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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율 Oct 23. 2020

요가원에서 아모르 파티 타령

내 몸이 남들과 다른 대로, 내 경험이 남들과 다른 대로 실존하기

 나의 실존은 상황과 사회가 허락하는 만큼만 빼고 댕강 잘려나갔다.





내가 원하는 게 뭘까?


자문할 때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진로나 인간관계를 고민할 때, 내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그럴 듯한 결과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결과가 뭘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의 바쁜 뇌는 언제나 내가 원해도 되는 것, 원할 수 있는 것, 원할 자격이 있는 것, 요청하면 남이 들어줄 만한 것을 찾았다. 그것들만을 원한다고 믿느라 순수한 욕망은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검열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발견한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열두 살 이후로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은 언제나 머릿속에서 "너는 뭐가 될 수 있을 것 같니"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원하는 연애가 정답인 줄 알았다. 연애는 이렇게 하는 거야. 연인끼리는 원래 주말을 함께 보내는 거야. 연인끼리는 원래 문자 연락을 하루 종일 이어나가는 거야.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려니 하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려 노력했다. 사실 상대는 사람과의 끊임없는 접촉을 원하는 타입이고, 나는 단지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이 필요한 타입이란 걸- 그러니까 내 욕구와 내 선호 역시 다를 뿐 틀리지 않다는 걸 알지 못했다.


내가 처한 상황이 부조리하거나 불편해도 나는 상황이 허락하는 것만을 요구했고, 마음이 가는대로 택하면 되는 상황에서도 내가 어디에 끌리는지 감지할 수 없었다. 언젠가 한번, 여느 때처럼 선택 마비 상태로 끙끙대다가, 문득 니체가 떠올랐다. 그가 말한 데카당이 바로 나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니체의 눈으로 보니, 나의 내면에서 신나게 춤을 춰야 할 생동력이 좁은 공간에 갇혀 억눌려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실존은 상황과 사회가 허락하는 만큼만 빼고 댕강 잘려나갔다. 영원회귀 해서 내가 지금하는 선택과 지금 살기로 한 삶이 무한히 반복되어도 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을까? 욕심을 내지 않고 사는 걸 득도라고 우겨보고도 싶지만, 사실 난 욕심을 버린 게 아니다. 두려움과 체념에 휩싸여 내가 마땅히 욕망해도 좋은 것을 억누르고 있을 뿐. 니체가 제시한 실존의 방식은 운명을 사랑하는 삶이지, 주어진 모든 것에 체념하는 삶은 아니지 않나.


내가 따라하면 우스운 꼴이 되는 동작들을 남들은 대체로 쉽게 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이 어렵게 하지만 내가 쉽게 하는 아사나도 있었다.


나를 찾기 위한 여정 중 하나로 선택한 것이 요가였다. 나는 요가원에서 옆 사람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관심이 많은 편이다. 내가 전체 인구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 내 느낌과 능력이 평균치인지 아닌지가 무척 궁금하다. 안 좋은 습관인 건 안다. 내가 따라하면 우스운 꼴이 되는 동작들을 남들은 대체로 쉽게 했다. 예컨대 나는 하이 플랭크 자세에서 차투랑가 단다사나로 서서히 내려갈 수가 없어서 매트 위에 철푸덕 떨어졌는데, 나만 빼고 다들 척척 해냈다. 나무 자세에서 잠시도 똑바로 서있지 못하는 사람도 나 밖에 없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이 어렵게 하지만 내가 쉽게 하는 아사나도 있었다. 다누라사나가 그랬다. 눈을 감고 자세에 집중하다가 동료 수련자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면 내가 잘못하나 의심이 들었다. 선생님이 내 자세를 고쳐 주지 않고 그냥 지나가면 내가 틀리게 하는 것은 아니로구나, 하고 안심했다.


그런 동작들을 경험한 뒤에는 주로 사바사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 생각할 때, 깨달음이 따라왔다. 각자의 몸이 다를 뿐이다. 남들이 쉬워하는 것을 내가 어려워한다고 해서 내가 틀린 것이 아니고, 남들이 어렵게 하는 것을 내가 쉽게 하는 때도 남들이 열등한 게 아니다. 우리는 서로 미세하게 다른 몸을 타고난 데다가 살면서 몸을 다르게 사용해왔기에, 편안한 자세와 힘든 자세가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사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강점이 있다, 류의 바른 말은 어릴 적부터 많이 들어 봤다. 그런데도 요가를 하면서 처음으로 깨달은 거다. 내가 남들과 다르게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나는 다만 다를 뿐이라는 것을 정말로 이해하니까 내 느낌과 욕구, 욕망에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쿨하게 넘길 수 있는 일에 연연할 때, '내가 너무 예민해서'라고 습관처럼 자책하는 나를 발견하면 멈췄다. "나는 지금 마음이 상했다. 나는 이런 일에 마음이 상하는 사람이고, 이런 일을 쿨하게 넘기는 사람과 동등하게 온전한 사람이므로 내 감정도 정답이다." 하고 토닥토닥 했다. 내 공간에 내가 고르지 않은 물건은 없었으면 좋겠다. 일은 하루에 5시간만 하고 싶다. 날 딱히 보고 싶어하지 않는 그 사람이 날 좋아했으면 좋겠다. 칭찬 받고 싶다. 인정 받고 싶다. 감사 받고 싶다. 글 쓰는 게 내 삶이면 좋겠다.


