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드 프렌즈 대본집으로 영어 공부하지 않는 이유
네 달째, 매일 하루에 삼사십 분씩 영어 원서를 소리 내어 읽고 있다. 처음에는 독서의 연장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한국어로 된 책을 읽는 것보다 오래 걸리고 피곤하더라도, 가끔씩 영어로도 좋은 책을 찾아 읽다 버릇하면 어떻게든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다.
영어 공부를 하듯이 모르는 단어, 표현 다 찾아서 노트에 정리해가며 읽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렇게 단순히 책을 낭독하기만 하는 것이 나의 영어 실력에 큰 도움이 될 거란 기대도 없었다. 그저 하루 종일 집에 머무는 휴직자로서, 하루에 삼십 분씩 책을 읽으며 영어 발음을 연습하는 게 재미있었다.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아 쿠션 위로 책을 들고, 누군가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이게 뭐 별거라고 읽을수록 낭독 실력이 느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긴 문장도 의미 단위로 끊어 읽게 되고, 큰 따옴표 안에 대화가 등장하면 중요한 단어에 강조를 넣고 그렇지 않은 전치사는 자연스럽게 흐려가며 읽게 된다. 따로 단어 공부해가면서까지 읽을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사전을 찾아보고야 마는 단어들을 만나게 되었다. 분명히 예전에 봤던 거 같은데, 언젠가 공부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안나는 단어를 마주했을 때 그랬다. 그런 단어들은 한 번 검색해보기만 해도 복습하는 셈이 되니, 확실히 머리에 더 잘 새겨지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몇 권의 책을 읽으며 나름의 시행착오를 거친 결과, 나는 '회화 실력을 키워주는 낭독용 원서 책'은 따로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평소에는 취미로 고전 소설을 읽기도, 양자 역학이나 동서양 철학 책을 읽기도 하지만, 영어 낭독을 위한 책은 전혀 다른 기준으로 선정해야 했다. 특히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내어 완독 하기 위해선 한 달에서 두세 달 동안 단 한 권을 붙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책을 골랐다.
내가 책을 고를 때 고려하는 사항에는 세 가지가 있다.
모든 외국어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목표를 구체적으로 세우는 것이다. 미국에 여행 가기 전에 벼락치기로 영어를 연습하는 거라면 여행 회화책으로 공부하는 것이 제일 좋고, 외국인 바이어와 업무 통화를 위해 공부하는 거라면 비즈니스 영어책으로 공부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건 꽤 당연한 말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목적에 맞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가 실제론 인터넷 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영어 공부 팁'들, 유튜브의 '영어 교재 추천'의 영상들, 대형 서점 내 진열되어 있는'영어 회화 교재' 등의 무수한 추천 리스트들에 가려 종종 잊히곤 한다.
예를 들어 미드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프렌즈 <Friends>의 대본집이 있다고 하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영어 공부를 할 때 프렌즈를 참고하라고 추천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이 책을 낭독하지 않을 것이다. 프렌즈는 미국인 친구 여섯 명의 우정, 연애, 사랑과 같은 일상적이고 유머러스한 일화들을 담은 드라마이고, 주로 그들의 집 거실, 혹은 단골 카페가 드라마의 배경이 된다. 그런데 나의 경우, 미국에 가서 살게 될 일도 아마 없을 것이고, 미국인들과 친구를 맺고 농담을 주고받고 함께 요리를 하며 우정과 사랑을 논할 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내가 영어를 쓴다면 아마도 회사에서, 업무적으로 쓸 일이 많을 것이다. 물론 본론부터 비즈니스로 들어가 서비스를 소개하고, 계약의 주요 사항들을 논하고, 메일 언제 보내줄 거냐 재촉하기도 하고 최종 기획서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고 떼를 쓰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업무 외의 자리에서 유창하게 스몰토크를 하는 나를 상상한다. 구체적으로는 해외 출장을 가서 미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파트너와 식당으로 이동해서 가볍게 IT/미디어 산업계 트렌드를 논하고 인공 지능이 초래할 미래에 대해 대한 흥미로운 의견들을 주고받는 장면을 상상한다.
나는 콘텐츠/미디어 업계에서 근무를 하고 있고, 가장 먼저 낭독한 책은 디즈니의 전 CEO인 밥 아이거의 자서전 <디즈니만이 하는 것>의 원서, <The Ride of a Lifetime>이었다.
당연한 이야기 또 하나, 우리는 모두 1인칭으로 말을 한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의 중심은 일차적으로 '나'에게 있다. 그렇기에 책을 낭독할 때 '나'의 관점에서 서술한 책을 읽으면 모든 문장이 회화 연습으로 직결된다.
