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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Oct 08. 2020

자기만의 방을 위해 남편에게 거실을 내줬다

오래동안 읽고 쓰는 삶을 위해선 독립된 공간이 필요하다

읽고 쓰는 사람에겐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림을 그리고 메모를 기록하는 사람에게도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작업하는 모든 사람과 사유하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만의 공간은 꼭 필요하다.


소설 『영혼의 집』을 쓴 페루의 작가 이사벨 아옌데의 모든 책은 '카시타 Casita'라고 이름 붙인 공간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이곳은 그녀가 예전에 살던 캘리포니아 저택의 수영장에 붙어 있는 집이다. 이곳에는 늘 싱싱한 장미꽃이 피어 있다. 남편은 장미 알레르기가 있으면서도 매일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다준다. 밝은 색 목재로 만든 카시타는 그녀에게 성스러운 장소이자 도피처다. 어설프고 볼품없는 둥근 테이블 옆에는 오래된 지구의가 세워져 있고 옆에는 책들이 쌓여있다. 서가에는 액자에 끼워진 사진들이 놓여 있다. (p230, 『글 쓰는 여자의 공간』 - 타니아 슐리, 이봄 출발사)" 수영장이 있고, 장미꽃이 피어 있는 별채를 독차지하고 글을 쓸 수 있다니! 이 작가는 전생에 얼마나 많은 덕을 쌓았길래 이런 복을 받았을까.


이사벨 아옌데가 글을 쓴 수영장 옆 별채


여성이 최소한의 행복과 자유를 누리려면 연간 500파운드의 고정 수입(요즘 물가로 환산하면 연간 4천만 원 수준이라고 한다)과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한 버지니아 울프에게도 알고 보면 방이 아니라 별도의 집필 공간이 따로 있었다. 영국 남부 해안에 남편과 함께 사 들인 집 정원에 있는 낡은 헛간을 개조하여 오두막 집필실을 만든 것이다. 이 오두막에는 창문이 여러 개가 나있어, 버지니아 울프는 보고 싶은 풍경에 따라 책상 위치를 자주 변경했다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오두막 집필실


아무래도 이건 다 남의 나라 이야기다. 서울에 살면서 주거 공간 외에 집필실을 따로 두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정말 잘 나가는 작가이거나 돈이 아주 많으면 모를까. 매일 회사로 출퇴근하면서 퇴근 후에 책을 읽고 글을 쓸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대뜸 남편에게 아주아주 작은 원룸이라도 하나 계약하겠다고 말한다면, 음. 내가 남편한테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편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바꿔서 생각해보면 확실히 와 닿는다. 참 이 사람 지금 생각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싶어 한숨부터 나올 것이다.


솔직히 지금 나에게 작업실은 지나친 욕심인 건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불평할 필요는 전혀 없다. 나에게는 이미 자기만의 방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의 서재방이 바로 그곳이다. 이 작은 방의 한쪽 벽에는 세로 여섯 칸짜리 이케아 책장이 세 개 놓여 있는데 (총 18칸), 그중 17칸이 전부 내 책이다. 딱 한 칸만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만화책 킹덤을 위해 양보해줬다. 책장의 반대쪽 벽에는 책상과 서랍이 있고, 책상 옆에는 미닫이 창문이 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래 봤자 맞은편 아파트 건물뿐이긴 하지만, 겨울이 아닌 계절에 창문을 살짝 열어두면 오른쪽 볼에 시원한 바람이 닿는다. 이 곳에서 나는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글도 쓰고 있다.


이 방의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거실과 바로 붙어 있는 방이라는 점이다. 이 방과 거실을 구분 지어 주는 벽의 맞은편에 우리 집 벽걸이 TV가 설치되어 있어, 남편이 TV를 틀어놓으면 소리가 서재방까지 전해진다. 이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는 에어팟을 꽂고 유튜브에서 각종 '도서관 ASMR', '카페 ASMR' 음악을 틀어놓은 채 책을 읽는 여유를 익혔다. 덕분에 서재방은 때에 따라 파리의 카페가 되기도, 호그와트의 슬리데린 기숙사가 되기도, 바닷가를 마주한 도서관이 되기도 한다.


