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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Oct 21. 2020

외국어로 글을 잘 쓰고 싶다면

HSK 6급 문제 유형으로 보는 외국어 글쓰기 공부 방법

지난주에 본 중국어 자격증 HSK 6급 시험은 쓰기 영역 때문에 망했다. 완전 망했다. 원래도 가장 자신 없는 영역이었고, 이번 시험 난이도가 유난히 높았으며, 그 와중에 나는 컴퓨터로 중국어를 입력하는 방법에서 한참 헤매느라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원수 같은 쓰기 영역..., 그러나 오늘의 글에서는 잠시 내 개인적인 감정을 내려두고 HSK 6급 쓰기 영역 찬양을 해보려고 한다.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혹은 다른 어떤 언어로 글을 쓰든간에 - 외국어 쓰기 실력을 향상하는 데 있어 'HSK 6급 쓰기 영역'에서 쓰는 방법이 꽤 괜찮다는 걸 나만 알고 있기에는 조금 아까운 것 같으니 말이다.



외국어 작문 실력을 키우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매일 외국어로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마침 카카오 프로젝트 100 베타 서비스에서 '외국어로 매일 세 줄의 일기 쓰기' 모임을 모집 중이었다. 매일 인증에 성공하면 환급받을 수 있다는 만 원을 결제하고 이 정도는 꼭 환급받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으로 참여 신청했다. 첫 번째 날은 영어, 둘째 날은 중국어, 그다음 날은 스페인어, 넷째 날은 다시 영어 - 이렇게 매일 다른 언어로 일기를 썼다.


일기를 쓰는 건 결론적으로 내 외국어 실력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특히 중국어, 스페인어의 경우 간단한 단어, 표현도 모르는 것이 많아 단 세 줄을 쓰기 위해 매번 구글 번역, 네이버 사전 등을 검색해야 했다. 그러나 일기 쓰기에는 한계도 분명히 있었다. 나의 일상이 정말이지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기 때문에 매일의 일기가 거기서 거기라는 점 (그래서 가끔은 거짓말로 지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매번 필요한 표현과 단어를 내가 직접 검색해야 한다는 점에서 늘 조금씩 아쉬웠다. 


그러던 중에 나는 준비하던 중국어 자격증 HSK의 목표 급수를 5급에서 6급으로 상향 조정했고, 6급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 HSK는 같은 문제를 주고 몇 개를 맞추는지에 따라 점수를 주는 토익과는 달리, 매 급수마다 시험 문제도 다르고 시험 유형도 다르다. 처음 HSK 6급 쓰기 문제를 접했을 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 이건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풀 수가 없는 문제야. 내 주제에 6급은 무슨. 


그러나 나의 실력이라든가 문제의 체감 난이도 같은 개인적인 문제를 떠나 객관적으로 HSK 6급 쓰기 문제를 대하면 보이는 것이 있다. 이건 중국어 작문뿐만 아니라 어떤 외국어에 적용해도 써먹을 수 있는, 최강의(?) 쓰기 연습 방법이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불쑥 찾아왔던 것이다.


HSK 6급 쓰기 유형의 문제는 이렇게 나온다.


1. 총 시험 시간은 45분, 단 한 개의 문제가 출제된다.

2. 10분 동안 중국어로 1000자 분량의 지문이 제시된다. 수험생은 10분 동안 최대한 이 지문의 내용을 파악하고 스토리라인을 이해해야 하며, 중요한 고유명사(등장인물의 이름, 사자성어, 장소명 등)를 외워야 한다. 이때 별도의 메모는 일절 불가하다.  

3. 10분이 지나면 지문이 사라진다 (종이 기반 PBT 시험에서는 지문지를 회수하며, 컴퓨터 기반 IBT 시험에서는 화면에서 지문이 사라진다.)

4. 수험생은 방금 지문에서 본 내용을 기억해서 원고지 (빈 화면)에 400자 분량으로 옮겨 적어야 하며, 반드시 제일 위에 제목을 직접 지어서 써야 한다. 이때, 수험생은 개인의 의견, 감정, 주장을 절대로 추가해서는 안되며 꼭 지문에서 있던 내용만 그대로 요약해서 써야 한다.



이와 같은 쓰기 문제를 연습하는 방법에는 포인트가 몇 가지 있다.


1. 1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지문을 이해하고 외우기 
     → 집중해서 읽고 그중 중요한 것만 추려 스토리라인을 구성하는 연습


아래는 10분 동안 읽고 외워야 할 지문의 분량이다. (해당 중국어 원문의 한국어 해설도 함께 첨부했다.)

왼쪽 : 10분 동안 읽고 외워야 할 지문 / 오른쪽 : 해설


HSK 6급 고득점을 노리는 실력자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평균적인 수험생들 입장에서 지문의 난이도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 사방이 모르는 단어 투성이다. 한 문장 한 문장 해석해서 읽어야 한다면, 나로선 20분을 통째로 줘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니 포인트는, 이 지문들 중에서 아는 단어들을 연결해서 최대한 빨리 스토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시중 문제집, 인터넷에서 본 합격생들의 꿀팁들을 보면 주어진 10분의 시간 동안 1) 첫 3분은 빠르게 한 번 눈으로 훑으며 스토리라인을 대충 파악하고 2) 4분은 세부 내용을 읽고 3) 나머지 3분은 주인공의 이름 등 주요 고유명사와 스토리 흐름 및 핵심 표현 (가장 중요한 내용은 늘 마지막 문단에 등장한다)을 외우라고 한다. 나는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아무리 해도 3분 안에 눈으로만 훑는 것으로는 스토리를 파악할 수가 없었으므로, 7분 동안 최대한 머릿속으로 스토리라인을 정리해가며 읽고 3분 동안 고유 명사와 주요 표현을 외웠다.


