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늦잠을 잤다. 알람이 울렸는데 내가 끄고 잔건지, 어젯밤에 알람을 켜놓지 않고 잠이 든건지 모르겠다. 핸드폰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산에서는 핸드폰을 거의 켜지 않았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연락을 해야 할때만 잠깐 켰다가 나의 생사를 알려주고나면 다시 핸드폰을 껐다.
그래서 아주 작은 알람시계를 챙겨다녔다. 알람같은거 없이 자고싶은만큼 실컷 자고 일어나서 종주를 하면 좋겠지만, 그랬다간 텐트 안에서 우루루 지나가는 산악회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자다가 살풋 눈을 떴는데 텐트 안이 너무 훤해서 깜짝놀라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 그리 많이 늦잠을 잔 것은 아니었다. 어제 동부산악회 회원들께서 나눠주신 누룽지로 오늘 아침까지 해결했다. 나는 원래 누룽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산에서는 이것이 꽤 괜찮은 식량인 것 같았다. 쌀을 씻어 밥을 지을때처럼 많은 물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시간이 많이 절약되어 좋았다.
오늘의 코스에는 구룡령을 지나간다. 구룡령은 국도와 만나는 지점이니 왠지 물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능선에는 물이 다 말랐어도 국도에는 물이 있을거야! 그럼, 그렇고말고!
갈전곡봉에서 구룡령으로 향하는 길은 특히나 나무들이 예뻤다. 산을 지키는 수호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특이하고 멋들어진 나무들이 많았다.
멋진 나무를 만나게되면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커다란 나무를 만나면 꼭 한번씩 껴안아보고 길을 이어갔다. 나무들을 애정하는 나의 마음을 전하는 동시에 길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얻고 싶었다. 나무와 꽃들에게 인사를 하며 산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허락받고 싶었다.
오늘의 종주를 시작하고 40분 만에 진짜 갈전곡봉에 닿았다. 어제 갈전곡봉까지 와서 대간을 마무리하려고 했었는데 그런 고집을 피우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표가 없는 능선을 걸을 때는 나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가늠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어제의 나는 5분 정도만 더 가면 갈전곡봉이 나타날 줄 알았는데 40분이나 걸린 것이다.
갈전곡봉의 넓은 공터에 닿으니 나보다 먼저 도착한 나이 든 부부가 쉬고 있었다. 이곳 동네분이신듯 배낭이 작고 옷도 수수한 일상복이다. 헥헥대며 갈전곡봉의 오르막을 올라오자 아줌마가 기특하다시며 나를 칭찬하셨다. 그러면서 아저씨께 하시는 말씀.
"이 봐! 이렇게 젊은 여자도 혼자 다니잖어!"
나를 칭찬하는 아줌마의 말씀이 못마땅하신듯 아저씨는 인상을 쓰며 땅만 바라보고 계셨다. 알고보니 산에 오기 싫어하는 남편을 억지로 끌고 오느라 구룡령에서 갈전곡봉으로 오는 내내 계속 말다툼을 했다고 한다. 아줌마는 아저씨더러 이 아가씨 좀 보고 배우라고 핀잔을 주셨다. 그리고 나에게는 옥수수와 양갱을 주셨다. 부부는 약초를 캐러 오신듯 등산로가 아닌 곳으로 사라졌다.
나이 든 부부가 함께 산을 오르며 투닥거렸을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웃겼다. 아줌마가 싫은 소리를 할 때마다 시선을 회피하며 딴청을 피우는 아저씨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그 나이가 되어도 잔소리를 할 것이 있다는 것이 재밌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쨌든 부부가 함께 산을 올랐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언제나 화내고 싸우고 소리지르며 집안 물건을 부수기만 하던 어른들 밑에서 자란 나는, 그런 부부의 모습도 다 애정이 있으니 가능한 것이라 여겨져 부러웠다.
산은 어느덧 화려함을 벗고 깊은 가을색으로 변해 있었다. 빨갛고 노랗던 단풍들은 채도가 한풀 벗겨진 색상으로 등산로를 에워쌌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어깨를 스치는 바람의 온도도 달라졌다. 나의 삶은 같은 날의 연속인데 날씨와 풍경은 매일이 달랐다.
구룡령을 향해 한참을 걷고 있는데 앞에서 아저씨 두 분이 오고 계셨다. 산에서 사람을 만나면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반사적으로 인사부터 했다. 사람 없는 한적한 등산로에서는 그저 같은 종족을 만났다는 것 만으로도 반가움이 몰려올 때가 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드리고 좁은 등산로를 스쳐 지나가려는데 어라? 뒤에 계신 아저씨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어? 아저씨! 우리 어제도 만나지 않았어요?"
긴가민가 해서 여쭈었더니 아저씨도 하하 웃으며 대답하신다.
"맞아요. 우리 구면인데."
