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등산로도 막히고 머릿속도 막히고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늦은 가을의 산은 높은 곳으로 갈수록 앙상한 가지뿐이고, 산이라면 어딜가나 돌과 바위가 있게 마련이지만 응복산의 풍경에는 지금껏 봐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괴함이 있었다. 그곳은 왠지 모르게 스산했다.



그리고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응복산의 흙무더기에서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오는데도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어둠이 짙어지며 덩달아 바람도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강원도의 '돌바람'을 여기서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 강원도의 겨울바람에는 돌이 날려가기도 한다고 들었다.



응복산의 제멋대로 날아가 박힌 돌들은 정말로 '바람' 이 그런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람에 밀려 제대로 걷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배낭과 무릎이 바람때문에 계속 휘청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등산로가 막혀 버렸다. 여기서부터는 통제구역이라는 오대산 국립공원의 '출입금지' 표지판이 등산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헐! 뭐지? 지도에는 그런 표시 없었는데?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지?



지도에 우후죽순으로 표시된 식수는 나오지도 않더니 지도에 없던 통제구간이 갑자기 나타났다. 나는 당황해서 어떡해야 할지 몰랐다. 머릿 속이 하얘졌다. 바람은 지랄같이 쳐불고 길은 막혔고 산 속은 칠흙같이 캄캄했다.



갈팡질팡 하던 나는 그냥 여기서 비박을 하기로 했다. 마침 통제 표지판 앞에 공간이 널찍했다. 텐트를 치기에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공간이 아니라 바람이었다. 바람이 장난아니게 불어닥쳤다.



급한 마음에 아무렇게나 텐트를 쳤다가 바람에 밀려 텐트가 부서지려고 하기에,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텐트를 다시 쳤다. 바람이 텐트를 통과하도록 설치한 것이다.



바람의 방향에 맞춰서 텐트를 치면 텐트가 날아가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람이 텐트를 건드리지 않았다. 옷깃을 잡아 뜯던 바람이 나의 텐트는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텐트 안으로 기어 들어가 누웠다. 배낭도 끌어당겨 텐트 안으로 들였다. 1인용 비비쌕 텐트 안에서 50리터짜리 배낭을 끌어안고 숨을 몰아쉬었다. 텐트 밖의 바람소리는 무서울정도로 거친데 텐트 안은 신기하리만치 고요했다. 아직 텐트 입구를 닫지 않았는데 춥지도 않았다.



바깥 세상의 소리로부터 귀를 닫을수만 있다면

텐트 안은 평온,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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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너무 불어서 버너를 사용할 수 없었다. 저녁 짓기는 포기하고 어제 산악회 사람들에게서 받은 인절미를 오물오물 씹었다. 그분들의 도움이 이틀 연속 나를 살린 것이다!



가족들에게 오늘의 생사를 알리기 위해 핸드폰을 켰다. 그런데 빌어먹을!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다. 바람때문에 저녁도 못 먹고 꼼짝없이 텐트 안에 누워있으려니 어딘가에 갇혀있는 기분이 들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여길 벗어나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쉽사리 잠이 올 리 없었다. 바람은 새벽내내 공포의 소리로 회오리쳤고 시간이 깊어질수록 추위로 온 몸이 떨렸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도 금새 잠이 깨기 일쑤였고, 한번 잠이 깨면 다시 잠들기가 힘들었다.



새벽이 너무 길었다. 백두대간 첫 날 길을 잃고 계곡 옆에서 잠 들었던 그 날처럼 ㅆㅂ ㅆㅂ 욕이 나왔다. 푹 잠들지 못하고 계속해서 잠이 깨어버리니 배도 너무 고팠다. 배고픔과 피곤함에 섞여 나의 욕지거리는 입 밖으로 뱉어지지 못했다. 그저 혀 끝에서만 맴돌다가 다시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눈이 퉁퉁 부어 제대로 뜨기도 힘들었다. 굳이 손으로 만져보지 않아도 눈이 엄청나게 부어있는게 느껴졌다. 평소의 반도 안되는 좁은 시야로 겨우겨우 텐트 밖을 내다보았다.



새벽까지도 미친듯이 불어대던 바람은 어딜 급하게 지나가던 길이었는지 아침엔 새끼바람 한점 남아있지 않았다. 아아아...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었구나. 어제가 지구의 마지막날인줄 알았다.



