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바위와 단풍이 있고, 고기와 술이 있는 밤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하지만 공룡능선은 정말이지 너무 너무 힘들었다.

공룡능선은 그곳이 품은 경치도 압권이었지만 힘들기로도 지리산과 비할데가 못 되었다.



지리산의 주능을 종주할 때는 힘들기는 해도 지쳐죽겠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설악산의 공룡능선은 정말이지 지쳐 죽을것 같았다. 이제 끝났나 싶으면 또 오르막 암봉이 나타나고, 이젠 없겠지 싶으면 또다시 로프가 달린 암봉이 나타났다.



곳곳에 나타나는 탁 트인 시야로 깊은 탄성을 질러내며 마음의 안정과 다리의 휴식을 취해주지 않았다면, 오르막을 딛고 올라 설 때마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땀을 식혀주고 절정 직전의 아기자기한 단풍이 눈을 간지럽히지 않았다면, 과연 그 길을 울지 않고 지나올 수 있었을까?



나의 삶에도 이정도의 안정과

이정도의 꿀같은 보상만 주어졌다면

그토록 괴롭게 삶을 찢어버리진 않았을텐데...



지탱해 줄 부모가 없는 삶은 언제나 불안정했고 내 스스로가 나의 부모역할까지 다 해내야 했기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여유가 없었다. 내 인생에는 시원한 바람 한점 없이 언제나 뜨거운 사막이거나 혹한기 칼바람 뿐이었고, 그래서 꿀이 있다한들 편하게 앉아서 그 맛을 음미할 새가 없었다.



끝났나 싶으면 또 고난이 나타나고 이젠 없겠지 싶으면 또다시 더 큰 위기가 나타나던 것이 꼭 이 능선과 같았다. 한가지 차이점이라면 이 능선은 언제쯤 끝이 날 것인지 예상이 되었지만 나의 인생은 언제쯤 고난이 끝날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세상사 무슨 일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끝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어둠에 갇혀버리면 사람은 결국 미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럴 때의 끝이란 죽음 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우리를 서서히 벼랑으로 밀고간다.



나는 죽고 싶었을까?

아니면 살고 싶었을까?



때로는 모든 것을 놓고 싶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잡고 싶었다.

나의 삶을 붙잡고 싶었고 누군가 붙잡아주길 원했다.

그 마음은 언제나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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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위벽의 로프를 꽉 붙잡았다. 손아귀에 힘을 주고 허벅지를 밀어 올려 팔을 뻗어 더 높은 곳의 줄을 다시 잡았다.



다시 잡았다.



이쯤에서 손을 놓아 배낭보다 무거운 삶을 저 아래 협곡으로 집어던질 게 아니라면, 다시 잡아야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다시 잡아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힘들 것이다. 삶은 너무도 자주 우리를 속이고 뒷통수를 후려 갈긴다. '신선대' 까지가 설악의 공룡능선이라고 했지만, 신선대를 지나고도 여전히 암릉에 로프가 나타나듯 그렇게 기대를 배신하고 다시금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만드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또다시 나타난 암릉 앞에서 나는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팔다리가 후들거렸고 이상하게 배낭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 발을 옮길때마다 누군가 내 배낭에 돌을 하나씩 집어 넣는 기분이었다.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

시원한 가을바람에 마음을 식혔다.



인생에서도 이렇게 쉬어가는 법을 알았다면 참 좋았을텐데 나는 그것을 몰랐다.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도와 줄 부모가 없으니 남들보다 더욱 노력해야해, 부모 도움없이 결혼하려면 몇 살까지 얼마는 모아야지, 엄살 피우지 마,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사람 없어. 그런 말들이 나의 등을 떠밀었고 나는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잡혀도 달리기를 멈출 수 없었다.



마지막 바위를 가까스로 지난 뒤 그야말로 체력이 방전되어 버렸다. 무릎과 다리가 지랄같이 후들거렸다. 그래도 탁 트인 곳에서 뒤를 돌아보면 오늘 하루 내가 지나온 봉우리들이 한눈에 펼쳐보였다. 오늘 하루 내가 이뤄낸 성과물이 공룡능선이라는 이름으로 가을볕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



웃음이 났다.

기분이 좋았다.

비록 다리는 지랄같이 떨려도

나는 오늘 무언가를 해낸 것이다!



내가 저 바위들을 다 넘어왔다는 거지?

대단하다, 대단해!

대단하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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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곱게 물든 단풍이 연이어 펼쳐지고 산에서 보기 드문 평평한 땅이 나타났다. 평지는 꽤 길게 이어지더니 곧이어 눈 앞에 희운각 대피소가 나타났다.