다음은 내가 보유하고 있는 두 권의 영어 소설의 첫 문장이다.
She stands up in the garden where she has been working and looks into the distance.
<The English Patient - Machael Ondaatje>
My name is Kathy H. I'm thirty-one years old, and I've been a carer now for over eleven years. <Never let me go - Kazuo Ishiguro>
책 한 권을 전부 소리 내어 읽었을 때, 두 번째 책이 회화 연습에 훨씬 더 도움되지 않을까? 참고로 두 번째 책인 <Never let me go>는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의 원서다. 문학성 재미 감동 모두 갖추고 있어서 정말 나의 마음을 다해 강력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다.
1인칭으로 서술된 책으로는 소설도 있지만 자서전도 있다. 가장 좋은 건 나의 '롤모델'의 자서전을 읽는 거다. 내가 일하는 업계의 CEO가 될 수도 있고, 작가나 예술가, 혹은 연예인일 수도 있다. 만약 나의 직업에 딱 맞는 롤모델을 찾지 못한다면, 미셸 오바마 <Becoming>, 멜린다 게이츠 <The moment of Lift>처럼 꽤 보편적인(?) 유명인의 삶을 다룬 책을 읽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원래 나는 자서전류를 즐겨 읽지 않았는데('사람마다 다 사는 방식이 다른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성공담을 읽어서 뭐해?'라고 생각하는 편), 자기의 경험에 대해 줄줄이 읊어주는 문장들이 의외로 회화 연습에는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다.
- 동시대의 이야기가 아닌 소설들 : 나는 1700년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니 굳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문장들로 회화를 연습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웬만한 고전 소설들은 모두 아웃이다.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도 단순히 독서로 읽기에는 무척 흥미진진한 소설들이지만, 내가 호그와트에 입학해서 마법을 배우지 않는 이상 해리포터와 헤르미온느의 대화를 소리 내어 연습하는 건 나에게 크게 의미 없을 것이다.
- 전문 용어들이 등장하는 책들 : 요즘 틈틈이 앤디 위어의 <마션>을 원서로 읽고 있는데, 이 책은 낭독으로 읽지는 않고 있다. 화성에 고립된 우주인이 -생존하기 위해 기지를 고치고 수소와 산소로 물을 만들고 감자를 재배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과학적 용어들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 (오늘 막 읽기 시작한 페이지의 문장 : I turned a rover charging cable into a drill power source. 지금 주인공은 화성의 이동 수단을 개조하고 있다)
- 문학적으로 문장이 아주 유려한 소설들 : 아래는 위에서도 언급한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첫 몇 페이지에서 내가 모르는 단어들만 찾아 정리한 목록이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라 불리는 맨부커 상의 역대 50년 수상작 중에서 최고의 단 한 권, 황금 맨부커상으로 뽑힌 소설이다. 문학적 가치는 압도적으로 높지만, 이런 단어들을 내가 실생활에서 쓸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bowers : 나무 그늘 / shin : 정강이 / foliage 나뭇잎 / penitent : 뉘우치는. 참회하는 / loggia : 한쪽 또는 그 이상의 면이 트여 있는 방이나 복도 / yoke: 명에, 굴레 / supine : 반듯이 누운 / gait : 걸음걸이 / burnoose : 두건 달린 겉옷 / palanquin : 1인승 가마 /anoint : (종교 의식에서 머리에) 성유를 바르다
내가 실제로 회화를 하게 될 상황에 맞춰 목적에 맞는 책을 고르는 것, 이왕이면 1인칭 화자로 서술되어 있는 책을 고르는 것, 그리고 너무 전문적인 용어나 문학적인 표현들이 있는 소설을 피하는 것 - 이 세 가지 조건들에만 주의하면 막상 책을 고르는 작업은 무척 간단하다. 책은 한국어 번역본을 기준으로 알아보면 된다.
영어 낭독책을 고를 때 나는 아마존 (킨들 스토어), goodreads 같은 미국 사이트는 전혀 참고하지 않는다. 대신 교보문고에 간다. 경영 경제나 해외 소설 베스트셀러 매대를 둘러보고 읽고 싶은 책이 있는지, 저자가 외국인인지 확인한다. 그리고 인터넷 서점이나 인스타그램에서 책을 (한국어 제목으로!) 검색해서 (한국 사람들의!) 리뷰를 찾아본 뒤 괜찮다는 확신이 들면, 그제야 책의 원 제목을 확인하고 원서의 주문 버튼을 누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