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산이 높을수록 근심은 줄어든다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오색초등학교에서 백두대간 경로인 단목령까지는 정확히 2시간 반이 걸렸다. 처음 한시간은 무척이나 완만한 계곡길이었지만 이후 한시간이 넘는 길은 깎아지른 오르막이었다.



한시간 반 동안 이어지는 오르막은 결코 쉬운 코스가 아니었지만 대신 길이 끊기지 않고 거의 연결되어 있었다. 깎아지른 오르막에서 길을 잃고 헤맬 일이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다 싶었다.



단목령 지킴터에 도착한 것이 오후 2시 20분.



유후~ 드디어 백두대간을 만났다!!!



나는 단목령에 도착하자마자 배낭을 훌렁 벗어 던졌다. 깎아지른 오르막을 오르느라 한시간 반 동안 거의 쉬지 못했고 배낭은 한번도 내려놓지를 못했다. 어깨가 파일 듯 아팠다.



단목령 지킴터는 단목령에서 한계령으로 이어지는 통제구간을 감시하기 위해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설치한 초소다. 공단 직원이 있으면 얘기나 나누며 쉬어가려고 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설악산은 국립공원 중에서도 단속이 가장 심한곳이고 특히나 단풍철은 산악인들이 몰리는 기간이라 더욱 단속이 심하다는 얘길 들었는데 기대했던 국공직원이 없으니 허탈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나에게는 행운이었으니, 나중에 아주 나중에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오색초등학교에서 단목령으로 올라가는 길도 모두 통제구간이라는 사실이었다! 헉!!



그러니까 그날 단목령 지킴터에 국립공원 직원이 있었다면 나는 통제구간에 진입했다는 이유로 벌금 딱지를 떼일 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다. 백두대간 지도에는 '백두대간 경로'에 대한 통제구간만 표시되어 있을 뿐, 백두대간 경로에서 벗어난 등산로에 대해서는 통제인지 아닌지 부연설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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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계곡이 품은 자연이 지금껏 봐왔던 여타의 계곡보다 더욱 원시림 같은 느낌이었다. 어쩐지 등산을 하는 내내 산악회의 리본이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통제구간은 국립공원 직원들이 수시로 점검을 다니며 혹시라도 달려있는 산악회 리본을 모두 제거해 버린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은 모두 나중에 아주 나중에 알게 된 것들이었다. 당시의 나는 이런 저런 아무런 상식이 없었다.



단목령 지킴터에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 '통제구간인 한계령 쪽으로 치고 올라갈까?' 하는 유혹이 살짝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건 나중에 하든지 하고 오늘은 처음 계획했던대로 하자. 나는 지난주 겪었던 설악산의 암릉에 아직도 지쳐있었다. 힘들디 힘든 암릉을 다시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원래의 목표였던 백두대간 남진으로 단목령에서 조침령 방향으로 걸었다. 걸음을 옮긴지 5분도 되지 않아 흐르는 계곡물을 발견했다. 이곳은 해발 850m가 넘는데 이 높은 곳에 계곡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던 '水' 표시가 이 계곡이었구나!



백두대간 지도에는 경로마다 물을 수급할 수 있다는 '水' 표시가 있었다. 나는 이런 표시가 있는 곳에 약수터가 있을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연 그대로의 물이 흐르고 있을줄이야. 나는 계곡물을 떠서 별로 비어있지도 않은 물통을 채웠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몰랐다.

단목령 계곡에서 채운 물이

이후 5일 동안 자력으로 해결한

유일한 물이 될 줄은.



단목령에서 조침령까지는 10km의 거리지만 평지같은 완만한 능선길이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산이 늘 그렇듯 오르막과 내리막이 줄기차게 이어지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았다. 암릉이나 자갈길도 없이 걷기 좋은 숲속 오솔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설악산 구역 안이라 그런지 깔끔한 이정표가 수시로 나타났고 백두대간 종주자들의 리본도 수시로 나타났다. 나는 별 생각없이 길을 걷다가도 백두대간 종주자들의 리본을 만나면 단전에서 올라오는 깊은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리본을 오랜만에 만나면 헤어졌던 친구를 만난듯 반가웠고 한시간 넘게 리본을 만나지 못하면 불안감에 휩싸여 지도를 몇번이고 들여다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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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침령까지 걸으며 이보다 좋은 길이 또 있을까 싶었다. 내가 상상했던 백두대간의 길이 딱 이런 길이었다. 산 정상을 걷고있지만 여느 숲이나 공원을 걷듯 경사가 완만한 길. 여느 숲이나 공원 보다는 풀과 나무들이 훨씬 깊은 농도를 자아내는 길. 이렇게나 깊은 숲길을 전세 낸 듯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홀로 조용히 걷는 길.



