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구룡령은 국도가 지나는 곳인데 이곳은 터널이 형성된 곳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백두대간을 이어가려면 차가 지나다니는 국도를 건너야 했다. 내게 처음 백두대간을 알려주었던 언니가 잘 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는 내게 고속도로 같은 차도는 백두대간 아래의 터널로 형성되어, 지리산에서 설악산까지 백두대간 산길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백두대간은 이곳 구룡령 말고도 많은 곳에서 차도를 피하지 못하고 산길이 끊어져 있다. 이미 지나온 한계령에서도 국도를 만나지 않았던가.
그 언니는 백두대간 북진으로 지리산에서 시작해 설악산으로 향하는 경로였고 우리가 만난곳은 덕유산이었다. 그러니 언니는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몇차례 국도를 건너 대간을 탔을 것이었다. 지리산 서북능선에서 고기리를 따라 노치샘으로 이어지는 길은 국도를 건너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국도를 따라 2km 정도 걷는것이 백두대간 코스이고, 덕유산권 시작점인 육십령도 국도로 인해 산길이 끊어져 있다. 그런데도 언니는 왜 나에게 그런 설명을 했을까?
나는 '백두대간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보다 '등산로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말에 더욱 혹했었다. 언니의 그런 설명이 없었다면 이렇게나 서둘러 백두대간에 올랐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NO 였다. 언니의 그 말이 없었다면 나는 계속 국립공원 위주의 산행만 했을 가능성이 더 컸다. 백두대간이 무엇인지 검색해보고 나도 한번 해볼까? 라는 생각은 했겠지만 이렇게나 급하게 대간길에 오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블로그에 기록하던 나의 백두대간 종주기는 동호회 활동 없이 혼자서만 산에 다니던 나를 꽤 많은 산객들과 연결되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그때 나에게 백두대간을 알려주었던 언니와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
인적 드문 백두대간에서 우연히 사람을 만나 도움을 받을때마다 나는 그들이 실존하는 인물이 맞는지, 나의 상상이 빚어낸 사막의 오아시스를 실제라고 믿고 있는것은 아닌지, 궁금할 때가 많았다.
내게 백두대간을 처음 알려준 언니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맞을까? 그 언니는 왜 내게 그런 설명을 했을까?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계속 등산을 이어가고 싶었던 내게 그 언니와의 만남은 마치 신의 계시와도 같았다. 백두대간은 터널 위로만 연결되어 차도도 마을도 만날 일이 없다는 그 말이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 대간 위에 서있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대간을 이어가는 수많은 날들 동안, 차도나 마을길로 내려설 때 마다 자연스럽게 그 언니가 떠올랐다. 언니를 만나면 그렇게 말한 이유를 꼭 물어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 언니는 "나는 그렇게 말한적이 없는데요?" 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구룡령의 국도변에는 노점상을 하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허리 높이의 꽤 큰 좌판을 펼쳐놓고 산나물 말린것과 커피와 약차 등을 팔고 계셨다. 옆에는 커피 마시는 사람들 쉬어가라고 커다란 평상도 있었다.
나는 반갑게 인사하며 할머니께 다가가 뜨거운 커피 한잔을 부탁드렸다. 하루종일 해가 없어서 정오가 가까워오는 시간인데도 뜨거운 것을 마시고 싶었다. 깊어진 가을이 겨울의 끝자락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은 날씨였다.
커피를 마시며 할머니께 여쭈었다.
"할머니, 여기 물 받을 수 있는 곳이 어디에요?"
"여기 물은 못 마셔. 흙탕물만 나오거든"
네에?!!! 못 마시는 물이라고요?!!! 물이 다 말라버렸다는 말보다 더욱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럼 나 밥은 어떻게 먹지?
"저기... 그럼... 쌀도 못 씻을까요?"
"쌀을 오케 씻어? 물에서 계속 흙이 나오는데."
"저기 그럼... 머리는 감을 수 있을까요?"
"머리를 감는다고? 글쎄, 함 가봐."
할머니가 가르쳐주신 방향으로 가보았다. 방금 내가 내려섰던 등산로 입구 계단 바로 옆에 움푹 들어간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 산에서 내려오는 호스와 커다란 고무대야가 있었다.
호스에서는 물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고 얼핏 보기에는 깨끗한 약수처럼 보였다. 나는 호스 아래 바가지를 받쳐 모이는 물을 지켜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계속 흙탕물이 나왔다.
