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텐트와 배낭을 짊어지고 '남도 섬 투어' 중이었다. 9월의 햇볕을 맞으며 연일 걸으면서도 5일 동안 씻지 못한 상태였고, 그래서 다음 섬에 들어가기 전 뭍에 닿았을 때 여객선 터미널에서 가장 가까운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갔다. 오로지 몸을 씻기 위한 목적이었다.
게스트하우스에 입실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역시나 샤워였다. 평일의 게스트하우스는 한산해서 좋았다. 센스 있는 주인 언니는 나의 배낭 크기를 보고는 이것저것 묻지도 않고 세탁기를 쓸 수 있게 해주었다.
그날의 편안함이 좋았다.
주인 언니의 친절함도 좋았다.
바람의 방향이 가을에서 겨울로 깊어지며 섬 투어를 계속 이어가는 일이 어려워졌다. 섬으로 들어가는 배들은 풍랑으로 인해 연일 취소되었다. 섬 투어는 다음해 봄에 다시 이어가기로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직장을 그만두고 등산과 여행만 다니던 시기였다. 그래서 서울로 돌아왔어도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나는 그날의 게스트하우스를 다시 찾았고,
다시 찾은 그곳에서
그 남자를 만났다.
어울리지 않게 정장을 빼입고 게스트하우스의 문을 연 남자. 저런 차림으로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다 있네? 싶었다. 알고 보니 그는 주인 언니의 오랜 지인이었고, 누군가의 부음을 듣고 근처의 장례식장을 찾았다가 언니를 만나러 게스트하우스에 들른 것이라고 했다.
게스트하우스에는 나만 빼고 다 구면인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주인 언니의 매력이 도대체 무엇인지, 우연히라도 이곳에 다녀가면 절반 이상은 다시 찾아온다고 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오빠는 몇 살이에요?"
나와 이미 통성명을 하고 말을 놓기로 한 동생뻘 여자애가 그 남자에게 물었다.
"나? 서른세..."
"야! 너 나랑 동갑이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너무나 반가워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나의 초스피드 사교성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웃음보가 터졌다.
그렇게
그를 만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는 게스트하우스에 갈 때마다 항상 그곳에 있었다. 미리 연락하고 가지 않아도 당연한 듯 그곳에 있었다. 그를 만날때마다 나는 반가웠고 동갑내기 친구여서 누구보다 편했다.
그렇게 일 년쯤 지났을 때
통영의 밤바다를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던 날
내가 얘기했다.
"나랑 사귈래?"
그는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뭐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싫음 말고."
그날 나에게 정색한 것이 미안했던 것인지 그는 이후로 자주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더니, 곧 인도여행을 떠날 예정이라 서울에 있는 친구들을 보러 온다고 했다.
"인도에 얼마나 오래 있을 예정이기에 서울에 있는 친구들까지 다 보고 간대?"
"뭐... 한 달이나... 아니면 두 달 정도?"
"푸하하~ 그 정도면 그냥 한국에 있어도 어차피 서울에 있는 친구들은 만날 일이 없는거 아냐?"
"이 핑계로 서울 가는 거지. 안 그러면 정말 일 년에 한 번도 갈 일이 없으니까."
"나도 니 친구 맞지?
내 얼굴도 보고 갈 거 맞지?"
"당연하지!"
서울에 친구들이 많다던 그는 제일 먼저 나를 만나러 와 주었고, 서울에 친구들이 많다던 그는 이상하게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인연에게만 연락했다. 게스트하우스를 통해 만난 친구들은 그의 지인이 모두 나의 지인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3일 내내 같이 움직였다.
3일째 되던 날,
우리는 인천에서 아시안게임 야구 결승전을 관람하고
'오늘부터 1일'을 외친 그날 저녁,
그는 나에게 비싼 브랜드의 귀걸이를 사 주었다.
3일째 되는 날에는
커플링을 선물해 주었고
열흘째 되던 날,
그는 예정대로 인도로 떠났다.
당시의 나는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작가가 되기 위해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남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기에
서로에게 흠뻑 빠져있던 우리는 여행내내 일기나 여행기를 기록하지 않았다. 대신 똑같은 수첩을 사서 그는 나에게 나는 그에게,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거의 매일 편지를 썼다.
매 순간 함께 있었지만
매일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한 달이 넘도록 인도 여기저기를 다녔지만 다녀와서 기억에 남은 것은 인도의 풍경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나를 바라보던 그의 표정,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나의 얼굴, 노을빛을 받아 빛나던 그의 이마, 밤이 깊어질 무렵의 그의 실루엣...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던 그의 모습은 판화로 새긴 듯 아직도 선명한데,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던 인도의 풍경은 어느덧 빛바랜 기억처럼 가물가물 하다.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마지막 사람임을
예견했던 것 같다.
인도에서부터 가족들에게 결혼할 사람이 생겼음을 알렸고, 인도에서 돌아오자마자 가족들에게 서로를 소개했다.
어린시절이 무척이나 불행했던 나는, 내가 겪어야만 했던 불행과 아픔을 결혼 하기 전 그에게 다 털어놓았다. 다른것도 아닌 '결혼'을 할 상대라면 나에 대해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의 얘기를 듣고 가만히 나를 안아주었다. 어린시절이 불행했던 만큼 앞으로 자기가 나를 더 아껴주겠다고 했다. 어린시절의 상처를 모두 씻겨낼순 없어도, 그때처럼 상처받아 눈물 흘리는 일은 더이상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되실 분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부모님은 무얼 하시는 분인지, 나의 학벌이 어떻게 되는지도 묻지 않으셨고, 상견례에 부모님이 아닌 작은아버지 내외가 나오시는 이유도 묻지 않으셨다.
다만, 며느리 될 내가 아닌, 자신의 아들인 그에게 계속해서 나에 대해 물으셨다고 하는데, 어물쩡 어물쩡 돌려 돌려 좋게 좋게 표현하던 그가 더이상 돌려 말할 방법이 없어서 나의 어린시절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래... 그랬을 거 같더라...
그러니 니가 더 아껴주거라.
너 하나 믿고 서울의 형제들을 다 놔두고
부산까지 시집오는 아이다.
그러니 니가 더 아껴주거라."
나는 나에게 기억과 사고가 생성되기 시작했던 최초의 순간부터, 내 자신을 '지지리 복도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이런 집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복'이나 '운'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년기와 청년기에는 참으로 운이 없었지만, 서른 중반에 접어든 인생 '중기'부터는 조금씩 운이 트이기 시작했고,
내 인생의 운을 틔어준
첫번째 행운이자
가장 큰 행운은
이런 남편과
이런 시엄마와
가족을 이룬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