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주말 이틀동안 집에서 쉬고
월요일, 다시 백두대간 종주길에 올랐다.
주말 동안 빨래 돌리고 텐트 말리고 식량을 준비하여 배낭을 재정비하고, 디카에 찍어온 사진을 노트북으로 옮겨 정리하고, 백두대간에 대해서 검색 좀 했더니 딱히 쉴 시간도 없었다. 부지런히 준비를 해야 일요일밤에 일찍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지난번 서울행 버스를 탔던 설악산 오색에서부터 다시 대간을 시작하였다. 한계령에서 점봉산을 지나 단목령으로 이어지는 통제구간은 모두 패스하고, 통제구간이 끝나는 단목령에서부터 백두대간을 이어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자면 오색초등학교에서 계곡을 건너 산능선으로 올라가야 했다. 지도를 보니 시외버스를 내린 곳에서 오색초등학교까지는 약 2.5km 정도, 걸어서 가면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나는 시간을 아낄 생각으로 히치하이킹을 시도 했다.
히치하이킹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인데 나를 태워줄 마땅한 차를 고르기도 어렵고, 적당해 보이는 차가 와서 손을 들어도 그 차가 멈추지 않고 쌩 지나가버리면 자신감이 사라져서 다음 차가 와도 쉽사리 손을 들지 못한다.
오늘도 벌써 몇 대의 차를 놓쳐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멈춰준 차는 방향이 다른것 같다며 나의 부탁을 거절했다. 그들은 단풍구경을 나온 부부였는데 처음엔 나의 부탁을 거절했다가 둘이서 뭔가 대화를 주고받더니 여기 지리를 잘 몰라서 그런다며 나에게 방향을 물었다.
나는 지도를 펼쳐 설명하며 여기서 내가 가려고 하는 오색초등학교까지는 거리도 가깝고 길도 하나 뿐이라고 강조했다. 잠시 고민하던 부부는 태워줄테니 내리는 것은 알아서 내리라고 했다.
걸어서는 40분 정도 걸리는 2.5km가 차를 타면 그렇게나 금방일지 몰랐다.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내려달라고 했을 때는 이미 목적지에서 1km나 더 내려온 지점이었다. 내가 황급히 내리려고 하자 부부 중 여자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바나나 두 개를 떼어서 나눠주며 백두대간 잘 하라고 응원해주었다.
대간을 시작하기도 전에 먹을 것과 응원을 받다니!
오늘은 뭔가 일이 잘 풀릴것 같아!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색초등학교까지 걸었다.
알고보니 오색초등학교는 국도변 바로 옆에 있었다. 이렇게나 찾기 쉬운 것을 놓쳐버리다니, 나는 정녕 눈 뜬 장님인 모양이었다.
국도의 왼쪽에 오색초등학교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계곡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계곡을 건너 산능선을 올라가야 단목령이 나온다. 오색초등학교에서 계곡을 건넜더니 산 속으로 연결되는 계곡의 지류가 보였다.
나는 계곡의 지류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조금 걷다보니 별장처럼 예쁜 집이 나왔다. 아늑한 정원까지 갖춘 정말이지 별장같은 집이었다. 나는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길을 물어보려고 집 마당을 서성였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이 없다. 자세히 봤더니 현관문에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별장같이 예쁜집이 아니라 진짜 별장인 모양이었다.
별장 옆으로도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아! 이런곳에 별장이라니! 부러워라! 이런 곳에 이렇게 예쁜집 지어놓고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며 넋 놓고 싶어라!
별장을 끼고 흐르는 계곡을 건너 희미하게 보이는 길을 따라 걸었다. 단목령까지는 제대로 된 등산로도 없고 이정표도 없었으며 산악회의 리본도 하나 없었다. 그래서 툭하면 길을 잃었다.
좀 연결된다 싶던 등산로는 계곡의 지류나 바위나 커다란 나무에 가려 길이 끊기곤 했다. 처음엔 길이 끊길 때마다 지도를 보며 우왕좌왕 헤맸는데, 그것도 몇 번 반복하자 내 안에 잠재된 동물적 육감이 조금씩 깨어나는 것 같았다.
시작점이었던 오색초등학교에서 단목령까지는 정남 방향이었다. 그래서 나는 길이 끊길 때마다 나침반을 들고 빨간 바늘이 가리키는 곳으로만 걸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10분쯤 후면 등산로가 나타났다. 그렇게 나는 길을 잃고 찾기를 반복했다.
처음 한시간은 등산로가 완만했다. 자주 계곡을 끼고 걸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사람의 발이 닿지 않은 원시림같은 느낌을 주는 곳도 만났다. 이런 느낌의 산을 홀로 걷는다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길은 자주 끊어졌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아직은 한낮이고 해는 머리 위에 있다. 나에게는 지도와 나침반이 있고 길을 잃으면 정남방향으로만 걸으면 된다. 이런 것들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이쪽으로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것인지 산악회의 리본도 없고 등산로도 좁았다. 하지만 원시림 느낌의 자연이 펼쳐지니 길을 잃는데도 웃음이 났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나는 불안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 자연을 아름답게 묘사한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그 중 『이웃집 토토로』 와 『원령공주 모노노케 히메』 속 자연에 반해서 아! 저런곳에서 살고싶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오색에서 단목령으로 향하는 계곡이 애니메이션 『원령공주』 속 배경을 떠올리게 했다.
『원령공주』 에서 '까드드득' 하는 해골 돌아가는 소리를 내는 꼬마요정들이 모여 살던 이끼숲. 상상에서만 존재할 것 같던 미지의 숲이 눈 앞에 펼쳐졌다.
계곡의 모든 바위와 나무뿌리가 다 이끼로 덮여있었는데 한낮의 햇빛을 받아 형광빛에 가까운 초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천천히 등산화를 벗고 맨발로 이끼 위를 걸었다.
10월의 계곡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이끼옷을 입은 바위는 너무나도 포근하고 따뜻했다. 이끼 아래 무엇이 살고있을지 몰라 불안하면서도 그 느낌이 포근하고 귀여워서 발이 간지러웠다.
이끼 계곡은 그리 넓지 않았기에 금방 다시 등산화를 신어야 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을 빼앗기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 이런 곳에서 살아봤으면... 이 아름다운 곳을 두고 떠나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에 사진 찍는 습관이 없던 나는 진정 마음을 빼앗기는 곳을 발견하면 그것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을 깜빡하곤 했다. 다 지나오고 나서야
'아, 맞다! 사진으로 찍어둘 걸!'
하며 후회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곳인데 그 아름다움이 사진에 전혀 담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 자연이 무슨 요술을 부리는 것인지 실제로 보는 것과 카메라에 담긴 것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관심을 바라지 않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션 오코넬
사실 처음부터 카메라는 필요없었다.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면 그곳에 멈춰 서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정도로 내 안에 새겨넣을 충분한 시간만 있으면 되었다.
비싼 카메라를 들고 바쁘게 돌아다니기보다, 비싼 카메라를 장만하기 위해 투자한 노동의 시간을 아름다운 것 앞에서 천천히 쓰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백두대간에서 여유를 부리기 보다 빨리 걷기에 바빴고 다음 구간으로 넘어가기에 바빴다. 나는 분명 할 일 없는 백수였는데 무엇이 그렇게 나의 등을 떠밀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은 관성이었는지도.
바쁘게 살고 촌각을 다투며 일을 처리하던 습관이 아직도 남아 나의 등을 떠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