아... 쌀은 못 씻겠구나...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만 감기로 했다. 집에서 나선지 3일째. 머리를 감기는 감아야 했다. 비록 물에는 흙이 섞여있었지만 친절하게도 누군가 세숫대야를 놓아두어서 씻는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나는 그 물로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고 양치까지 마무리 지었다. 산에서 비박을 할 때는 세수도 양치도 모두 물티슈로 해결해야 한다. 흙이 섞인 물이라도 물은 물이다. 물티슈로 닦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개운했다.
씻고나서 할머니의 평상으로 돌아와 머리를 말렸다.
"머리는 감을만 해?"
"그럼요. 저 양치도 했는걸요."
머리를 말리며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커피값을 계산하고 다시 대간을 이어가기 위해 배낭을 메려는데, 할머니가 내게 물병을 내 놓으라신다.
"물병 줘봐. 내 물이라도 나눠줄게. 나는 물 떨어지면 그뿐이지만 아가씨는 산에서 큰일이잖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가다가 물 나오겠죠. 괜찮아요."
이 외로운 국도변에서 추운날 홀로 고생하시는 할머니였다. 내가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할머니의 장사하시는 물까지 얻어가는 건 아니다 싶었다. 몇 번이나 사양을 했는데도 할머니는 기어코 물병을 채워주셨다.
"아가씨, 산에 혼자 다니고 그러면 안돼. 항상 조심해야 돼. 알았지?"
할머니는 걱정이 되시는지 신신당부를 하셨다. 정말이지 눈물이 날만큼 감사했다. 나에게 나눠준 그만큼의 물 때문에 할머니는 오늘 장사를 일찍 접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백두대간을 끝내고 삶의 여유를 찾으면 이곳 구룡령을 다시 찾아 할머니가 파시는 약초와 말린나물을 넉넉히 사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 뿐, 이후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삶은 나를 구룡령으로 다시 데려가지 않았다.
구룡령의 국도를 지나 응복산과 오대산으로 이어지는 남쪽으로 들어서니 단풍과 어우러진 소나무의 초록 덕분에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 연출되었다.
약수산 정상을 찍고 5분 정도 걸었을 때, 나무가 울창한 대간길에서 옆으로 삐죽 밝은 공터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별 생각없이 밝은 빛에 이끌려 발을 내딛었는데
아!
그 아래에는
어디서도 본적 없는
끝내주는 전망이 펼쳐져 있었다.
홍천과 양양을 이어주는 56번 국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아!
이런 풍경이라니!
세상에 이런 풍경이라니!
내가 이걸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구나!
이 풍경을 보기 위해 지금껏 살아왔던 거구나!
나로 하여금 이것을 보게 하려고
백두대간이 나를 잡아끈 것이었구나!
56번 국도를 둘러싼 단풍과 소나무의 조화가 눈물나게 아름다웠다. 단풍을 품은 발 아래의 능선에서부터 지평선을 이룬 저 멀리 아련한 능선까지, 눈에 닿는 모든 풍경이 말 그대로 절경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데, 아! 이토록 아름다운데! 아무리 사진을 찍어봐도 그곳의 풍경과 감동이 카메라에 담기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눈에만 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풍경이기에 그곳의 공기와 그날의 느낌까지 모든 것을 다 내 안에 채워넣고 싶었다.
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버렸다. 그리곤 한참동안 경치를 누렸다. 그 곳에 텐트를 칠 정도의 공간만 있었어도 나는 그대로 눌러앉아 하루의 밤과 하루의 태양을 사치했을 터였다.
구룡령을 기준으로 남쪽의 대간길도 북쪽의 길만큼 좋았다. 굳이 시야가 트인 전망대가 아니어도 그 곳이 품은 나무들이 모두 아름다웠다. 붉게 물든 강렬한 단풍과 은은한 빛의 노란 단풍에 초록 소나무의 향연까지! 게다가 발치의 풀잎은 연한 초록을 띄고 있었다. 봄도 아닌 이런 늦가을에 연한 초록의 풀이라니!
산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얻고
대간길에서 만난 풍경에서는 더욱 많은 것을 얻은 하루였다.
그런데 응복산에 들어서면서부터 풍경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땅이 파인것처럼 등산로가 일정하지 않았다. 내가 걷고있는 곳이 길인지 아닌지도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산길에 박혀있던 돌들을 어떤 힘 쎈 거인이 파내버린 것인지, 돌이 여기저기 아무데나 날아가 박혀있는 느낌이었다. 등산로는 엉망이고 말라죽은 나무들은 마치 불에 탄 듯 검고 이상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21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구룡령 (강원도 인제와 양양의 경계) - 약수산 - 마늘봉 - 응복산 (강원도 홍천과 양양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0월 12일 / 수요일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