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희운각대피소에서 백두대간 경로인 대청봉으로 직진하는 코스는 국립공원의 통제구간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등산자들은 중청대피소를 거쳐서 대청봉으로 가야했다.
오늘의 백두대간 경로는 매우 매우 짧고도 단순했다. 희운각대피소에서 소청봉과 중청봉을 거쳐 중청대비소까지만 가면 끝이었는데 그 거리가 2km 밖에 되지 않았다. 2km 라고 하면 도심의 평지길을 걸을 때 천천히 걸어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오전에는 어제 만난 부부와 천불동계곡의 오련폭포까지 갔다가 다시 올라왔고, 이제 오후에는 2km 거리의 중청대피소 까지만 가면 오늘의 일정은 끝이었다.
와!
매일 이정도로만 걷는다면
아무리 백두대간이라도
힘들 일이 없겠다!
희운각대피소에서 소청봉까지 거리는 1.3km 밖에 안되지만 그 오르막은 공룡능선 저리가라다. 하지만 나는 오전 내내 배낭없이 가벼운 어깨로 나들이를 다녀온 터라 이후의 산행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대피소 직원에게 얻어마신 믹스커피로 당 충전도 완료된 상태! 마등령에서 산악회의 점심도시락을 얻어먹을 때도, 이모님부부와 함께 식사를 할 때도 식후엔 항상 믹스커피가 나왔다. 그 한잔이 있어야 비로소 식사가 완성되는 것이다.
배낭이 너무 무거웠던 나는 커피도 뭣도 아무것도 챙긴것이 없었는데 식후의 믹스커피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등산을 하며 알게되었다.
희운각대피소에서 소청봉까지는 깎아지른 바위의 오르막이었지만 막힌 곳 하나없이 모든 시야가 뻥 뚫려있었다. 발끝만 바라보며 된비알을 오르다가도 뒤돌아보면 와아- 한눈에 펼쳐보이는 설악의 가을풍경에 절로 감탄이 터져나왔다.
오늘은 딱 2km만 가면 되었기에 서두를 일이 없었다. 나는 조금 오르다가 뒤돌아보고 조금 오르다가 바위에 걸터앉고 조금 오르다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를 늘어놓았다.
지금도 그날의 여유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내가 바랐던 산에서의 생활이 딱 그날같은 여유로움이었다. 배낭이 무겁고 엄청난 오르막을 오르게 되더라도
돌아보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산행
바쁠것도 급할것도 없어서 소풍나온 아이들처럼
꽃도 보고 지렁이도 보고 개미도 들여다보는 그런 산행
가만히 앉아있으면 따뜻한 햇볕에 기운이 채워지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가을바람이 땀을 식혀주는
그런 산행.
백두대간이 딱 오늘만 같다면
평생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는 것이 딱 오늘만 같다면
힘겨워도 웃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소청봉이었다. 엄청난 오르막은 다 끝난것이다. 이 삼거리에서 반대편 내리막을 내려가면 소청대피소가 나오고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면 중청대피소가 나온다.
소청봉과 중청대피소는 해발이 20m 밖에 차이 나지 않아서 정말이지 완만한 산책로를 걷는 기분이다. 이렇게나 높은 산 정상에 이렇게나 완만한 산책로가 있는 것이다.
친구랑 통화를 하며 30분 넘게 놀았는데도 오후 4시 반에 대피소에 도착했다. 이렇게나 일찍 일정을 마무리하려니 뭔가 어리둥절 했다. 이렇게나 힘들지 않은데 일정을 마무리하려니 뭔가 허전했다. 그동안의 고생이 몸에 베어버린 것인지, 몸이 편하자 좋기는 커녕 오히려 불안하고 이상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중청대피소에 자리를 배정받고 배낭을 내려놓은 뒤 대청봉을 살짝 다녀오기로 했다. 중청대피소에서 고작 20분 거리에 설악산의 최고봉인 '대청봉' 이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내일 아침이면 다시 대청봉을 통과해서 백두대간을 이어가야 했기에 카메라와 핸드폰을 모두 내려놓고 맨 몸으로 동네 마실 나서듯 천천히 대청봉을 올랐다.
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생각을 잘 못 해도 한참 잘 못 했다. 대청봉에 도착하자 가을낙조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붉은 빛의 세상에서 눈부시도록 선명한 태양이 능선 너머로 내려가는 모습이라니...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살면서 처음 접하는 산 정상에서의 낙조였다. 이런 장관을 카메라에 담지 않으면 평생 후회가 될 것 같았다. 나는 등을 돌려 부리나케 대청봉을 뛰어 내려왔다. 그 돌산을 육상선수 훈련하듯 뛰어내려와서, 카메라를 찾아 들고 다시 육상선수 훈련하듯 뛰어올라갔다.
다행히도 태양은 아직 낮은 하늘에 걸려있었다. 태양이 산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천천히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아까 올라왔을 때는 대청봉에 사람이 너무 많았는데 카메라를 가지러 갔다오니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대피소로 들어가버리고 대청봉에는 나 포함 3명이 전부였다. 이 아름다운 풍경에 사람이 거의 없는 것도 너무나 좋았다.
내일 이 길을 다시 지나가게 되더라도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은 오늘이었다.
오늘의 풍경과 감상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날, 그 저녁의 설악산 대청봉에서
나는 귀중한 삶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삶에 수많은 기회가 오더라도
'오늘' 이라는 기회는
두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은 오늘이다.
삶의 기회는 몇번이고 다시 올 수 있겠지만
오늘 놓친 기회는 다시 잡을 수 없다.
오늘과 같은 기회는 더이상 주어지지 않는다.
대청봉에서 마지막 숨을 고르는 태양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지금까지 놓쳐버린 수많은 기회처럼
오늘의 기회도 날려버릴 것인가...
지금까지 놓쳐버린 수많은 기회처럼
앞으로의 기회도 놓쳐버릴 것인가...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기회를 잡는 방법은 더 더욱
알 수 없었다.
지금껏 내 삶에는 '기회' 라는 것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 같았다.
'기회' 라는 것이 주어진 적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것을 잡는 방법을 알 리 만무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24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설악산 희운각 대피소 (강원 인제와 속초의 경계) - 소청봉 - 중청봉 - 중청 대피소 - 설악산 대청봉 (강원 인제, 속초, 양양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0월 6일 / 목요일
월화 목금 주4일 연재합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