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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Oct 26. 2020

아빠, 나랑 같이 공부하자

아빠와 나의 교집합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제 막 말문이 트인 아기에게 라면 몰라도 서른다섯 살에게 이 질문을 물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에 혼자 답하자면, 나는 엄마와 아빠가 똑같이 좋다. 그러나 조금 더 빠릿빠릿하고 똑똑하고 집안의 분위기를 휘어잡는 엄마의 성격을 나의 남동생이 똑 닮았다면, 늘 헤실헤실 웃고 엄마 말은 무조건 따르는 느린 곰 같은 아빠의 성격을 내가 쏙 닮았기에, 나는 성장하면서 늘 아빠 편에 서고는 했다. (그렇지만 아빠는 무조건 자식들이 아닌 엄마 편을 들었지.)


그렇지만 내가 결혼하고 따로 나와 살게 된 날 이후로, 나는 언젠가부터 엄마와 아빠에게 아주 공평하게 분배된 사랑과는 다르게 아주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꼭 엄마에게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 친정집에 두고 온 여름 재킷이 필요해졌을 때, "여보세요. 엄마, 나 회색 여름 재킷 집에 있는지 한 번 봐줄 수 있어? 다음에 집에 갈 때 가져오게 따로 좀 챙겨놔 줘."

- 남동생이 연락이 안 될 때, "엄마, 동생 지금 집에 있어? 방에 있는데 왜 내 카톡을 안 보지. 내 카톡 지금 바로 확인해달라고 좀 전해줘."

- 남편과 친정집으로 함께 출발할 때, "엄마, 우리 지금 출발했어. 50분 있으면 도착!"


내가 시험관 시술을 시작하며 마음이 힘들 때도, 답답해서 하루 서울 바깥으로 나가 드라이브를 하고 싶을 때도, 아주 작고 시시한 고민이 생길 때도 나는 늘 엄마만 찾았다. 그리고 내 삶에서 아빠라는 존재는 비중은 활동이 뜸한 가족 단톡방에 간간히 올라오는 아빠의 'ㅎㅎ' '그래' 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미세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나보다 먼저 중국어 공부를 시작한 건 아빠였다. 2년 전 아빠가 중국어 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우리 가족은 모두 두 팔 벌려 열렬히 환영했다. 아빠에게 드디어 하루를 지탱해줄 목적이 하나 생겼구나, 하는 마음에서.


아빠는 한 때는 잘 나가는 대기업의 중국 주재원이었다가, 중소기업의 임원이었다가, 직접 차린 작은 사업체의 대표였지만 서브프라임의 환율 폭격을 맞아 결국 빚만 잔뜩 남긴 백수가 되기도 했다. 그 후 아빠는 3개월 만에 공인 중개사 시험을 합격했다. 내가 학생 때 공부 안 하고 거실에 나와서 TV 보려고 하면 아빠는 늘 '아빠는 학생 때 공부 진짜 열심히 했어'라며 한 마디 하곤 했는데, 당시의 나는 이 말을 한 귀로 흘려 들었다. 한참 후에 아빠가 공인 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느라 매일 새벽 2-3시까지 공부하는 걸 보고 나서야 겨우 아빠가 나에게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아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월세 30-40만 원짜리 매물이 전부인 작은 동네에 차린 아빠의 공인중개사 사무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빠는 또다시 집 안방과 거실 사이에서 하릴없이 맴돌았다. 아빠에겐 시간이 느리게 갔다. 하루가 일주일처럼, 한 달이 일 년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중에 마침내 아빠가 방송통신대학교 중국어과에 들어가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드디어 아빠에게 목적이 생겼고, 루틴이 생겼다. 인터넷으로 수업을 듣고, 방통대 동기들과 스터디를 하고, 중국어 교재를 사서 공부를 하다 보면 하루라는 시간이 딱 하루만큼만 흘렀다.


우리 아빠의 중국어는 아주 오랫동안 나의 자랑이었다


아빠가 중국어를 공부한다는 사실은 나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아빠의 중국어는 나에게 자랑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아빠는 삼성 계열사의 중국 주재원이었고, 우리 가족은 5년 동안 중국에 함께 살았다. 어릴 적의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하루는 아빠의 책상 위에서 업무 서류를 본 적이 있었다. 빼곡히 한자로 가득했던 계약서. 당시 나도 국제학교에서 중국어 수업을 받았기에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았지만, 업무 용어로 가득 찬 문서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거의 없었다. 나는 아빠에게 이 서류로 뭘 하느냐고 물었고, 아빠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줬지만 나는 그중에서 '중국어로 된 서류를 우선 영어로 다시 쓴다'라고 한 부분만 기억한다.


나는 그 일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어 보였다. 이렇게 어려운 중국어를 영어로 다시 쓸 수 있다니, 우리 아빠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잖아? 그래서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중문과에 들어가서까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이 얘기를 늘어놓았다. 누군가 나에게 중국어를 처음 배웠던 곳, 중국에서 살았을 때의 기억, 주재원 자녀로서의 경험을 물어볼 때마다 나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로 아빠 얘기를 했다. 우리 아빠는 말이에요. 중국어 비즈니스 서류를 검토하고 영어로 계약을 협상하는 사람이었어요. 사실은 아빠가 중국 주재원으로서의 근무 기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도, 더 이상 중국어를 하지 않게 된 것도 이제 20년도 지난 일이었지만 말이다.


모처럼 활기를 되찾은 아빠의 일상은 나에게도 적지 않은 자극을 줬다. 대학교 때 중문과를 전공하고 상하이에 어학연수까지 다녀오면서 아빠보다 더 최근까지 중국어를 공부한 나였지만, 역시나 회사에 입사한 후 10년 동안 단 한 마디도 써먹지 못했다. 아빠와 함께 중국어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근질근질했다. 그리고 올해 여름, 나는 회사에 난임 휴직을 신청했고 드디어 아빠를 뒤따라 본격적인 중국어 공부에 합류했다.


아빠, 나도 아빠 따라서 중국어 공부할래!


요새는 시시 때때로 아빠와 연락을 주고받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HSK 시험을 망했다고 하소연하고(아빠는 9월 HSK 5급 시험을 치른 후 분명히 망했다고 했었는데 성적 발표일인 오늘 아침, 합격 성적표를 사진으로 찍어 나에게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IBT 시험과 PBT 시험의 장단점을 함께 논한다 (나는 IBT파, 아빠는 PBT파다.) 오늘부터 아빠는 내가 준비하고 있는 HSK 6급 시험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젠 정말 같은 책으로 같은 시험을 준비하며, 같은 날짜에 시험을 보게 될 것이다. 아까도 잠시 통화를 했는데, 아빠는 본격적으로 나와의 경쟁의식을 불태우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내가 엄마에게 하는 것처럼 일상적이고 시시콜콜한 수다를 아빠에게 털어놓는 건 여전히 어색하다. 그래도 아빠에게는 이제, 보고 싶은 딸에게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핑곗거리가 생겼다. 나에게도 또한 아무 때나 아빠에게 전화해서 안부를 물을 수 있는 구실이 생겼고. 서먹해진 부녀 사이에 어느새 다정한 교집합이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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