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때로는 아름다움이 배고픔도 잊게 하는 마법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나는 등산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산행자였고, 그래서 가 본 산이라고는 지리산과 덕유산, 집 근처의 수락산이 전부였다.



설악산도 백두대간을 하며 처음으로 가본 것이었는데 다행히도 설악산의 주능과 최고봉인 '대청봉'은 백두대간 코스에 포함되어 있어서, 백두대간을 타는 것 만으로도 설악산에 대한 갈증이 어느정도 해소되었다.



하지만 이곳 오대산은 주능선과 최고봉이 모두 백두대간 경로에서 살짝 비껴 있었다. 오대산 국립공원을 지나긴 지나지만, 백두대간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자면 '나 오대산 가봤어' 라고 말하기는 힘든, 애매한 경로였다.



두로봉에서 백두대간 경로인 신선목이로 향하지 않고 오대산 상왕봉을 거쳐 비로봉을 다녀오기로 했다. 상왕봉으로 가는 길에 '두로령'을 지나게 되어있는데 국도는 아니지만 자동차도 지나갈 수 있는 넓은 산길인 두로령에 '백두대간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등산 지명에 붙은 접미사 '령(嶺)' 은 '재' 나 '산마루의 고개' 라는 뜻으로, 산의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 움푹 들어간 고개를 뜻한다. 산 정상의 봉우리 옆 그나마 낮은 고개를 거쳐 산의 양쪽 마을들을 연결하는 길이 '령' 인 것이다. 백두대간을 다녀보면 보통 'ㅇㅇ령' 이라고 이름붙여진 곳에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는 국도나 산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두로봉과 두로령을 거쳐 상왕봉으로 향했다. 오대산의 주능에 들어서니 은백색 자작나무가 자주 보였다. 단풍도 지고 잎새도 모두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높은 산 정상부였지만, 자작나무의 은백색 신비함 덕분에 등산이 지루하지 않았다. 자작나무를 처음 접한 나는 잎새 없는 몸뚱이만으로도 나무가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중에 나이 들어 시골에 집을 짓게 되면 은백색 자작나무를 집 주변에 빙 둘러 심어놓고 싶었다. 은백색 자작나무로 둘러쌓인 집에... 겨울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면... 아아! '나나아 연대기' 속 동물들의 마을에 사는 기분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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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과 내리막을 몇 번 꼴깍꼴깍 했더니 금새 상왕봉을 지나 비로봉에 닿았다. 길이 별로 험하지 않아서 뭐 이정도 오르막과 내리막 정도야 식은 죽 먹기였다. ㅎㅎㅎ 이제는 내 몸이 등산에 적응되어버린 모양이다.



과연 국립공원의 스케일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백두대간 경로에서는 하루 3팀 이상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데, 오대산의 비로봉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주말도 아닌 평일에 말이다. 갑자기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되니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오대산 정상에서는 앞으로 가야할 백두대간의 능선이 한눈에 펼쳐 보였다. 진고개를 넘어 다음주 쯤 지나게 될 노인봉과 황병산, 그리고 대관령의 풍차들까지 모두 보였다. 시야가 깨끗한 날이었다. 이곳의 주능에는 잎새들이 거의 떨어졌는데 건너다보는 산풍경에서는 아직도 단풍이 느껴졌다.



그런데 날이 찌는듯이 더웠다. 어젯밤에는 강원도의 칼바람이 살을 에는 추위로 잠도 못 들게 하더니, 오늘 낮에는 늦가을 뙤약볕이 숨도 못 쉬게 한다. 평소 산행에서는 물도 잘 마시지 않는데 이 날은 목이 너무 말랐다. 비로봉 정상에 닿기 전에 만난 부부에게 부탁드려 생수 500ml를 나눠받았다. 산행을 하며 계속 마셔서 물이 부족했던 것이다.



물도 떨어지고 식량도 떨어져서 더이상 먹을 음식이 없었다. 나는 급격한 배고픔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남은 음식이라곤 한입 크기의 인절미 7조각과 땅콩캬라멜 4개, 그리고 직전에 받은 생수 500ml가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내일도 대간을 이어가야 했다.



인절미를 전부 먹어치웠는데도 배가 너무 고파서 미칠지경 이었다. 위장이 음식을 넣어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위 벽이 바짝바짝 마르는 소리가 고막까지 전달되었다. 나는 분명 눈 앞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물과 음식을 구걸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산객이 한 팀 뿐일 때는 잘도 나불거리던 입이, 산악회로 바글바글한 틈에 서 있게 되자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지? 어쩌지? 고민하는 사이 나의 두 다리는 다시 백두대간 경로인 두로봉으로 향하고 있었고 여기저기 앉아서 점심을 먹고있는 산객들에게 끝내 아무 도움도 요청하지 못했다. 용기없는 자는 이렇게 굶어죽는 거구나. 간곡한 부탁 한마디면, 딱 한마디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을텐데, 그 한마디가 죽어도 나오지 않았다.



오는 길에 아름다웠던 은백색 자작나무는 가는 길에 온통 백설기로 보였다. 은백색 백설기 은백색 백설기 백설기 백설기 백설기... 흑 배고파... 흑 죽을거 같애...



