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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Oct 18. 2020

운에 맡긴 시험이 끝나고

10/17일 HSK 6급 시험 후기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시작이 좋았다. 이를 테면 시험 당일날 아침 :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는데 밤새 누가 소나무향 샴푸로 머리를 감겨주기라도 한 듯 정신이 맑았다. 벼락치기 공부를 한다고 지난 일주일 넘게 새벽 두 시 넘어 잠들고 아침 열 시에 일어나는 루틴의 반복이었는데, 새벽 일곱 시에 이렇게 상쾌하게 잠에서 깰 수도 있다니?


두 번째 운은 시험 센터에 도착한 후 고사장에 입실했을 때 찾아왔다. 고사장 문 밖에 적힌 수험생 이름들 중에는 내 이름이 가장 마지막 순번으로 적혀 있었다. 10번. 지정 좌석제였고, 내 번호는 강의실 맨 뒤 구석이었다. 맨 뒷 줄에는 나밖에 없었다. 괜히 주위 신경 쓸 일 없이 마음 편히 시험에 임할 수 있을 터였다.


자리에 앉아서 시험 시작을 기다렸다. 인터넷을 통해 시간이 관리되는, 전국의 6급 수험생이 똑같은 시간에 시험을 시작하고 끝내는 컴퓨터 기반 IBT 시험이었다. 입실하면서 핸드폰도 가방도, 막판 벼락치기를 위해 가져온 주요 단어 노트도 반납한 상태였기에, 멍하니 컴퓨터 앞에 앉아 대기했다. 모니터 화면에는 시험 시작 시간인 9시 반까지 초 단위로 카운트다운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3, 2, 1.


나의 운은 여기까지였다.


35분가량 진행되는 듣기 평가. 어려웠다. 찍었다. 50분 동안 진행되는 독해. 시간이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다행히 종료 5분 전에 8문제를 C로 찍어둘 정도의 정신은 남아 있었다. 시험 전 날 유튜브에서 본 어느 영상에서 HSK는 C가 많이 나오니 모르면 무조건 C라고 찍어두라고 했었다. 같은 영상에서 강사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시험을 보다가 듣기가 잘 안 들린다, 그러면 남들도 다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세요.

포기하면 안 돼요!

그리고 독해 넘어갔는데, 아 독해도 만만치 않다 그러면 이번 시험은 독해도 어렵게 나왔나 보다 하고

절대 포기하면 안 됩니다. 쓰기가 있으니까.

그런데 쓰기 문제를 받았는데, 쓰기도 어렵다라고 하면

그때 포기하십시오.

그때 깔끔하게 포기하고
시험 끝나고 바로 뭘 먹을까 하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중국어路] HSK 시험장에서 이대로만 따라 하면 HSK 6급 점수가 확 올라갑니다 - YouTube)


고작 하루 전 무료 영상을 본 게 다이지만, 나는 이 분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착한 학생이 되기로 했다. 그래서 듣기 평가가 잘 안 들렸음에도, 남들도 다 안 들릴 거라 생각하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독해가 정말이지 만만치 않았지만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쓰기 평가. 세상에. 정말 이렇게 어려울 일이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건데? (너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단다.)


쓰기 평가의 문제는 우선 1,000자의 지문을 보여준 후, 정확히 10분 뒤에 지문을 회수하는 걸로 시작된다(종이 시험에서는 시험지를 걷어가고, IBT 컴퓨터 시험에는 자동으로 지문이 사라지고 하얀 백지가 나타나는 방식이다.) 그 후 35분 동안 수험생들은 지문 내용을 기억해서 400자가량으로 요약해서 옮겨 적어야 한다. 하얀 백지라고 하면 나는 이제 도가 다 텄다. 내가 브런치에서 글을 쓴 것만으로도 얼만데, 흰 백지 앞에서 얼어버리고 첫 문장만 썼다 지웠다 하는 건 이제 옛날이야기다(과연). 자신 있게 첫 번째 문장을 적으려는 차였다.


어라? 수험장의 중국어 입력 방식이 집 노트북에서 하던 방식과 다르다. 분명히 같은 프로그램인데, 세부 UX가 사뭇 다르다. 어서 손필기 입력기를 열어 주인공 이름을 옮겨 적어야 하는데, 방법을 몰라 3분 간을 혼자 헤매다가 결국 손을 들었다. 감독관이 자리로 와서 입력기를 열어주었을 땐, 이미 패닉으로 주인공의 이름과 외워 두었던 주요 표현들이 모두 내 머릿속에서부터 저기 멀리멀리로 도망간 상태였다.


"그런데 쓰기 문제를 받았는데, 쓰기도 어렵다라고 하면

그때 포기하십시오.

그때 깔끔하게 포기하고
시험 끝나고 바로 뭘 먹을까 하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때 깔끔하게 포기하고
시험 끝나고 바로 뭘 먹을까 하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주 잠시 끝나고 뭘 먹을까 고민한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쓸 수 있는 걸 쓰고 나왔다. 그나마 기억나는 몇 가지 단서들을 겨우 겨우 끄집어내 없는 실력으로 380자를 채웠다. 주인공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그는"으로 시작되는 한 사람의 <해양 쓰레기 제거 프로젝트> 성공 일화였다.


시험이 끝난 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자주 들르는 중국어 커뮤니티 카페에 접속했다. 방금 치렀던 시험 난이도가 역대급으로 어려웠다는 후기가 하나둘씩 올라오고 있었다. 유튜브의 강사님이 결국 맞는 말을 했다. 나에게 어려웠던 만큼 남들에게도 어려웠단다. 시험이 끝나고 먼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 것도, '해양 쓰레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 것도 나만이 아니었단다.


나는 집에 도착해서도 몇 시간이고 핸드폰을 붙들고 카페 새 글을 확인하며 6급 후기들을 모조리 읽었다. 나보다 못 본듯한 사람도, 잘 본 듯한 사람도 있었다. 남편은 이미 끝난 시험 지금 다시 봐서 뭘 하냐고, 어차피 시험 잘 본 사람들은 카페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며 뼈를 때렸다.


나는 듣기 독해 쓰기 모조리 망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니 참 대견하다. 이제 나의 합격 여부는, 내가 찍은 8개의 C 중에서 몇 개나 맞았는지에 달려있다. 참고로 시험이 끝나고 나는 남편과 족발 + 짜파게티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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