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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영 Apr 21. 2023

혹시 당신도, 정신적 과잉 활동인??

나와 같은 사람이 있긴 한 걸까.



나는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살았다.



친절하고 예의 바르며 쾌활하면서 착하기도 했다. 젊었을 땐 놀고먹느라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한 적이 없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연애도, 대인관계도 그럭저럭 큰 문제없이 잘 지내왔던 건 그때까지 가짜인 내가 잘 먹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육아는 그랬던 나의 자존감의 바닥을 보게 했다. 사회생활은 불편한 상황을 맞닥뜨려도 어떻게든 피하거나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육아는 달랐다. 용가리 폭주기관차 같은 막둥이 아들은 매일 내 사랑과 인내심을 시험하듯 난도를 높이며 나를 자극했다. 누가 대신해 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육아전쟁.

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애를 셋이나 자연분만으로 뺐음에도 불구하고)

배운 건 있어 아이에게 손 한 번 대지 않고 감정을 읽어주고 어르고 달래고 잘하다가도, 아이의 짜증과 울음은 쓰나미처럼 내 감정을 침범해 그 보다 수백 배, 수천 배의 화로 분출하는 나를 보기도 했다.



잠깐, 여기까지는 흔해 빠진 육아고충 에세이와 다를 바 없다.​


딸 둘이 건너 방에서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소리가 너무 거슬린다. 동생은 언니에게 논리로 이기지 못하니 부들부들 분해서 더욱 말이 헛 나오고, 언니는 그런 동생이 가소로워 실실 웃으며 따박따박 일침을 놓는다. 불편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고 어서 개입해서 싸움을 멈추고 싶다. 참을 수가 없다.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나 보다.

“애들 싸우는 소리 안 들려?”

“응? 느그 와 또 싸우노?(딸들에게 닿지 않는 혼잣말)“  

끝.

12년 차 애 아빠임에도 남편은 애들한테 큰 소리 한 번 낸 적 없다. 화가 안 난단다. 애들이니까 그럴 수 있단다. 인자한 신라의 미소를 그 얼굴에 띠며 육아의 달인처럼 말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는 이 상황에서 철저하게 제3자다. ​

​​


여기까지도 현대에 보기 드문 희귀종, 육아 안 하는 남편에 대한 에세이와 다를 바 없겠다.





금요일 저녁은 주말을 앞두고 있는 시간이라 육아와 살림의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다. 세 남매는 온 거실을 어지르며 놀고, 나는 빨래를 개면서 채널A에서 방영하는  ‘오은영의 금쪽상담소’에서 다음과 같은 체크리스트를 보게 되었다.


<정신적 과잉 활동 상태> 체크리스트

1. 사소한 일에도 쉽게 예민해진다.
2.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3. 뭔가를 잘못 선택한 날에는 밤에 잠을 못 잔다.
4. 타인의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5. 나 자신의 가치나 자격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6. 활동적이지 않으면 불안하다.
7. 작은 결정을 할 때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 채널A ‘오은영의 금쪽상담소’ 2023.02.24 방송분 화면 참고함.


위의 체크리스트에서 3~4개 해당되면 정신적 과잉 활동인의 범주라는데 나는 7개 모두 해당되었다. 순간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저거 내 이야기 같아!’ 하면서 (아니라고 하기엔 손가락 7개를 다 접었으니까) 마치 눈을 앞트임, 뒤트임을 하면 이런 느낌일까? 시야가 환하게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에게는 저 일상적인 문장들이 체크리스트 항목이라는 자체가 놀라울 정도였다. 아쉽게도 ​내 주변에 나와 같은 결과를 갖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남편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크리스텔 프티콜랭



크리스텔 프티콜랭의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라는 책을 찾아 단숨에 읽었다.

 책에 따르면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전체 인구의 15~30% 정도의 비율로써 우뇌 지배형이 훨씬 많다고 한다. ​예민한 감각기관은 처음부터 뇌가 그렇게 타고난 것이며 주변인의 말투, 표정, 몸짓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감정적이나 우리 사회에서 미성숙하고 연약한 사람, 마음이 약한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지금까지 수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나만 이러는’ 이유를 알게 되었고 책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




내 이야기를 해볼까?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날 밤은 침실에 있는 공기만큼 나의 생각의 언어들이 가득 찬 느낌이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 나 자신 또한 재고의 대상이 되므로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자주 죄책감에 빠지거나 자존감이 약해진다. 육아효능감을 많이 상실했었다.

