏 높이며(원래 톤은 높지만) 모르는 척 말을 건넸다.
“엄마, 순천만이야. 갈대 좀 봐. 바람에 춤추고 있어.”
“됐다.”
엄마는 지금까지 많이 참고 있었다. 딸 눈치를 보고 있었던 거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저 가시내가 힘들다 하면 성질내면서 펄펄 뛰겠지.’
“여기까지 와서 안 가본다고?”
한참 뜸을 들이더니 엄마가 대답했다.
“그래. 가자. 언제 또 오겠냐?”
우리 모녀는 갈대밭을 거닐었다. 입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거리까지만. 되돌아 나오는 길에 벤치에 앉아 쉬었다. 그렇게 우린 7번째 여행을 마무리했다. 행운은 무슨! 기대한 만큼 화가 났다. 사실 “7”은 숫자일 뿐 잘못한 게 없다.
역에서 집으로 오는 택시 안. 엄마는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진짜 어린아이가 길 가다가 넘어져 우는 것처럼.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할 정도였다.
“엄마, 왜 그래? 왜 울어? 응?”
“아파. 진짜 너무 아파. 나 너무 아파.”
‘아프다’는 말을 쉽게 내뱉지 않는 엄마가 운다. 아프다고. 그것도 택시 안에서. 택시 기사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내 귓가에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김광진 가수의 ‘편지’.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내 욕심이었나. 아니면 여기까지 다닌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나.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바로 병원예약부터 했다. 다행히도 내가 병간호할 수 있는 거리에 그 시절 ‘관절’하면 떠오르는, 이름만 들어도 힘이 날 것 같은 ‘힘찬병원’에서 엄마는 무릎연골 수술을 했다. 한쪽도 아닌 양쪽을. 엄마는 수술 후 한동안 앉는 것도, 걷는 것도 힘들었다. “그냥 놔두지. 왜 나를 수술시켰냐”며 나만 보면 화를 냈다.
여행을 통해 발견된 엄마의 통증. 38세부터 시작된 퇴행성관절염이었다.
수술은 가벼운 시작에 불과했다. 몇 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못한 발바닥 통증이 문제였다. 거인 발처럼 부풀어 올라 일반 신발을 찢어야 하는 지경까지 오고야 말았다. 핑계지만 내가 자취하고 있을 때라 너무 늦게서야 알았다. 엄마는 내가 걱정할까 봐 말도 못 꺼내게 아빠 입단속을 했단다. 이럴 때만 말 잘 듣는 아빠 덕분에 아니 ‘때문에’. 또 발등에 불 떨어졌다. 대학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 끝에 결과가 나왔다. 희귀병 류마티스 관절염이었다.
“희귀병이요? 우리 엄마가요?”
재차 묻는 내 옆에 엄마는 바르르 떨고 있었다. 평생 약을 먹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우리 엄마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랜만에 집에 오니 엄마가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어디서 썩은 냄새 나지 않냐? 뭐가 썩고 있어.”
“내가 니 엄마 때문에 못 살겠다.”
대뜸 나에게 어디서 냄새나는지 집에 온 김에 빨리 찾으라고 성화였다. 옆에 있던 아빠는 나를 구세주를 보듯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냄새 근원지는 끝내 찾지 못했다.
다음 날, 나는 엄마를 모시고 정기진료를 받으러 갔다. 가는 길에 이비인후과에도 들렀다. 나의 촉은 무서울 만큼 정확할 때가 있다. 아니길 바랐지만. 영문도 모른 채 엄마는 졸졸 따라다녔다. 레지던트는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환자분, 지금 특진으로 교수님이 진료할 겁니다. 긴급수술 들어갈 수도 있어요.”
엄마는 그날 수술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처음 맛본 마카롱에 행복했는데. 코에 가득 찬 혹이 시신경 몇mm 앞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하마터면 눈까지 잃을 뻔했단다.
코 수술을 마치고 엄마는 말했다.
“어디서 그러더라. 너 때문에 내가 죽고 싶어도 못 죽는대. 저승 앞까지 가는 나를 네가 꼭 살린 대더라. 희한하지. 희한해. 네가 의사도 아니잖아.”
그 말이 맞을 수도.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빠가 아닌 내가 옆에 있었다.
어린이날이었다. 아빠는 혼자 낚시를 갔다. 엄마는 복통에 떼굴떼굴 굴렀고 중학생이었던 나는 택시를 잡고 응급실로 엄마를 모시고 갔다. 엄마는 그날 쓸개를 떼어냈다.
어떤 날은 이층집 가파른 계단 꼭대기에서 엄마가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졌다. ‘쿵’ 소리와 함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심장이 벌렁거린다. 엄마는 쓰러졌고 깨어나지 않았다. 심폐소생술도 전혀 모르던 때라 간절히 엄마 옆에서 소리치며 울었다. 119신고도 못했다. 집에 들어가면 엄마를 두 번 다시 못 볼까 봐.
“엄마! 안 돼. 엄마! 지금 가면 안 돼. 나 어떡하라고. ”
간절히 기도했다.
‘부처님, 제발, 살려주세요. 엄마까지 빼앗지 말아요. 저한테는 엄마밖에 없습니다. 지금 데려가거든 저도 갑니다. 저도 데려가세요.’
기도 아닌 협박을 했다. 그리고 한 계단씩 떨면서 올라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엄마가 눈을 떴다.
“선예야.”
엄마는 그렇게 기적처럼 일어나 걸었다. 그 이후로도 엄마는 두 번의 수술을 더 받았다. 잊을만하면 엄마의 아픔들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류마티스 관절염 약은 너무 독했다. 구토는 엄마의 일상이 되었다. 먹다가도 구토, 먹었는가 싶으면 또 구토. 구토하다가 결국 굶기 시작했고 체중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엄마가 여자 아이돌이야? 45kg이라니. 어떡할 거야?”
“다 늙어서 아이돌은 무슨. 늙어서 못해”
기력이 떨어져 누워있으면서도 엄마 개그는 변함없었다.
한창 유행하는 타로카드 점을 보았다.
“편찮으시죠? 지금 아픈 거는 아픈 것도 아니에요. 앞으로 더 아플 거예요. 죽을 만큼.”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엄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더 볼 것도 없다고 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점술가는 말하였다.
“신기하게도 죽을 고비 넘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어떤 계기로 벌떡 일어나요. 밥도 잘 먹고 딸이랑 전국일주라고 해야 되나. 방방곡곡을 다녀요. 다니다가 나중에는 비행기도 타요. 그러니까 어머님, 건강하셔요.”
어찌 되었든 우리 엄마는 기적처럼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엄마는 타로점 결과를 너무 싫어했지만 나는 희망이 있어서 좋았다. 죽을 고비만 잘 넘기면 된다는 희망. 우리 모녀 여행을 또 갈 수 있다는 희망. 지금도 그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덧붙이는 말. 엄마는 지나고 보니 신통방통하다며 타로카드 점술가를 찾으려고 애썼다. 마침내 점술가에게 미안했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