사지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밤새 웅크린 몸을 한번도 펴지 못했다. 이번에 집으로 돌아가면 침낭부터 새로 사야겠다. 날은 점점 추워지고 있는데 계속 이런식이라면 뼈마디가 쑤셔서 대간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텐트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설악산권 내에서는 통제구간을 모두 건너뛰었던지라 나에겐 이곳이 처음 접하는 통제구간이었다. 출입금지 안내판이 너무 무서워서 다른길이 있으면 돌아가려고 했다. '통제'의 개념 자체를 몰랐던 나는 산의 주능선이 통제라면 둘레길처럼 산 아래를 돌아가는 길은 열어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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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통제 표지판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다른 등산로가 없었다. 그러니 통제구간을 패스하려면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구룡령으로 하산해야 하는 것이다. 6시간이나 걸려 힘든게 온 거리를 다시 되돌아가는 것은 미친 짓 같았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과감하게 통제구간을 뚫고 지나가기로 했다.



한가롭게 밥을 짓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국립공원 직원이 나타나기 전에 빨리 통제구간을 통과해야 했다. 밥짓기 대신 물을 끓여 차와 함께 인절미를 먹는 것으로 식사를 대신했다. 얼마나 아껴가며 먹은것인지 이틀 전 받은 인절미가 아직도 남아있었다.



배낭을 싸는둥 마는둥 급하게 통제구간으로 들어섰다. 출입금지 표지판이 막고 있는 그 길로 들어섰는데 가도 가도 길이 끊어지지 않고 등산로가 선명하게 이어졌다.



막연한 나의 생각으로는 통제구간에 들어서면 길도 없고 리본도 없고 순전히 동물적 육감으로만 길을 찾아내야 하리라, 무던히도 겁을 먹었던 것이다. 설악산의 오색초등학교에서 단목령까지 오르던 길이 계속 끊어지던 것처럼 모든 통제구간은 다 그럴것이라고 생각했다.



통제구간인 오대산의 신배령에서부터 통제가 해제된 두로봉까지는 정확히 2시간이 걸렸다. 그 2시간 동안 등산로가 끊어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산세는 완만하고 길은 안정적이었다. 국립공원 직원에게 걸리면 어쩌지? 하는 애매한 두려움만 없었다면 굉장히 좋은 코스였을 것이다.



단언컨데 통제 표지판 앞에 다른 등산로가 있었다면 나는 굳이 통제구간으로 들어서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 이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고 우회로도 없는 곳을 무작정 통제로 묶어놓은 오대산이 잘못한거야, 라고 몇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국립공원 직원에게 걸리면 그렇게 변명을 늘어놓을 참이었다.



1시간 40분 정도 이어지던 좋은 길이 갑자기 미친듯이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경사가 급하게 심해지는데 태풍이나 집중호우 이후로 등산로를 보수하지 않은 것인지 등산로가 여기저기 파이고 나무계단과 울타리 로프는 부서지고 끊어져 있었다.



끊어진 등산로를 헤치며 정신없이 오르막을 오르다보니 눈 앞에 또다시 표지판 하나가 나타났다. 내가 있는 곳에서는 표지판의 뒷통수만 보였다. 표지판의 앞면을 보기위해 걸음을 재촉했더니 생각지도 못한 드넓은 평지가 나타났고 표지판은 '여기서부터는 통제구간임' 을 알리고 있었다. 즉, 통제구간에 있던 나는 드디어 개방구간으로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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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판이 있던 곳은 헬기장이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이곳이 '두로봉' 임을 알리는 정상석도 있었다. 유후~! 드디어 오대산이다!!! 국공직원에게 잡히지 않고 제대로 된 경로에 들어섰다는 생각에 만세를 외쳤다.



다시 지도를 펼쳤다. 이곳 두로봉에서 신선목이를 거쳐 진고개로 바로 가는 것이 제대로 된 백두대간 코스이지만, 나는 오대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을 꼭 가보고 싶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21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응복산 (강원도 홍천과 양양의 경계) - 만월봉 - 신배령 비박 - 두로봉 (강원도 홍천,평창,강릉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 13일 목요일

episode19.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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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 목금 주4일 연재합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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