대낮의 밝은 빛과

깊은 산이 품은 자연의 조화가

무척이나 편안했다.



아- 좋다!
아- 아름답다!




이런 생각외에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토록 나를 괴롭혔던 어린시절에 대한 트라우마와 사회생활과 직장생활을 하며 누적되었던 고통과 실패의 기억들은 이 길에서 티끌만큼도 나를 괴롭히지 못했다.



그래서였다. 내가 그토록 산에 집착했던 것은. 산에 오르기 위해 집을 나서기만해도 행복감이 몰려왔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산길에 접어들기만 해도 서글펐던 이유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음에도 여자 혼자의 몸으로 두려움 없이 백두대간 나선 이유는.



삶의 경험들이 모두 고통의 기억으로 둔갑하여 땡볕에 녹은 캬라멜처럼 내 안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떼어내려 할 수록 더욱 진득하게 들러붙었고 모른척 할 수록 더욱 넓게 퍼져 나를 잠식시켜 갔다.



그런데 산에 오르면, 산에만 오르면, 그 기억들은 내 안에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분명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내 안에 있었고 톡 건드리면 나의 온 인생과 목숨까지도 잡아먹으려고 시종일관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도시에서의 나는 그 기억들을 건드리지 않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고 그래서 언제나 기진맥진 했다.



산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기를 쓰고 애를 써도 스멀스멀 올라오던 고통의 기억들이 산에서는 단 한순간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런 노력없이 그저 걷기만 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그것들은 낮은 곳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것인지 해발이 높아질수록 잠이 든 듯 잠잠해지다가 해발이 낮아지고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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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조침령에 닿지 못했는데 조금씩 해가 기울고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진동호' 라는 저수지 주변을 지날때 해가 넘어가는 서쪽으로 황금빛 단풍이 펼쳐졌다.



단풍 스스로의 붉은 빛에

스러지는 태양의 황금빛이 더해져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계속계속 좁은 오솔길이라 오늘의 여장을 풀기 위해서는 무조건 조침령에 닿아야 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왔다. 역시나 산에서의 어둠은 순식간에 몰려왔다.



백두대간 첫날 처럼 깊은 산 속에서의 어둠이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나는 여유롭게 헤드랜턴을 꺼냈고, 어둠 속에서 산길을 걸으면서도 낭만에 젖어 달 사진을 찍었다. 어둠이 내려앉아도 길이 확실하고 이정표와 산악회의 리본이 있으니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가 어딜까? 어느덧 나는 데크로 만들어진 전망대에 닿았다. 조침령에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얼마나 더 가야 조침령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 깔끔한 전망대에 텐트를 설치하고 싶었지만 팩을 박을 수 없어서 전망대 바로 앞의 흙길에 비비쌕 텐트를 설치했다.



저녁을 먹기 전 텐트에 누워 다리를 쭉 펴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늘의 기록을 살펴보니 오전 11시 50분에 등산을 시작해서 저녁 7시 05분 까지 걸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멈춘 10분을 제외하고는 계속 걷기만 했다.



꼬박 7시간 동안 13km를 걸은 것이다. 그런데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지상에서 단목령까지 치고 올라올 때는 무지하게 힘들었는데, 단목령에서 조침령까지 이어진 완만한 능선을 걷는 동안 그 힘겨움이 다 풀려버린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이 많이 불었다. 하지만 그 바람을 나무들이 다 가려주는 것인지 소리가 무성한데도 신기할 정도로 따뜻했다.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기분 좋은 야영으로 기록될 첫번째 날이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23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오색초등학교 (강원도 양양군) - 단목령 - 북암령 - 조침령 비박 (강원도 인제와 양양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0월 10일 / 월요일

episode15.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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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 목금 주4일 연재합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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