2. 외워둔 내용을 35분 동안 요약해서 쓰기

    → 머릿속으로 기억한 내용을 내가 알고 있는 쉬운 문장으로 풀어쓰기


10분이 지나고 지문이 사라지면 그 자리를 패닉이 채운다. 방금까지 그렇게 절실하게 외워둔 표현들과 문장들 중에서 기억할 수 있는 건 (운이 좋을 경우) 문장 하나, 단어 두세 개 정도뿐이다. 그러나 나는 왜 이렇게 머리가 나쁠까 한숨만 쉬고 있을 수는 없다. 지문이 사라지자마자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그나만 외워둔 핵심 표현들 몇 개와 고유 명사(특히, 주인공의 이름!)를 가장 먼저 적어두는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오로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머릿속으로 외워둔 스토리라인을 최대한 내 어휘량 안에서 다시 풀어내야 한다. 중요한 건, 분량을 채운다고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개인 의견을 덧붙이면 안 된다는 점이다.

요약은 예를 들면 이렇게 진행된다.



원문 : 그가 성장하는 기쁨에 빠져있을 무렵, 어느 날 저녁에 주민 위원회의 아주머니가 몹시 화를 내며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이웃들의 분노를 드러내기 위해 그 아주머니는 인정사정없이 말했다. "너는 다시는 피아노를 치지 말아라. 네 피아노 소리는 아주 끔찍하고 시끄러워서 다들 쉴 수가 없구나. 너는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니? 베토벤? 그 마음은 일찌감치 접으렴.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는 몇 명이나 정말로 유명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모범 답안 (60 점용) :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그가 피아노를 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휴식을 방해한다고 말했고, 또 그가 유명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비웃었다.

(※지문 출처 : <해커스 HSK 6급 한 권으로 고득점 달성>)



3. 쓴 글에 대한 피드백

    → 내가 쓴 글에 내가 피드백 하기

주어진 35분이 지나면 시험은 종료된다. 만약 실제 시험이었다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미련은 버리고 쿨하게 고시장에서 나와 맛있는 걸 먹으러 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실제 시험이 아니라 연습 문제로 풀었다면, 35분 동안 써둔 문장들에 대한 피드백이 필요하다. 가장 좋은 방법 1:1 첨삭을 받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돈이 든다. 


가장 좋은 방법(1:1 첨삭)이 부담된다면(내가 그랬다), 가장 편한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 바로 모범 답안을 베껴 쓰는 연습이다. 말이야 가장 편한 방법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꽤 효과가 있는 방식이다. 토익 스피킹, OPIC, 토플 WRITING 등 어디에서도 합격 수기를 검색할 때마다 종종 등장하는 세간의 외국어 비법이다. "처음에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모범 답안을 30개 따라 해 봤더니 어느새 실력이 늘었어요, "와 같은 후기들. 외우는 건 쉽지 않더라도 베껴 쓰는 건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건, '모범 답안'이 따로 존재하는 경우에만 써먹을 수 있다. 만약 이 방법으로 다른 외국어를 공부한다면, 예를 들어 내가 영자 잡지 이코노미스트를 읽고 요약 쓰기 연습을 한다면, 따로 모범 답안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때는 별 수 없다. 스스로 피드백을 해야 한다. 방금 전 35분 동안 '외워서 요약한' 작문을 펼쳐놓고, 원문 지문을 그 옆에 함께 펼쳐둔다. 아마도 내가 쓴 글이 한없이 유치하고 초라해 보일 것이다. 그러니 이번엔, 내가 쓴 초등학생 수준의 표현들을 하나하나 원문의 표현들로 바꿔치기를 한다. 그러니까, 내가 공백에서부터 쌓아 올린 글의 틀과 문장 구조는 남겨두고, 세부 재료들만 (단어, 주요 표현)만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서 꼭 외국어로 글을 써야만 하는가? 공교롭게도 이 모든 건 브런치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한국어가 아닌 다른 외국어로도 글을 쓰고 싶어 진 건. 


처음으로 내 글이 다음 메인에 소개되어 조회수가 천을 넘었을 때, 그러다 또 한 편의 글이 팔만 명 넘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을 때, 나는 아주 오랜만에 온 몸이 짜릿할 정도로 행복해졌다. 유튜버도, 인플루언서도, 강사도 아닌 일개 직장인 신분이지만 브런치라는 하나의 플랫폼을 통해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가 닿은 것이다.


그렇게 브런치의 조회수의 달콤한 매력에 취했을 즈음 나는 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매일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공부를 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내가 품고 있는 어떤 이야기들은, 한국이라는 국경을 너머 더 넓게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고.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나에겐 있었다. 예를 들자면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고 나서, 우리가 맞이한 코로나 시대라는 현실과 카뮈의 소설을 연결 지어 리뷰를 남긴다면 그건 꼭 한국인들 사이에서만 공감할 수 있는 글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글쓰기는 나이 제한이 따로 없으니까. 지금 내 외국어 실력이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에 비록 부족하다 하여도, 5년 후, 30년 후에 쓰면 또 그만 아닌가. 나는 많은 언어로 글을 쓰고 싶어 졌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준 그대와, 언젠가 Medium에서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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