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고창군,
나의 외갓집이 있는 곳이다.
여름방학이면 나는 항상
그곳으로 가족 휴가를 떠났다.
우리가 가는 날이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항상 마당에 나와 기다리고 계셨다.
그런 시골집에는
내가 한 번에 잠에서 깰 수 있는
알람 같은 존재가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가 그 존재였다.
지금은 어머니께서 지내고 계시는 그 집은 나의 외갓집이었다. 여름휴가 때면 항상 가던 그런 곳이었다.
어렸던 내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꽤 어렵고, 조심스러운 분이었다. 그래서 외갓집에 가면 말과 행동이 매우 조심스러워지고는 했다. 두 분 다 유교사상이 짙으신 분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얌전하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조심했다. 그렇게 조심스러워지는 곳인데도 나는 시골집이 좋았다. 어릴 때는 그냥 느껴졌던 것 같다. 조부모님들이 한없이 어린 손녀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귀여워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피부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농사만 해오던 분이라 아침잠이 없으셨다, 그래서 해가 뜨기 시작하면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하시고는 90도로 굽은 허리에 손을 얹고 집을 나서신다. 동네 한 바퀴, 할아버지께서 일구던 밭으로 다니시며 무언가를 하고 돌아오시고는 했다. 그렇게 돌아오셔서 TV를 켜고 사탕이나 종합과자 같은 것들로 살짝 요기를 하며 한숨 돌리시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되면 문턱 넘어 자고 있는 나의 발을 그 큰 손으로 감싸 잡으셨다. 그러면 반쯤 깨어있던 나는 놀라서 눈이 번쩍 뜨곤 했는데 그러면 할아버지는 '인쟈 인나야지'라고 말씀하시고는 허허 웃으셨다. 그러면 나는 '네'하고 바로 일어나고는 했다.
내가 고등학교 2-3학년 정도쯤 할아버지께서 쓰러지셨다. 그 후로 치매와 편마비가 와서 거동이 힘들어지셨다. 그런 할아버지를 할머니는 병원으로 모시지 못했다. 죽어도 집에서 죽어야 한다는 두 분의 굳은 생각이 그 이유였다. 그런 할아버지를 할머니께서 보살피셨고, 어머니가 함께하기 위해 한 달의 반, 또는 그 이상을 시골에서 머무르셨다. 그렇게 1년 정도를 집에서 보내시다가 끝에는 병원으로 들어가셨다. 어느 날 새벽에 어머니께 급하게 시골에 계신 이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할아버지에게 고비가 찾아왔다는 연락이었다. 중환자실에 누워 계시는 할아버지를 보게 되었다. 내 발을 덥석 잡던 그 손이 오랜 투병 생활을 증명해주는 것처럼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아 앙상해져 있었다. 마음이 매우 무거우면서도 말라버린 할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무서웠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할아버지와의 이별이 찾아왔다. 언젠가는 겪게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얼떨떨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와의 이별의 시간을 보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속에는 아쉬움도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살가운 애교 한 번 부리지 못한 것이 아쉬웠고, 손 한 번 제대로 잡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편찮으신 상태로 집에 계시던 때 나를 부르시더니 내 손을 잡고 어머니를 시골에 너무 오래 머무르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던 그날이 생각났다. 그렇게 나는 할아버지와의 이별을 하고 있었다.
시골집에 가면 나는 자연스럽게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조부모님을 떠올린다. 어느 날에는 문턱 앞에 앉아 있는데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내 발을 잡던 그 느낌이 느껴져서 놀라기도 했다. 이제는 어머니의 흔적이 가득 차 있지만 나는 아직도 그분들과의 추억을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