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율 Oct 28. 2020

우울증이 나아도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기분 장애 만큼 나를 가로 막는 것, 완벽주의

나는 지금 기분 장애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호르몬 농도를 내 눈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세로토닌이 꽤 안정적인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 삶은 불만족스럽다. 왜 나는 내 삶이 싫을까?



심한 우울증을 겪은 게 벌써 8년 전이다. 그때는 방바닥에 누운 채 울거나 멍하게 시간을 보내며 죽기를 미루고 있는 일분일초가 고통을 더할 뿐이라 믿었다. 그러면서도 내 의지만을 탓하느라 치료도 받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위안과 도움도 받지 않았다. 어찌저찌 환경을 바꿀 만한 작은 의욕이 생겨서 빠져나왔다. 그 시기는 내게 트라우마로 남았고, 그 뒤로도 몇 년간이나 일상 영위를 겨우 허락하는 수준의 우울감이 늘 나를 붙잡고 괴롭혔다. 이 처지고 부정적인 기분만 없애면 인생이 좋아질 것 같았다. 인생을 낫게 하고 싶다는 의욕이 싹틀 때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정신과에 찾아갔다. 용기를 내서 어려움을 낱낱이 털어놓고 약도 타왔다. 인지행동치료, 변증법적행동치료 기술들을 공부하고, 삶에 적용했다. 요가와 명상을 연습했다. 기분 변화를 기록했다.  


나는 이제 기분 장애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슬픈 일이 있으면 비관적이어졌다가 곧 회복하곤 한다. "하루의 대부분 우울한 기분이 거의 매일 지속"되지 않고, 불면증이나 과수면도 없고,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고 싶은 충동도 들지 않고, "흥미나 즐거움을 느끼기 어렵"지도 않다.


그런데도 여전히 삶은 불만족스럽다. 삼십대 초반, 한창 뻗어나갈 시기인데 딱히 앞날이 기대되지 않는다. 나는 몇 달 동안이나 우울하지도, 아프지도 않으면서 이유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었다. 단지 뭔가를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울해서 그런 거랑은 달랐다. 에너지도 의욕도 있었다. 돈이 떨어지면 나가서 밥값을 해오는 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더이상 시도해 보고 싶은 게 없었다. 널널한 시간 동안 방에 앉아 내면을 들여다보고, 우울증이 아닌 다른 신경정신과적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의심해 보고, 내 인지 오류와 트라우마를 찾아내기 위해서 일기를 잔뜩 써 제끼고, 온갖 생산성 앱을 다운 받으며 시간을 보내봤다. 왜 나는 내 삶이 싫을까? 근본적인 이유는 뭘까?


내 결론은 이렇다. 우울감에 쉽게 빠지는 체질,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ADHD 성향,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예민성과 낮은 에너지 같은 취약점을 갖고는 있지만, 또 개개인을 절망시키고 고립시키고 물화하는 사회구조와 부조리가 공고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나의 생동력을 근본적으로 가로 막고 있는 건 바로 완벽주의다. 그리고 완벽주의는 나뿐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내 조건에 완벽히 맞는 직업이 세상에 있을 텐데, 내가 그걸 찾아내지 못하니 하고 싶은 일이 없다. 완벽한 친구와 완벽한 연인이 세상에 있을 텐데,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내게 완벽한 애정을 주지 않으니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외롭다.



당연한 소리로 시작하자면,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 슬픈 친구 위로 레퍼토리(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딨니! 너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를 읊으려는 게 아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세상에는 정말 완벽한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완벽한 집, 완벽한 직업, 완벽한 친구, 완벽한 연인, 그 무엇도 없다.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것이라도 따지고 보면 흠이 있고, 약간만 시간이 지나면 변질 되어 버린다. 그런데 나는 완벽주의자라서 세상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완벽해져야 하는 이유도 날 둘러싼 모든 것이 완벽하길 원해서다. 그런 걸 손에 넣으려면 완벽한 사람이어야 해서.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낙관을 품고 사는 게 아니라, 완벽에 닿지 않으면 무의미 하다는 강박과 욕구불만에 쫓겨 산다.