남편이 필요한 모든 걸 거실에,
그리고 나는 방 한개를 독차지


따로 남편 출입 금지라고 지정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어쩌다 보니 서재는 나 혼자 사용하는 방이 되어 버렸다. 방 하나를 독차지할 수 있었던 비법은 간단하다. TV가 있는 거실을 남편에게 내어준 덕분이다. 거실 소파 앞에는 신혼 때 원룸에서 쓰던 여분의 매트리스를 깔아 두었다. 남편은 소파와 매트리스를 골고루 사용하며 TV도 보고 스마트폰도 하고 닌텐도 스위치로 게임도 한다. 주말에는 핸드폰을 충전한 채 매트리스에 누워 이불을 덮고 낮잠을 자기도 한다. 그러다 밥을 먹을 땐, 옆에 교자상을 펼치고 방석을 두 개 깔고 나와 함께 식사를 한다. 거실에서는 남편이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남편과 집에 있으면서도 내가 원할 때는 거실에 나가서 같이 놀고, 또 필요할 때는 서재방에 가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일. 어쩌면 우리가 아직 아이가 없는 부부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달콤한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그걸 깨닫는 순간 조금 염려가 됐다. 나중에 서재방을 아이에게 내주고 나면 나는 어디서 휴식을 취하지? 언제가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미리미리 계획을 세워둬야 한다. 마음 같아선 방이 하나 더 있는 더 큰 평수의 집으로 이사 가고 싶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나는 몇 년 후가 될지 모를 일을 위해 종이에 우리 집 구조도를 그리고 나만의 공간이 들어갈 위치를 구상했다.


내가 원하는 '자기만의 방(공간)'에 필요한 소품은 두 가지이고 조건은 한 가지이다. 첫 번째 소품은 역시 책상이고, 두 번째 소품은 책장이다. 우리 집의 모든 책이 다 책상 옆에 꽂혀 있을 필요는 없으니 최소 열 권 정도만 근처에 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낮은 1단 책장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기만의 방(공간)'에는 필수 조건이 있다. 다른 공간과 어떻게든 분리되어 있을 것! 내가 책을 읽을 때 앞으로 남편이나 아이(들)가 훅훅 지나다니는 게 시야에 잡히지 않아야 하고, 내가 글을 쓸 때 나도 모르게 누가 내 뒤에 와서 글을 훔쳐보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집의 구조 안에서의 최선은, 남편에게 내어준 거실을 내가 장악하는 것이다. TV와 함께 남편의 생활공간을 모두 안방으로 옮기고, 거실 한쪽(우리 집은 확장형 구조이지만 원래는 테라스가 있던 자리다)에 칸막이 역할의 책장을 설치해서 어떻게든 공간을 분리해야 한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인테리어는 그때 가서 더 구체적으로 고민해봐도 되는 거니까. 중요한 건,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점이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공간 안에서 나는 비로소 생각에 침잠할 수 있고 지식의 지평선을 확장해나갈 수도 있으니까.


책과 책상만 있다면, 공간은 아무리 작아도 괜찮아. (출처 : unsplash)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는 건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관한 문제다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 이건 단순히 가족 간의 영역 구분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의 방식에 직결되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책을 읽고, 읽은 걸 되짚고 소화해, 마침내 나의 글로 재생산하는 삶을 지속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최적의 생활환경을 다듬어가는 일인 것이다.


그나저나 이 글은 어쩌다가 자기만의 수영장 옆 별채로 시작해서 자기만의 방을 이야기하다가 자기만의 공간으로 점점 크기가 작아지며 끝맺게 되었을까. 뭐, 자기만의 공간에 크기가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결국 버지니아 울프도, 일 년 동안 필요한 돈은 연간 500 파운드라고 금액까지 구체적으로 정해뒀으면서 자기만의 방이 최소 몇 평 이상이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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