대피소에 도착하기까지 주변의 단풍이 끝내줬다. 절정까지는 아직 일주일이 남았다고 했는데 어떻게 지금의 단풍보다 더욱 절정인 풍경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단풍이 기가 막혔다.



희운각에 도착해 배낭을 내려놓기도 전에, 아침에 수렴동 대피소에서 인사했던 부부를 다시 만났다.



"안녕. 빨리 왔네? 우리도 이제 막 도착했는데. 그 큰 배낭을 메고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



굼벵이처럼 기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모님의 칭찬에 대꾸할 말이 없어서 그냥 바보처럼 웃었다.



"우리랑 저녁 같이 먹자. 배낭만 넣어놓고 바로 나와. 내가 고기랑 상추쌈도 챙겨왔어."



고기? 고기라고? 고기?!!!

거기에 상추? 신선한 야채라고?!!!



이모님의 말씀에 나의 입이 아닌 뇌가 침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원래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백두대간 3일만에 이렇게나 고기에 환장하는 사람으로 변할 줄이야!



나는 얼른 대피소에 들어가서 자리를 배정받고 배낭을 냅따 던져둔 채 부리나케 뛰쳐나왔다.



산이 아름다운 이유는 산에 천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산에만 오면 다들 천사로 변하는 것일까? 오늘 만난 천사는 훈제오리와 상추쌈을 나눠주며 손수 라면까지 끓여 내 앞에 놓아주고, 천천히 먹으라며 소주까지 따라주었다. 흑... 소주라니... 너무 좋아... 좋아서 미치겠어... 흑흑 ㅠㅠ



2018년 3월 이후로 국립공원 내의 주류반입과 음주행위가 모두 금지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산에서의 음주는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었다. 고된 산행 후 저녁은 무조건 고기여야 했고 고기에 술이 빠질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산행을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점심을 먹으면서도 한잔 하고 등산을 이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배낭이 무거워 먹을것마저 비워낸 나는 술도 고기도 감히 꿈 꿀 수 없었고, 그러니 누군가 나눠주는 소주 한잔에 눈물이 날 만큼 감사하고 행복했다.



신기하게도 이모님은 나와 고향이 같고 현재 서울에 살고 있는 것도 같았다. 얼마전에 아저씨가 정년퇴직을 하셔서 그 후로 두분이 손을 잡고 등산이며 여행을 다니고 있다고 하셨다. (처음보는 부부인데 누구는 이모님이고 누구는 아저씨인가! 죄송해요 ㅠㅠ)



함께 등산을 다닐 정도로 다정한 부부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내 앞에서 살짝이 애정행각을 하시는데 그 모습도 보기 좋았다. 두분을 부러워하는 내게, 퇴직 전에는 그저 먹고살기 바빠서 이런 여유도 없었다며, 오히려 젊은날에 백두대간을 하는 아가씨가 더 부럽다고 하셨다. 대화도 잘 통하고 기분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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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끝내고 싶지 않았는데 소주가 똑 떨어졌다.


"거봐. 내가 한병 더 챙기자고 했지?"


아저씨가 소주를 넉넉하게 챙겼는데 그 많은 걸 누가 다 먹냐며 이모님이 잔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산에서는 뭐든 넉넉해야 한다니까."



술이 부족해 아쉬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피소에 도착할 때만 해도 너무 너무 힘들어서 발을 끌다시피 했고, 밥 먹을 힘도 없어서 양갱 하나 먹고 그냥 잘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에너지가 넘치는 것인지!



고기를 먹을 때도 정말이지 열정적으로 먹었고 라면을 먹을 때도 쉬지 않고 먹었으며, 밤이 깊고 술이 떨어졌는데도 잠이 오기는 커녕 밤새 이곳에 앉아있어도 지치지 않을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날에도 산행을 이어가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모님과 아저씨는 내일 천불동계곡을 끼고 신흥사로 하산할거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아저씨는 천불동계곡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느냐, 특히 단풍철이면 더욱 기가 막힌다, 설악산까지 와서 천불동계곡을 들르지 않고 지나치는 것은 말이 안된다, 내일 우리와 같이 꼭 천불동계곡을 보고 이후에 대간을 이어가라며 신신당부를 하셨다.



통제구간을 모두 건너뛰어 일정이 널럴했던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가면 언제 또 다시 설악산에 오게될지 알 수 없는데 아름다운 곳이라면 당연히 가봐야 할 터였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24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설악산 수렴동 대피소(강원도 인제군) - 오세암 - 마등령 - 공룡능선 - 설악산 희운각 대피소 (강원 인제와 속초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0월 5일 / 수요일

SE-2966c6da-e9fd-4b6f-a353-896cf9f7f1a8.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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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수요일은 쉬고

목요일에 다시 찾아뵐게요~ ^^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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