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세상 모든것을 감싸주는 설악산 대청봉 일출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완벽한 인생은 없듯 완벽한 하루도 없었다.

어제의 가볍고 여유로운 산행으로 모든 종주의 날이 딱 이날만 같기를, 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대청봉에서 붉은 일몰을 바라보던 때 까지였다.



중청대피소로 돌아오니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다른 조용하던 대피소와 달리 질서도 없고 사람은 북적북적했다. 멀리서보면 산 속의 멋진 통나무집 같은 중청대피소는 안으로 들어가면 통으로 뻥 뚫린 3층짜리 집이었다.



칸막이도 없이 천장과 바닥만 있는 3층짜리 구조물에 사람들이 다닥다닥 누워있었고 여럿이 함께 온 산악회들은 대피소 안에서도 절대 조용히 하지 않았다.



산에서는 일찍 잠들어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도 있고, 늦게 잠들어 늦게 일어나는 사람들도 있어서 다른 대피소에서는 모든 산행자들이 스스로 정숙을 지켜줬었다.



배낭에서 짐을 꺼낼 때도 조용히 조심스럽게 필요한 물건만 빼서 바로 밖으로 나갔었고, 일행과 대화는 소곤소곤이었으며 대화가 길어진다 싶으면 밖으로 나가거나 취사장으로 이동했었다. 대피소 밖 취사장은 왁자지껄 시끄러워도 대피소 안 잠을 자는 공간은 언제나 조용조용 했다.



그런데 중청대피소에는 그런 질서가 없었다. 모두들 수학여행 온 중학생들처럼 시끄럽게 떠들고 대피소 안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나는 점점 짜증이 났다.



대피소 직원이 밤 10시에 소등을 하자 시끄럽게 떠들던 소리는 잦아졌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다. 술을 먹고 일찍 뻗어버린 아저씨들은 천장이 날아갈듯 코를 골았고 뻥 뚫린 3층짜리 통나무집에서 그런 소리는 울림이 되어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널럴한 산행으로 체력소비가 없었던 나는 그 번잡한 대피소에서 새벽 2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해 이리뒤척 저리뒤척 해야했다. 겨우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소리에 얕은 잠이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이 대피소 안으로 또다시 들어오는 것이 싫어서 배낭을 모두 챙겨들고 취사장으로 이동했다. 너무 이른 새벽이라 불도 켜지지 않는 취사장에서 사람들은 헤드랜턴을 밝혀 각자의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랜턴 빛에 의지해 아침을 먹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땐 그저 걷는게 최고다.

나는 대충대충 빨리빨리 모든 일을 해치우고 오늘의 대간길에 올랐다.



다시 대청봉으로 향하는 길.

하늘이 맑고 또렷했다.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하늘은 군청색 색종이를 끼워넣은 듯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오늘 왠지

일출을 볼 수 있을거 같아!



대청봉을 거쳐 설악산 서북능선을 타고 한계령까지 가는 것이 오늘의 코스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피소만 벗어나도 이렇게나 좋구나! 새벽 5시반의 공기가 차가운듯 시원한듯 알싸하게 뺨을 감쌌다. 등산로에서는 말이 없는 사람들. 그 조용한 새벽에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는 것이 좋았다.



5시 45분. 나보다 먼저 올라온 사람들이 대청봉 정상석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래쪽부터 붉게 올라오는 동쪽 하늘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서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일출을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고 하늘이 점점 밝아졌다. 해 뜨기 직전인데도 이상하게 춥지 않았다. 몸이 떨리지도 않고 편안하면서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드디어!

동쪽의 바다 끝 수평선에서 조금씩 올라오는

손톱만 한 노란 발광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렀다.







아!

이것이 이출이구나...

일출을 목도하는 기분이 이런 것이었구나!



이래서 사람들이

일출을 보겠다고 잠도 자지 않고

새벽산행을 감행하는 거구나...



지리산 천왕봉은 허락하지 않았던 일출을

단번에 내게 보여준 설악산에 감사했다.



대청봉에 오른 날, 그 첫번째 날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조를 경험하고

이튿날에는 생애 첫 일출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무엇으로도 감히 설명할 수 없는 일출의 태양빛이 나의 이마와 정신, 그리고 빛을 직접적으로 받지 못하는 등과 지나왔던 어두운 삶까지, 모두 밝은 빛으로 감싸주는 것 같았다.



행복감이 온 몸으로 번졌다.

나의 백두대간 종주는

기쁨과 희열로 가득하리라!

알 수 없는 기대감과 자신감이

다른 모든 감정을 적시고 있었다.



새벽엔 바람도 없었고 오늘은 산에서 맞이한 가장 따뜻한 아침이었지만, 한계령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낙엽들은 서리를 맞아 잔뜩 얼어있었다.







고산지대의 새벽은 이런 것이구나. 오전의 가을햇살은 이토록 따뜻하고 강렬한데 그 아래 낙엽들은 아직도 얼어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한계령으로 향하는 길에 가을단풍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눈으로도 보기 아까운 단풍을 즈려 밟으며 지나가다니! 세상에 이런 사치가 또 있을까!



한계령으로 하산하는 길은 설악산의 단풍 중에서도 가장 우아한 단풍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그것은 날짜의 흐름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제 설악의 단풍 절정이 닷세 정도 남았으니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단풍도 깊어지는 것이다.



설악산 서북능선에는 조망이 시원한 곳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단풍이 아름다웠고 드문드문 조망지가 나타나는 것이 고마웠다. 어딜가나 보이는 설악의 기암괴석은 조망이 없는 곳에서도 감탄을 자아내는 일등공신이었다.



오후 1시쯤 한계령 휴게소에 도착했다.

일단 한계령 휴게소에서 우동으로 점심을 해결하며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한계령에서 점봉산을 지나 단목령으로 이어지는 길도 모두 통제구간 이었다. 통제구간은 모두 건너뛰고 단목령부터 다시 대간을 이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전에, 땀에 절은 등산복부터 어떻게 좀 하고 싶었다. 산에서의 날씨는 춥다는 말만 듣고 내피에 기모가 들어간 긴팔 등산복을 입고 왔더니 낮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등산을 해야 했다.



10월이라고는 하지만 대낮의 햇볕은 여름처럼 강렬했고 그 땡볕 아래서 박배낭을 메고 오르막을 오를때는 정말이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여벌로 가지고 왔던 등산복도 이미 갈아입어버려 새로 입을 수 있는 옷이 없었다.



처음부터 4박5일간의 식량만 챙겨왔기에 이쯤에서 식량도 수급해야 했다. 호텔과 민박이 있는 오색으로 내려가 숙소에서 1박을 하며 개운하게 샤워도 하고 등산복도 빨아서 입을까, 고민하던 나는 그냥 서울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 등산복을 시원한 것으로 바꿔입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좋겠다. 집으로 돌아가서 계획도 새로 짜고 모든 것을 재정비하여 다시 대간을 이어가자! 처음이라 너무 무모했고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백두대간의 시작점만 찾아가면 마치 무빙워크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알아서 척척척 해결될 줄 알았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4박5일간의 종주로 나에게 부족한게 무엇인지 어느정도는 알 거 같았다.



나는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우울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24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설악산 중청 대피소 (강원 인제와 양양의 경계) - 설악산 대청봉 - 끝청 - 서북능선 - 서북릉 삼거리 - 한계령 (강원 인제와 양양의 경계) - 버스타고 서울로 귀가

진행 날짜 : 2011년 10월 7일 / 금요일

SE-31963601-c03c-4638-8cac-ee22e867a885.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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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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