유명한 국립공원도 아닌 백두대간에서 이틀 연속 같은 사람을 만난것이 신기했다. 게다가 이틀 연속 나는 남쪽으로 향하고 있고 아저씨는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신기한 마음에 가던 길도 멈추고 천천히 아저씨들을 살펴보았다. 등산로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는 해도 이렇게 멈춰서서 상대를 바라볼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허공에 던지듯 인사만 나누고 스치듯 지나친다. 그런데 아저씨들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등산복이라기보다 뭔가 유니폼 같았다.
나 : 아저씨들 뭐하시는 분이세요? 경찰이세요? 아님, 군인?
아저씨 : 아, 우리는 국방부에 소속된 '유해발굴감식단' 이에요.
나 : 유해발굴이요? 그게 뭔데요?
아저씨 : 6.25때 전사하신 분들의 유해를 찾아 발굴하는 일이지요.
나 : 네에? 그때가 언젠대 아직도 유해가 있어요?
아저씨 : 그럼요. 그때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 중에 아직 시신도 못 찾은 사람이 13만명이나 돼요. 그 시신들이 다 어디로 갔겠어요? 이렇게 높고 험한 산에 매장되어 있다고 봐야죠. 산에 다니다보면 이런 넓은 구덩이 많이 보죠? 이런 구덩이가 다 전쟁때 시체를 던져 둔 구덩이에요. 사람들이 다니는 등산로는 이미 발굴작업이 다 끝난 곳이라서 우리는 주로 등산로를 벗어나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을 돌아다니죠.
등산을 다니다보면 아주 넓게 파인 구덩이같은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국립공원이나 유명한 산보다 이름없는 작은 산에서 더욱 자주 만나게 되는 그것은, 구덩이이긴 하지만 그 안에 꽃과 풀들이 자라고 있다. 나는 그것이 퇴비를 모아두던 구덩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옛날에는 이 높은 산에도 다 밭이 있었나봐,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저씨들은 GPS를 보여주시며 의심되는 지역을 체크해서 보고하면 전문감식반이 나와서 발굴작업을 한다고 설명해주셨다.
아저씨 : 혼자서 산에 다니면 무섭지 않아요? 우리도 2인 1조로 다니다가 혼자 떨어지면 괜히 기분이 이상한데...
나 : 무서울 거 하나도 없어요. 만나는 사람들도 다 좋으시고 산짐승도 없구요.
아저씨 : 그게 아니라... 귀신 나올까봐 안 무서워요?
지금까지 내게 산이 무섭지 않냐고 물어본 사람중에 '귀신'을 들먹인 사람은 아저씨들이 처음이었다. 나는 순간 웃음이 나와서 '쿡' 웃었는데 아저씨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생각해보면 아저씨들은 항상 유해를 찾아아다니는 일을 하는 분들이었다. 그러니 혼령이라든지 인적 없는 곳의 섬뜩한 기운 같은 것을 남들보다 더 강하게 느낄 수 밖에 없으리라. 나는 황급히 웃음을 거두었다.
아저씨 : 사과 하나 줄까요?
나 : 네?
아저씨 : 사과요. 먹는 사과.
나 : 네! 네네!!!
먹을것을 나눠주신다는 말씀에 너무 기뻐서 손뼉을 쳤더니 다른 아저씨도 가방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그럼 내 사과도 가져가요. 가방 무거운데 좀 덜어 가."
정말이지 행복했다. 4박5일의 박배낭에 절대로 챙길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신선한 과일이었다. 내가 마치 산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자 아저씨들은 먹다 남은 과자까지 다 내 가방으로 옮겨주셨다. 백두대간 며칠만에 나는 먹다 남은 과자도 기쁜 마음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너무나 감사해서 아저씨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아저씨들은 쑥쓰러워 하시며 카메라를 피해 멀찍이 달아나셨다.
"아저씨! 그럼 뒷모습만이라도!!"
애원했더니 그제서야 카메라 앞에 서시는 두 분. ㅎㅎㅎㅎ 뒷모습에서도 쑥쓰러움이 그대로 묻어났다. 사진을 블로그에 올려도 괜찮은지 여쭈니 뒷모습은 괜찮다고 하신다. 하지만 앞모습은 절대 안된다며 다시 한번 쑥쓰러운 미소를 지어보이셨다.
아저씨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헤어졌다. 구룡령에 닿기 직전의 내리막은 계단이 형성되어 걷기도 편하고 단풍도 예뻤다. 가을 낙엽 사이에 숨어있던 뱀을 용케 피해 구룡령으로 내려섰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22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왕승골안부 비박 (강원도 인제와 양양의 경계) - 갈전곡봉 - 구룡령 (강원도 인제와 양양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0월 12일 / 수요일
내일 수요일은 쉬고
목요일에 다시 찾아뵐게요~ ^^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