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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Sep 22. 2020

내 발처럼만 살자

발로 쓴 내 발 보고서

맨 발톱 드러내는 여자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페디큐어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었고, 역사가 한 번 크게 휙 꺾이는 순간이었다. 이제 우리는 옷을 코디하고 머리를 다듬고 얼굴에 화장을 하는 것으로 모자라 열 개의 발톱도 단정하게 색칠할 수 있는 것이다. 단단한 발톱의 표면에 알알이 작은 보석을 붙이는 사람들도 하나 둘 생겼다.


그건 이 시대의 귀차니스트인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 너머의 일이었다. 나는 시대의 조류를 조용히 무시하기로 했다. 여름에도 샌달끈 사이로 투박한 발등과 맨 발톱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반항했다. 회사 엘리베이터를 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맨 발톱을 드러낸 여자는 쉽게 볼 수 없었다. 물론 남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큼지막한 맨 발톱들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페디큐어의 아름다움, 혹은 즐거움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페디큐어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예전에는 네일샵에 회원비를 납부하며 꾸준히 네일케어를 받았던 때가 있었다. 나는 열 손가락에 오일을 바른 후, 큐티클 푸셔라는 도구로 손톱의 큐티클 거스러미를 긁어내는 작업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관리 도중에 따뜻한 스팀 수건으로 손 마사지를 받는 것도. 손톱을 예쁘게 꾸미는 것보다 나는 누군가가 내 두 손에 정성을 다해주는 그 시간들이 정말 좋았다. 천성이 모험적이지는 못한 편이라 손톱은 늘 얌전한 베이지나 연한 벚꽃색으로만 칠했다.


그때가 십 년 전인데, (우리 동네에서) 페디큐어는 아직 흔하지 않을 때였다. 네일샵에 가면 작은 검정색 쿠션 위에 두 손을 맡긴 사람들은 있었어도 샵 안쪽 구석에 있는 '미용실 머리 감는 의자처럼 보여 왠지 앉으면 혼자 뻘쭘해질 것 같은 거대한 페디큐어 의자'는 늘 비어있었다.


내가 네일샵에 회원권을 연장하지 않기로 한 것은 단순히 돈 때문이다. 네일케어를 받지 않기로 결정하고 몇 년 후 이번에는 페디큐어까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페디큐어를 단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이유도 같았다. 네일케어보다 페디큐어가 조금 더 비쌌기 때문이다. 손톱이나 발톱 같은 건, 다 합해서 내 몸에서 무려 스무 개나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비중이 큰 편이지만, 내 지갑의 우선 순위에서는 밀리다 못해 탈락해 버렸다. 그건 야구 모자를 모으는 대신 티셔츠를 모으고, 향수를 사는 대신 연필을 수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돈으로 할 수 있는 수백 수천가지 중에서 내가 더 좋아하는 걸 선택한 결과였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왼쪽과 오른쪽이 크기가 다르고,
발볼이 매우 넓은 나의 두 발


아마 세상에서 가장 비싼 페디큐어를 받았다 하더라도, 내 발은 여전히 못생겼을 것이다. 나의 발크기는 225mm으로 작은 편에 속하지만, 발볼은 무지 넓다. 내가 이십대 초중반이었을 때, 나는 여자가 발볼이 좁아야 이쁘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으로 맞춤 구두를 주문할 때 '발 볼 넓힘'을 체크하는 게 괜히 자존심 상하다고 생각해서 그냥 체크하지 않은 채 주문한 적도 있었다. 도착한 구두는 나에게 너무 작았고, 처음 신었던 날 양쪽 발 뒷꿈치의 피부가 다 까졌다.


나의 오른쪽 발은 발등이 부은 듯 살짝 올라와 있는데, 14년 전 대학교 2학년 때 술 마시다가 무거운 물체에 발을 거하게 찧고 새벽 두시에 응급실에 실려간 날 이후로 원상복귀가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걷거나 뛰거나 심지어 격한 브레이크 댄스를 추더라도 (나는 춤을 전혀 못 추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아주 건강한 발이다.


그렇다고 내가 내 발을 못생겼다는 이유로 하염없이 방치해두는 건 아니다. 나는 집 밖에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발 전용 거품 비누와 도돌도돌한 실리콘 발매트로 발을 깨끗하게 씼어준다. 모양이 못나고 모나긴 하지만 발톱도 제때에 깎아주고 있다. 발 뒷꿈치에는 각질이 잘 생기는 편이긴 하지만, 그럴 때는 얼굴에 쓰는 수분 크림을 아낌없이 발에 듬뿍 발라주기도 한다. 내 나름대로는 각별하게 관리를 해주고 있다. 그저 발톱 표면에 아무것도 바르지도 붙이지도 않을 뿐이다.


예전에 SBS 일요 예능 <런닝맨>을 보는데, 여자 게스트들이 정체를 숨긴 채 남자 출연자들에게 한 쪽 발만 드러내어 보이는 장면이 있었다. 남자들은 발의 크기, 피부색, 그리고 페디큐어의 취향만 보고 게스트들이 누구인지 맞춰야 했다. 그런데 런닝맨 멤버들은 같은 멤버인 송지효의 발을 보자마자 그걸 또 바로 알아봤다. 송지효가 어두운 색 페디큐어를 즐겨한다는 취향을 정확히 꿰뚫어본 결과였다. 그걸 보면서 나는 서슴없이 자기의 발을 내미는 여자 게스트들이 조금 신기하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하고 그랬다. (물론 그녀들이 연예인이라 머리부터 발 끝까지 관리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내 발을 그렇게 다른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내밀고 그들이 세심하게 관찰하도록 냅둘 수 있었을까 생각해봤는데, 왜인지 그럴 자신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이 글의 제목으로 올린 사진도 진짜 내 발을 찍은 사진이 아니며, unsplash에서 Jan Romero란 분의 사진을 가져왔음을 고백한다.)


런닝맨 멤버들이 보자마자 맞춘 송지효의 발


분명한 건, 내 남편은 내 발만 보고 단번에 나를 알아맞출 수 있을 거란 사실이다. 워낙에 크고 거칠고 투박한 것으로 개성이 강한 발이니까. 오른쪽 발등만 튀어나온 정체성 뚜렷한 발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내 마음에 아주 쏙 드는 발이다.


그러고보면 내가 살아가고 싶은 모양과 내 발이 서로 쏙 닮았다.


- 한 번도 페디큐어 받아본 경험 없는 = 남들 다 한다고 무작정 따라하지 않고

- 매일 깨끗이 씻고 제때 발톱도 깎고 = 청결하고 단정하게 스스로를 꾸준하게 관리하고

- 제멋대로 막 생겼어도 제 기능 잘 하고 = 비록 어설퍼 보일지언정 내 역할 충분히 하고

- 오른쪽 왼쪽 짝짝이라 누가 봐도 내 발임을 알 수 있는 = 누가 봐도 나 다운 모습으로



그렇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내 발처럼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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