완벽한 집이 세상에 있을 텐데, 내가 사는 집은 그렇지 않으니까 이 집의 싫은 점만 보인다. 내 조건(돈은 좀 덜 줘도 되지만 일이 의미있어야 하고, 늘 배울 수 있고, 평등한 문화가 있고, 어쩌고저쩌고...)에 완벽히 맞는 직업이 세상에 있을 텐데, 내가 그걸 찾아내지 못하니 하고 싶은 일이 없다. 완벽한 친구와 완벽한 연인이 세상에 있을 텐데,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내게 완벽한 애정을 주지 않으니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외롭다. 완벽한 것이 세상에 존재하리라는 믿음은 어디서 나왔을까? 단 한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데. 가지런히 편집된 누군가의 SNS나 성공수기를 곧이곧대로 믿어 버린 건 아닐까.


내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이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나, 어떤 결함이 있나 따져보는 일은 일상이다. 결함을 고치기 위해서 비판해 본다, 는 명목이 있었는데 실상은 그리 생산적이지 않다. 완벽을 향해 가고 싶다는 이상을 갖는 것은 좋다. 그런데 그 이상을 잠시라도 놓치면 내가 구제불능의 루저가 될까 봐 두려워서 쉼없이 강박적으로 엄격한 잣대를 세우고 있는 건 피곤하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흠집이 하나라도 나면 생산성이 뚝 멈춰 버리는데, 그 멈춤은 휴식이 아니라 절망으로 채워진다.


이전보다 나아진 것이 있어도 감사하지 못한다. 세상 모든 것은 원래, 당연히 완벽해야 하니 축하하고 기뻐할 일이 없다. 그 이전의 상태는 전혀 완전 노답이었고, 지금은 상대적으로 약간 덜 노답일 뿐이라서 내 성취를 자랑스러워 할 마음도 안 든다. 감사하고 만족하는 일에도 인지능력이 든다. 비판하고 불평하는 데에 인지능력을 전부 쏟아부었으니 만족할 여력이 없다.


마침내 완벽에 닿으면 그때 숨을 돌리고 완벽한 행복을 누리려고 언제나 채찍질 중이다. 문제는, 완벽한 순간은 결코 없다는 점이다. (있다해도 정말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짧게 스쳐지나간 완벽을 붙들고 늘어지면 또 한동안 생산성이며 삶의 질이 뚝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완벽주의자는 영영 자랑스러워 할 수 없고, 만족할 수 없고, 쉴 수 없고, 행복할 수 없다.



흠집이 하나라도 나면 생산성이 뚝 멈춰 버리는데, 그 멈춤은 휴식이 아니라 절망으로 채워진다.

 


완벽주의가 인지 오류라는 걸 머리로 알기는 어렵지 않다. 이런 얘기- 이미 수백 번은 들어 봤다. 마음 깊이 느끼기 위해서는 더 철저한 설득이 필요하다. 나는 완벽주의라고 불리는 이 인지 오류와 두려움을 더 낱낱이 풀어헤치고 고쳐 볼 셈이다. 인생 이대로는 안 된다. 완벽주의에 관해, 또 내가 완벽주의의 수렁에 빠져있는 원인에 관해, 그리고 어떻게 하면 완벽 집착을 버리고 오늘을 더 즐겁고 기꺼이 살아갈 수 있는가에 관해 열렬히 써 보렵니다.


내가 얻은 깨달음이 완전하지 않지만 (죽을 때까지 깨닫기만 해도 완전해질 수 없다!) 매일같이 잠자고 밥 먹는 동안에도 완벽주의라는 주제에 몰두해서 조사하고, 생각하고, 다시 고민한 뒤 얻은 지혜(?)다. 모두가 나처럼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할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한단 걸 안다. 특히나 완벽주의가 등짝을 채찍질 하고 있다면 더욱. 그러니 온 세상의 (한국어를 읽을 줄 아는) 섬세하고, 두려움 많은 완벽주의자들과 내 깨달음을 나누고 싶다. 뜬금없지만, 나는 사랑을 사랑한다. 완벽주의자들은 사랑도 못한다. 그러니 내가 누군가의 완벽 집착을 조금 덜어내어서 지구가 아주아주 약간이라도 더 사랑하기 쉬운 곳이 된다면 좋겠다.




응원, 감상, 비판, 주제 제안 등등 어떠한 의견이든지 생각나셨다면 말을 걸어 주세요. 댓글, 트위터 멘션 및 메시지, 인스타그램 DM, 이메일로 대화를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생각이 많아서 인생 살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렇다면 글이라도 많이 쓰려고요. 누구나 생각에 시간을 쏟아 붓지는 않기 때문에, 저의 결과물들이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깨달음이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을 흥미롭게 보셨다면 구독하고 종종 읽어 주세요.

Photo by Anthony Tran on Unsplas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