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같은 사람이 있긴 한 걸까.
나는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살았다.
친절하고 예의 바르며 쾌활하면서 착하기도 했다. 젊었을 땐 놀고먹느라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한 적이 없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연애도, 대인관계도 그럭저럭 큰 문제없이 잘 지내왔던 건 그때까지 가짜인 내가 잘 먹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육아는 그랬던 나의 자존감의 바닥을 보게 했다. 사회생활은 불편한 상황을 맞닥뜨려도 어떻게든 피하거나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육아는 달랐다. 용가리 폭주기관차 같은 막둥이 아들은 매일 내 사랑과 인내심을 시험하듯 난도를 높이며 나를 자극했다. 누가 대신해 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육아전쟁.
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애를 셋이나 자연분만으로 뺐음에도 불구하고)
배운 건 있어 아이에게 손 한 번 대지 않고 감정을 읽어주고 어르고 달래고 잘하다가도, 아이의 짜증과 울음은 쓰나미처럼 내 감정을 침범해 그 보다 수백 배, 수천 배의 화로 분출하는 나를 보기도 했다.
잠깐, 여기까지는 흔해 빠진 육아고충 에세이와 다를 바 없다.
딸 둘이 건너 방에서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소리가 너무 거슬린다. 동생은 언니에게 논리로 이기지 못하니 부들부들 분해서 더욱 말이 헛 나오고, 언니는 그런 동생이 가소로워 실실 웃으며 따박따박 일침을 놓는다. 불편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고 어서 개입해서 싸움을 멈추고 싶다. 참을 수가 없다.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나 보다.
“애들 싸우는 소리 안 들려?”
“응? 느그 와 또 싸우노?(딸들에게 닿지 않는 혼잣말)“
끝.
12년 차 애 아빠임에도 남편은 애들한테 큰 소리 한 번 낸 적 없다. 화가 안 난단다. 애들이니까 그럴 수 있단다. 인자한 신라의 미소를 그 얼굴에 띠며 육아의 달인처럼 말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는 이 상황에서 철저하게 제3자다.
여기까지도 현대에 보기 드문 희귀종, 육아 안 하는 남편에 대한 에세이와 다를 바 없겠다.
금요일 저녁은 주말을 앞두고 있는 시간이라 육아와 살림의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다. 세 남매는 온 거실을 어지르며 놀고, 나는 빨래를 개면서 채널A에서 방영하는 ‘오은영의 금쪽상담소’에서 다음과 같은 체크리스트를 보게 되었다.
<정신적 과잉 활동 상태> 체크리스트
1. 사소한 일에도 쉽게 예민해진다.
2.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3. 뭔가를 잘못 선택한 날에는 밤에 잠을 못 잔다.
4. 타인의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5. 나 자신의 가치나 자격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6. 활동적이지 않으면 불안하다.
7. 작은 결정을 할 때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 채널A ‘오은영의 금쪽상담소’ 2023.02.24 방송분 화면 참고함.
위의 체크리스트에서 3~4개 해당되면 정신적 과잉 활동인의 범주라는데 나는 7개 모두 해당되었다. 순간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저거 내 이야기 같아!’ 하면서 (아니라고 하기엔 손가락 7개를 다 접었으니까) 마치 눈을 앞트임, 뒤트임을 하면 이런 느낌일까? 시야가 환하게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에게는 저 일상적인 문장들이 체크리스트 항목이라는 자체가 놀라울 정도였다. 아쉽게도 내 주변에 나와 같은 결과를 갖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남편은 두 말할 것도 없다.
크리스텔 프티콜랭의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라는 책을 찾아 단숨에 읽었다.
책에 따르면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전체 인구의 15~30% 정도의 비율로써 우뇌 지배형이 훨씬 많다고 한다. 예민한 감각기관은 처음부터 뇌가 그렇게 타고난 것이며 주변인의 말투, 표정, 몸짓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감정적이나 우리 사회에서 미성숙하고 연약한 사람, 마음이 약한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지금까지 수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나만 이러는’ 이유를 알게 되었고 책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
내 이야기를 해볼까?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날 밤은 침실에 있는 공기만큼 나의 생각의 언어들이 가득 찬 느낌이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 나 자신 또한 재고의 대상이 되므로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자주 죄책감에 빠지거나 자존감이 약해진다. 육아효능감을 많이 상실했었다.