큰 소리를 싫어한다. 마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천둥 치는 소리가 무섭다. 사물놀이패의 알록달록한 옷가지 장식과 큰 악기소리가 좋지 않다.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한다. 슬픈 스토리로 정평이 난 영화는 주연 배우가 누구이든 관객수가 얼마를 돌파했든 내 의지로 절대 찾아보지 않는다. 영화는 해피엔딩이어야 개운하다.

어떤 가사나 단어, 찰나의 장면에서 영감을 받는다. 며칠 전에는 김이나 님이 작사한 아이브 노래 I AM의 한 구절이 아름답게 찡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얘기를 주변에 할 수 없어 혼자 다이어리에 쓰고, 혼자 느끼고, 혼자 감명받는다. 그래서 가끔 외롭다.

웬만하면 살생하지 않는다. 우습게도 난 파리를 못 죽인다. 붕붕 위협적으로 날아다니기는 하지만 내 눈으로 확인할 만한 해를 크게 주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동네 언니들이 집에 놀러 왔는데 통통한 파리 한 마리가 하도 날아다니기에 할 수 없이 전기모기채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파리를 눈 뜨고 보지도 못하고 전기모기채를 든 팔은 바보같이 허공에 휘두르며 이렇게 소리 질렀다. “악!!! 미안해!!!  으악!! 그러니까 우리 집에 오지 마!!”  

“넌 지금도 그렇게 남편이 좋니?” 결혼 12년 차 아이 셋인 나에게 친구들이 신기해하며 묻는다. 정신적 과잉 활동인에게는 사랑 또한 아주 중요한 감정이자 가치관이다. 나도 내 남편이 왜 지금도 출근하면 보고 싶고, 여전히 잘생겨 보이고, 스킨십이 연애때와 변함없는지 궁금했는데 남편이 잘해서 그런 게 아니고 내 뇌가 이렇게 생겨먹은 게 이유였다.

폭력은 게임의 일부라 해도 싫다. 어릴 적에도 손목 때리기 벌칙이 걸린 게임은 혼자만 뒤로 빠졌다. 게임의 분위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맞는 건 그렇다 쳐도 이겨서 상대를 때려야 할 입장이 되면 못하겠다고 내빼니, 초등학교 시절에는 ‘착한 척한다’느니,  ‘공주병 걸렸다 ‘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때리고 아파하면서 웃겨 죽겠다는 그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날 것을 먹기가 힘들다. 부산에서 나고 자랐지만 회를 안 좋아한다. 물고기의 생살을 씹는 것 같은 식감이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불판 위에서 꿈틀거리는 곰장어, 팔딱거리는 생새우회, 산 낙지도 평생 입에 넣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조금 피곤한가?

용기 내어 조심스럽게 묻고 싶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나와 비슷한 점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문제는 내가 정신적 과잉 활동인인 것 같다고 커밍아웃을 하면 다들 나를 안쓰러워한다는 것이다. 조금 억울하다. “왜 그렇게 별 것 아닌 것에 신경을 써?”, “그렇게 예민해서 피곤하겠다.”며 나를 위로한다. 왜 날 가여워하는 걸까?


그래서 글을 쓴다. 일기를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글로 생각을 풀어내면 머리도 정리될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느낌이라 속이 시원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브런치와 같은 플랫폼을 통한 글쓰기는 혼자 쓰는 일기보다 더 큰 장점을 지녔다. 나를 이해하고 공감해 줄 가상의 독자를 상상하면 더없는 위로가 된다. 지금까지 나에게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실제로 본 적 없는 유니콘과 같으니까.


​​ 나 스스로 나를 정신적 과잉 활동인의 범주에 넣고 나자 나는 예민한 내 뇌를 사랑하게 되었다. 곧 나를 더 사랑하고 나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가 짜증을 낼 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건 지나치게 아이의 감정이 이입된 것이다. 짜증은 아이의 감정이고, 내 감정과는 별개라는 걸 이해한다. (현실육아현장과는 다소 다를 수 있음 주의**)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도 나는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더 많이 감응하므로 내 인생은 훨씬 풍요롭다.

 이제 나의 민감함은 축복이다.

 남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평생 가지지 못할 이 감각들로 나는 내 인생을 글로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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