아무리 연습하고 공부하고 노력해도 모든 일이 쉬워질 수는 없다. 내 몸에 유달리 가혹한 일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 사실을 인정하니 내 약점에 너그럽기가 덜 어려워졌다. 자립적이고 능력있는 어른이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내가 어려워 하든 힘들어하든 무시하고 어쨌든 해내려고 했다. 남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우겼다. 그러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면서 나를 채찍질했고, 그래도 해내지 못하면 내 연약함을 원망했다. (애인의 친구를 만나는 일이 상식적으로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거절당해도 큰일이 나지 않으니까 두려워하면 안 되지, 집주인과 통화는 성숙한 어른이라면 마음의 준비씩이나 필요한 일은 아니니까,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걸 남들이 더 좋아하니까, 명랑하고 외향적이고 에너제틱한 사람이 이상적이니까, 타인이 곁에 있어도 내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 굳이 방 두 개짜리 집으로 이사하지 않아도 되니까) 전부 다 잘해야 한다고 나를 몰아붙였다. 내가 그러는 줄도 모르고 그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을 무척 어려워하는 또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종 보존을 위해 유전적 다양성을 유지한다!) 그 사람이 나일 수도 있다. 는 별것도 아닌 어려움에 엄살 부리는 것이 아니고, 내게 느껴지는 그대로 반응할 뿐이다. 내 몸이 남의 몸과 같지 않으므로 어떤 일은 내게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반면, 다른 사람이 어렵게 하는 일을 놀랍도록 쉽게 해낼 수 있기도 하다.


아무리 연습하고 공부하고 노력해도 모든 일이 쉬워질 수는 없다. 내 몸에 유달리 가혹한 일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내 관찰에 따르면 전굴 자세, 우타나사나에서 허리를 쭉 펴면서 다리도 쭉 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다들 자기 몸에 맞게 무릎을 굽혀서 수리야 나마스카르 시퀀스를 해낸다. 언젠가는 무릎을 펼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영영 무릎이 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요가를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잘못된 인간인 것도 아니다. 우타나사나에서 무릎을 구부리는 인생이 우타나사나 모양을 완벽히 구현하는 인생 보다 실패한 삶일 리 없다.


무리해서 다치면서까지 완벽한 자세를 만드는 건 오히려 방해가 된다. 편안하고 긴 호흡으로 숨을 쉬고 있다면, 적절하게 이완하고, 적당히 힘을 쓰고 있다면 잘하고 있는 것이다. 사는 것은 그 자체로 유의미한 경험이다. "촛불의 훌륭함은 흔적을 남기는 밀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빛에 있다."¹ 초가 어떤 모양이든, 촛농이 어떻게 녹아내리든 빛을 낸다면 그 촛불은 이미 훌륭하다.


잘 산다는 것은 내 느낌을 느끼고, 내 생각을 생각하고, 나의 생명력이 뻗어나가도록 두는 것이 아닐까. 실존은 힘을 내서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기보다, 나를 가로막는 규율과 불안과 검열을 내려놓을 때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다. 내 식대로 살아가려는 욕망을 꽁꽁 묶어 두거나 다른 색깔을 덧칠해 가리지 않고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내게 주어진 상황들(=드라마틱하게 말하자면 운명)을 기꺼이 내 방식으로 헤쳐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이번 삶이 남의 최선이 아닌 나의 최선일 때 비로소 내 모든 선택, 느낌, 생각, 행동, 말, 사랑, 미움들이 무한히 영원회귀 하고 반복되어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무 예민해도, 너무 느려도, 너무 피곤해도, 너무 불안해도, 너무 달라도 괜찮다. 내 몸이 남의 몸과 다른 대로, 내 경험이 남의 경험과 다른 대로. 내가 아닌 누군가가 숨 쉬듯 쉽게 해낼 일을 끔찍이 어려워하며, 남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세상에 내게 순순히 내어 주지 않을 것을 필요로 하며 살기를.



¹ "The virtue of the candle lies not in the wax that leaves its trace, but in its light." Antoine de Saint-Exupéry, The Wisdom of the S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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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ared Ric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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