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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ON 다온 Jun 05. 2024

12. 나는 나를 죽이지 않았다.

 내가 중학생 정도 됐을 때였을까, 시골에 계시는 할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건강이 나빠져서 병원에 입원하셨던 적이 있었다. 이미 그때 연세가 많으신 편이었고 계절이 계절이라서 산과 들에 나가셨다가 벌레에 물려 사경을 헤매셨다. 그렇게 누워계셨는데 우리는 그때가 할아버지와의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고,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병원에 갔다. 무거운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뵙고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있었는데 갑자기 깜깜한 내 머릿속에 할아버지가 힘겹게 기침을 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 뒤로 할아버지가 매우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이 이어졌는데 나는 그것이 아직도 환영인지, 꿈인지 판단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그 모습이 떠오른 뒤로 나는 한동안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떠나실 수밖에 없다고 해도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게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을까 생각해 보면 딱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고, 사춘기가 심해지고 부모님의 사이가 더욱 악화되면서 나는 ‘사라지고 싶다.’, ‘살고 싶지 않다.’등 나의 존재 여부에 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왜 그랬느냐 하면 가족들에게 나의 존재가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고는 특별한 교감이 없었고, 어머니하고는 대화는 했지만 어머니의 푸념을 들으며 반응을 하는 날이 많아지고 있었고 나의 이야기가 어머니에게는 그저 짜증, 예민함으로 느껴지던 때라 나는 어머니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시기에 정확하게 나의 감정 상태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다. 속에 담아둔 감정들은 생각을 망가트리기 시작했다.     

 

 우울함이 지속되는 날이 길어지면 나는 내가 왜 태어났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학교생활도 쉽지 않았고, 집 안에서의 생활도 쉽지 않았다.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고 재미있는 것도 없어지는데 왜 살고 있나 생각했다. 속에서 조절할 수 없는 분노가 계속 느껴졌다. 전보다 예민해진 나는 집 밖에서도 신경 쓰는 것이 많았다. 타인의 시선에 집착했고, 모두가 날 좋게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쳐서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하고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어머니의 푸념을 듣고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고는 했다. 학교에서 이것저것 눈치를 살펴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부모님이 큰 소리로 싸우는 것도 너무 싫었고, 그렇다고 서로를 냉랭하게 대하는 것도 너무 싫었다. 그러다가도 어느 날은 사이가 좋아진 듯 같이 다니는 것을 보면서 안심했다가도 다시 언제 냉랭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계속되었다. 분노와 우울과 불안이 공존하는 하루, 하루를 지내다 보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다치거나 아프면, 부모님은 날 봐주지 않을까?’     


그때 내가 원했던 것은 부모님의 관심, 애정이었던 것 같다. 내가 부모님에게 착한 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네가 틀렸어’라는 반응이 올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아, 이런 모습으로는 사랑받을 수 없구나.’라고. 부모님이 간혹 보여주는 애정이 담긴 눈빛과 말투를 자주 느끼고 싶어서 나는 내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 고민을 이어가다 보면 이상하게 결론이 내가 해를 당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고이든, 병이든.      


 생각이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 병이 아닌 사고라도 일어나서 지금의 힘듦이 끝나기를 원하는 날이 잦아졌다. 나의 우울은 내가 가족, 친구, 그 외 주변 인물들의 눈치를 살피며 내가 나로 살아가지 못할 때, 예민함이 유난히도 더욱 날이 설 때 심해졌다. 그럴 때면 항상 나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했다. 내가 힘듦을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에는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상황.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그럴수록 더욱 떠올랐고, 어떻게 해야 내가 고통스럽지 않게 사라질 수 있을까 생각했다. 뉴스에는 이렇게, 저렇게 스스로를 죽이는 방법이 나오는데 그 방법 중 어떤 것이 그나마 덜 고통스러울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어이가 없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힘들긴, 덜 힘들었지. 그런 것이 아니고서야 덜 아프게 가려고 하다니.’     


 작년, 우울에서 벗어 나오지 못하고 더욱 빠져들면서 나는 삶의 의지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내가 왜 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의 존재가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생각했다. 주위 사람에게 나라는 존재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고, 도움이 되는 것일까 생각했다. 민폐만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졌다. 나만 없어지면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학생시절부터 나 스스로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 자신이 너무도 무서워졌다. 버튼 하나만 눌리면 터지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학생 때는 그것이 눌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가까운 날에는 눌리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살고 있는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 시기 내 영상 플랫폼 알고리즘은 ‘우울증’, ‘번 아웃’등이 주제가 되어 다양한 영상을 띄웠다. 그 영상들 중 자해의 관한 영상이 있었는데 아무런 생각 없이 영상을 보다가 끝까지 보지 못하고 껐다. 정신건강의학 측면에서 설명하는 영상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자해의 이유와 방법을 듣다가 무심결에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픈 것이 싫다면서 사소하게 귀를 뚫으면서 느끼는 희열감과 해방감을 더욱 크게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 무심결에 했던 것이다. 평소 무덤덤하게 살다가 어딘가 상처가 나서 아프면 ‘아, 나 살아있네.’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좀 더 확실히 느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차라리 아프기라도 하면 내 주변 사람들이 나의 힘듦을 지금보다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결국 나는 나를 죽이지 않았다. 스스로를 죽이고 싶은 사람은 없다. 다만 이렇게 버티고, 저렇게 버텨보아도 해결이 나지 않을 것 같을 때 마지막 수단으로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쉽게 말해 최후의 수단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사실 장담할 수 없다. 내가 다시는 나를 없애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앞으로 나를 살리는 것에 더욱 집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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