큰 소리를 싫어한다. 마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천둥 치는 소리가 무섭다. 사물놀이패의 알록달록한 옷가지 장식과 큰 악기소리가 좋지 않다.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한다. 슬픈 스토리로 정평이 난 영화는 주연 배우가 누구이든 관객수가 얼마를 돌파했든 내 의지로 절대 찾아보지 않는다. 영화는 해피엔딩이어야 개운하다.
어떤 가사나 단어, 찰나의 장면에서 영감을 받는다. 며칠 전에는 김이나 님이 작사한 아이브 노래 I AM의 한 구절이 아름답게 찡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얘기를 주변에 할 수 없어 혼자 다이어리에 쓰고, 혼자 느끼고, 혼자 감명받는다. 그래서 가끔 외롭다.
웬만하면 살생하지 않는다. 우습게도 난 파리를 못 죽인다. 붕붕 위협적으로 날아다니기는 하지만 내 눈으로 확인할 만한 해를 크게 주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동네 언니들이 집에 놀러 왔는데 통통한 파리 한 마리가 하도 날아다니기에 할 수 없이 전기모기채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파리를 눈 뜨고 보지도 못하고 전기모기채를 든 팔은 바보같이 허공에 휘두르며 이렇게 소리 질렀다. “악!!! 미안해!!! 으악!! 그러니까 우리 집에 오지 마!!”
“넌 지금도 그렇게 남편이 좋니?” 결혼 12년 차 아이 셋인 나에게 친구들이 신기해하며 묻는다. 정신적 과잉 활동인에게는 사랑 또한 아주 중요한 감정이자 가치관이다. 나도 내 남편이 왜 지금도 출근하면 보고 싶고, 여전히 잘생겨 보이고, 스킨십이 연애때와 변함없는지 궁금했는데 남편이 잘해서 그런 게 아니고 내 뇌가 이렇게 생겨먹은 게 이유였다.
폭력은 게임의 일부라 해도 싫다. 어릴 적에도 손목 때리기 벌칙이 걸린 게임은 혼자만 뒤로 빠졌다. 게임의 분위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맞는 건 그렇다 쳐도 이겨서 상대를 때려야 할 입장이 되면 못하겠다고 내빼니, 초등학교 시절에는 ‘착한 척한다’느니, ‘공주병 걸렸다 ‘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때리고 아파하면서 웃겨 죽겠다는 그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날 것을 먹기가 힘들다. 부산에서 나고 자랐지만 회를 안 좋아한다. 물고기의 생살을 씹는 것 같은 식감이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불판 위에서 꿈틀거리는 곰장어, 팔딱거리는 생새우회, 산 낙지도 평생 입에 넣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조금 피곤한가?
용기 내어 조심스럽게 묻고 싶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나와 비슷한 점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문제는 내가 정신적 과잉 활동인인 것 같다고 커밍아웃을 하면 다들 나를 안쓰러워한다는 것이다. 조금 억울하다. “왜 그렇게 별 것 아닌 것에 신경을 써?”, “그렇게 예민해서 피곤하겠다.”며 나를 위로한다. 왜 날 가여워하는 걸까?
그래서 글을 쓴다. 일기를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글로 생각을 풀어내면 머리도 정리될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느낌이라 속이 시원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브런치와 같은 플랫폼을 통한 글쓰기는 혼자 쓰는 일기보다 더 큰 장점을 지녔다. 나를 이해하고 공감해 줄 가상의 독자를 상상하면 더없는 위로가 된다. 지금까지 나에게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실제로 본 적 없는 유니콘과 같으니까.
나 스스로 나를 정신적 과잉 활동인의 범주에 넣고 나자 나는 예민한 내 뇌를 사랑하게 되었다. 곧 나를 더 사랑하고 나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가 짜증을 낼 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건 지나치게 아이의 감정이 이입된 것이다. 짜증은 아이의 감정이고, 내 감정과는 별개라는 걸 이해한다. (현실육아현장과는 다소 다를 수 있음 주의**)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도 나는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더 많이 감응하므로 내 인생은 훨씬 풍요롭다.
이제 나의 민감함은 축복이다.
남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평생 가지지 못할 이 감각들로 나는 내 인생을 글로 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