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다음날 아침도 그 부부와 함께 식사를 했다. 부부는 원래는 3박4일의 일정으로 출발했는데 2박3일만에 하산하게 되었다며 나의 식량은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아침식사로 그들의 밥과 라면을 얻어먹은 뒤, 그들은 남은 음식을 모두 내 배낭에 넣어주었다. 본인들은 오늘 하산이니 간단한 행동식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떠날 채비를 모두 마친 후 대피소 직원에게 부탁해서 나의 무거운 박배낭을 숨겨두었다. 직원들은 청소용품을 보관하는 곳에 배낭을 숨겨둘 수 있게 해주었다.
천불동 계곡을 갔다가 백두대간을 타자면, 이곳 희운각대피소에서 계곡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희운각으로 올라와서 대청봉을 올라야 했다. 어차피 다시 같은 곳으로 올라와야 하는데 그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왔다갔다 할 필요가 뭐 있냐며, 이모님이 나서서 대피소 직원에게 배낭을 좀 맡길 수 없겠냐고 물어봐주셨다.
대피소 직원이 당황하며 쉽게 대답을 못하자 이모님이 부탁을 하셨다.
"이 아가씨가 혼자서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대요. 보세요. 이 가녀린 몸으로 이렇게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다니까요. 천불동계곡만 둘러보고 다시 올라 올테니까 몇시간만 좀 봐줘요. 젊은사람이 혼자서 백두대간을 탄다는데 얼마나 기특해요. 안 그래요?"
이모님 옆에서 나는 최대한 해맑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아닌가? 불쌍한 표정을 지었어야 했나? 모르겠다. 어쨌든 당황하던 직원은 "원래는 안되는데..." 라고 하며 나의 배낭을 보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는 부탁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느니 그냥 내가 하고말지 하는 마음 반, 부탁해도 안될거야 라고 생각하는 마음 반, 도시에서 살아갈 때는 부탁이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잘 없었다.
경리로 입사한 내가 왜 포토샵으로 누끼 (사진의 배경을 없애는 작업)를 따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디자인담당 직원이 해야할 일을 내가 하고 있었고 그 일 때문에 나는 점점 야근을 해야 했다.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하자 사장님은 말씀하셨다.
"중소기업에 니 일 내 일이 어디있어? 그냥 다 하는거지. 니가 안하면 이걸 누가 하니?"
그렇게 나에게 점점 많은 일이 주어졌다. 인상을 쓰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일을 다 해냈고 잘 해냈다. 힘듦을 토로했을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더이상 같은 말로 불평을 하지도 않았다. 말해봐야 어차피 안통해. 그렇게 꾸역꾸역 다른 사람의 업무까지 다 해내던 나는 결국 일년을 못 넘기고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그런 패턴은 회사를 옮겨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3개월 쯤 다니면 나는 다른 직원의 일까지 떠맡아 하고 있었고, 다른 직원들이 퇴근하고 난 이후에 홀로 야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일년쯤 지나면 나는 또다시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불만쟁이가 되고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부드럽게 말하는 법을 몰랐고 통하는 방법으로 부탁하는 법도 몰랐다. 나의 요구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화내고 싸우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조용히 회사를 옮기는 것을 택했던 것이다.
그런 나의 선택들이 나의 삶을 더욱 고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언제나 신입이었고 연차가 쌓이지 않으니 돈이 벌리지 않았다. 나의 부탁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다른 말, 더 좋은 말과 더 부드러운 억양으로 설득했어야 했는데 그걸 몰랐다.
그날 이모님이 거절의 뜻을 비친 대피소직원을 설득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무거운 박배낭을 메고 300m가 넘는 해발을 왔다갔다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서 나의 힘겨움을 덜어낼 수 있다는 것을 몰랐으니까. 부탁을 했는데 거절을 당하면 다시 한번 더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나의 사전에 없었으니까.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맨 몸으로 등산로를 밟게 되자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배낭이 없으니 가을로 무르익어 아름다운 설악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모님과 나는 단풍아래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깔깔웃었다.