지나가시던 할아버지들이



"이야~ 나무들 봐! 진짜 멋지지 않냐? 주목은 오대산이 최고라니까!"



라는 대화를 나누셨다. 배가 고파 눈이 반쯤 풀린 나는 그제서야 자작나무가 아닌 주목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아닌게 아니라 커다랗고 특이하고 기품있는 나무들이 지나는 곳곳마다 개성있게 서 있었다. 나무들이 워낙 커서 카메라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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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에서도 유명한 것이 바로 이 주목이었다. 덕유산의 주목이 하늘로 쭉쭉 뻗어있다면, 오대산의 주목은 발레리나처럼 팔을 멋지게 구부리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렇구나... 이 나무들이 다 주목이었구나... 멋있네 멋있어... 그런데 밥은?



아침에 들렀던 두로봉을 다시 거쳐 신선목이로 향했다. 주능보다 고지가 낮은 곳으로 들어서자 다시 단풍이 나타났다. 배가 고픈 와중에도 단풍은 여전히 예뻤다.



그리고 드디어 신선목이에 도착! 꺄아~ 살았다 살았어!! 빨리 물을 찾아보자! 물만 찾으면 쌀을 씻어 밥을 지을 수 있어!



신선목이는 엄청나게 넓은 야영지였다. 아치형으로 휘어진 나무들이 야영장처럼 넓은 공터를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었고, 단풍과 자작나무가 하모니를 이루는 곳이었다. 경치감상은 이쯤이면 됐어. 이제 물을 찾아보자! 나는 배낭을 집어던지고 물을 찾기 시작했다.



물을 찾기 위해 주변 안부를 다 내려가보고 물이 나올만한 골짝을 다 수색했다. 하지만 하지만...



물이 없다!!!



지금껏 지도가 계속 뒷통수만 쳤어도 그래도 국립공원을 믿었다. 설악산에서는 물이 있다고 표시된 곳에 항상 물이 있었으므로. 오대산도 당연히 그러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왜? 국립공원이니까! 어쩌면 이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봉에서 산객들에게 구걸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구걸을 못 한게 아니라 안 한 것이다. 신선목이에 물이 있으리라 철썩같이 믿었으니까!



이놈의 지도야, 물이 있다며! 물이 있다며!!

넌 왜 이렇게 내 뒷통수만 치니? 흐어엉...



정말이지 울고싶었다. 지금 현재 남은 음식은 땅콩캬라멜 2개와 물 200ml... 그리고 생쌀... 내일 아침을 위해 남은 200ml의 물은 무조건 남겨두어야 했다.



내일도 이어질 나의 하루를 위해 오늘 밤의 배고픔은 잠으로 눌러보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목이 마를 때 마다 침을 꿀꺽 삼키는 것으로 목마름을 해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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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나자 신선목이의 풍경은 가히 압권이었다. 아치형으로 휘어진 나무들이 야영지를 둘러싸고 가운데 하늘은 뻥 뚫려 있었는데, 그 여백의 하늘로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의 별이

그 많은 별이

하나도 남김없이 우수수

내게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별가루를 받아

맛있게 냠냠 먹었다.

배는 고플지언정 마음은 포근함으로 가득찼다.



하늘의 커다란 달이 건빵이고

반짝반짝 저 별들이 사탕이었으면...

아 냠냠... 아 맛있다...



나는 별을 받아먹고 7시에 잠이 들었다. 그대로 아침까지 푹 잤으면 정말로 행복했을텐데, 한시간 만에 깨어서는 더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텐트 입구를 열어 하늘을 봤다.



1인용 비비쌕 텐트는 접었을 때 크기도 작고 무게도 가벼운 대신 천장이 낮아 누우면서 들어가야 했다. 텐트 안에서의 모든 활동은 누워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거나 텐트 안에서 밥을 지어 먹는 행위 따위는 불가능했다. 그저 엎드려서 일기를 쓰고 잠을 자는 용도로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1인용 비비쌕이었다.



그런 비비쌕에도 2인용 돔텐트를 능가하는 장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텐트에 누운채로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텐트 입구가 경사형으로 생겨서 입구를 열어놓기만 하면 굳이 상체를 이동하지 않아도 하늘이 훤히 보였다. 대신 입구가 경사형으로 생겼기 때문에 지나가던 멧돼지가 실수로 텐트를 밟으면 그대로 내 얼굴에 멧돼지의 두툼한 발바닥이 느껴지리라.



저녁 7시쯤 이른 잠이 들었다가 8시에 다시 깨어버린 나는 텐트 입구를 열어놓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봤다. 검은 잎새의 그림자 사이로 짙푸른 청색의 하늘이 보였다. 밤하늘의 별들이 은하수를 타고 일렁이듯 춤을 췄다. 그 모습을 보니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21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두로봉 (강원도 홍천,평창,강릉의 경계) - 두로령 - 상왕봉 - 오대산 비로봉 - 상왕봉 - 두로령 - 신선목이 비박 (강원도 평창과 강릉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0월 13일 / 목요일

episode20.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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