부부가 함께 설악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이 거의 없었다며, 이모님은 내 덕분에 부부의 사진을 많이 건지게 되어 다행이라고 하셨다. 아저씨는 설악산과 천불동계곡에 대해 설명을 하셨고 설악산에 처음 온 이모님과 나는 수업을 듣는 학생들처럼 아저씨의 말을 경청했다.
천당폭포를 지나 양폭대피소와 오련폭포까지 내려갔다가 계곡 옆 바위에서 떡을 나누어 먹고 우리는 아쉬운 작별을 했다. 이모님은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시며 서울로 돌아오면 꼭 연락하라고 하셨다.
사진도 많이 찍고 얘기고 많이 나누며 산책같은 등산을 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에 다시 희운각으로 돌아올 때는 서둘러 올라왔다. 배낭이 없으니 그 오르막을 오르면서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다시 희운각에 들러 배낭을 찾았다. 배낭을 맡아준 대피소 직원들께 감사하다고 몇번이고 인사를 드렸더니 믹스커피를 한 잔 타주셨다. 인사만 잘해도 먹을것이 나오다니! 도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침에 이모님이 넘겨주신 밥과 반찬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이번엔 백두대간 경로이자 설악산의 최정상인
대청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혹시 차ㅇㅇ 이모님 핸드폰 맞나요?"
"네. 맞는데요. 누구시죠?"
"이모님~ 저... 10년 전에 설악산 공룡능선 같이 탔던, 엄청 큰 배낭 메고 백두대간 종주한다고 했던 안선유에요. 혹시 기억나세요?"
5초간 정적_
"하하하하하 ㅎㅎㅎㅎㅎㅎ 아니 이게 누구야! 잘 지냈어요?"
"하하하 네~ 잘 지냈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아직도 서울에 살아요?"
"ㅎㅎㅎ 지금은 부산에 살고 있어요. 이모, 저 그동안 결혼해서 벌써 애가 둘이나 돼요."
"벌써 애가 둘이나 된다고?"
"네 이모. 우리가 같이 설악산을 탔던게 벌써 10년 전이에요."
"어머나~ 세상에~! 그게 벌써 그렇게 됐어?"
"네, 벌써 그렇게 됐어요. 저 그때의 백두대간 경험으로 지금 되게 잘 살고 있어요. 등산 하기 전에는 부정적이고 우울했었는데요 그 이후로 밝고 긍정적으로 바뀌었거든요."
"아! 세상에... 그래, 그럴거야. 그런 일을 해낸 사람이라면 뭘 해도 잘할 수 밖에 없을 거야. 나는 아가씨가 진작부터 잘 살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백두대간 종주기를 다시 쓰며 그때의 기록을 찾다보니 다이어리 한켠에 이모님의 연락처가 적혀있었다. 어머, 이모님! 아직도 이 번호를 사용하실까? 나는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꾹꾹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고 한참만에 받은 전화에서 이모님은 너무나도 반가워하며 단박에 나를 기억해내셨다.
"아니 근데, 어떻게 10년만에 전화를 할 생각을 다 했어? 안그래도 얼마전에 남편이랑 아가씨 얘기 했었거든. 그때 그 아가씨는 잘 살고 있을까? 어떻게 살고있을지 궁금하다, 하면서 말이야."
"어머 정말요? 우리 텔레파시가 통했나봐요! 하하하"
나는 작가가 되기 위한 연습으로 10년전 그때의 기억을 다시 쓰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우리는 마치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즐겁게 수다를 늘어놓다가 조만간 또 연락하자며 전화를 마무리했다.
10년만에 연락을 해도 이렇게나 반가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감사하다. 혹시 연락처를 바꾸셨으면 어쩌나, 나를 기억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 고민과 걱정에도 선뜻 통화버튼을 누를 수 있는 용기는 백두대간이 아니었으면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백두대간 경로에서 이탈/ 자유 산행
진행 구간 : 설악산 희운각 대피소(강원 인제와 속초의 경계) - 무너미고개 - 천당폭포 - 양폭포 - 오련폭포 - 다시 희운각 대피소 (강원 인제와 속초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0월 6일 / 목요일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