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놓아버려야 할 것을 잡고
바라고 있으니 그것이 더 고통이었다.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나의 고통이 아니라
그분의 고통이어야 했으니까
놓아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외할아버지께서 곁을 떠나셨을 때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실이 아쉽고, 안타깝기는 했지만 크게 슬프다는 감정이나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의식이 없는 상태로 긴 시간을 계셨던지라 더 그랬을 수 있고, 그 당시에 집안 어른의 종교 가치관으로 시끄러워서 누군가에게 화가 나는 마음이 더욱 커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께서 떠나시고 혼자 남게 된 할머니는 이미 연세가 연세인지라 허리가 90도로 굽으셨고, 움직임도 줄어드셨다. 그러면서 거동이 어려워지셔서 항상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고혈압에 당뇨, 빈혈까지 갖고 계셨고 치매도 진행 중인 상태라서 끊을 수 없는 약을 '먹어도 안나아.'라고 말씀하시며 할머니 입장에서는 의미도 없는 약을 매일 드셔야 했다. 이모들과 어머니는 상의 끝에 할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그것이 그래도 덜 걱정하는 방법이었다.
어머니가 시골로 거처를 옮기고 매일같이, 때로는 하루의 두 번 할머니를 보러 가셨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집에 가고 싶다며 '오늘은 데려가냐?'라며 물으신다고 하셨다. 그 물음의 어머니는 얼마나 무서운 마음으로 할머니는 타이르셨을까 생각하면 나도 덩달아 무거워지고는 했다. 그러나 이모들은 달랐다. 서울 이모는 할머니를 보러 갈 때면 퇴원이나 외출이라는 방법을 쓰며 할머니를 댁으로 모셔왔다. 이모가 시골에 계시는 며칠이라도 집에서 직접 보살피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실 때면 할머니는 눈물이 맺힌 눈과 떨리는 목소리로 '잘 있어라, 방아.'라고 아쉬움이 가득 담긴 말을 반복하셨다.
할머니의 몸과 기억은 더는 나아질 수 없었다. 병원에 계시면서도 영상통화나 직접 얼굴을 볼 때면 나를 기억하셨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를 보신 할머니에게 어머니가 '여기 누구야? 누구 왔어?'라고 묻지 '몰라'라고 답하셨다. 그날 나는 할머니와의 이별에 한 걸은 다가가게 된 것 같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어머니가 할머니를 보러 가셔서 영상통화를 걸어오셨다. 할머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낀 날이었다. 할머니를 보고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얼굴은 살이 빠져 더욱 핼쑥해져 있었고, 눈의 초점도 희미해져서 나를 더는 보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때부터 나는 할머니가 남은 시간이라도 편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출근길의 항상 기도를 하고는 했다. 나의 욕심은 버릴 테니 제발 어느 쪽이든 할머니가 편안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내가 기도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인가 할머니의 코에 생명 연장선이 연결되었다. 병원에서 할머니가 아무것도 못 드신다며 이모에게 연락을 했고, 이모들끼리만 이야기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코로 간단한 영양만 들어갈 수 있게 해 놓고 할머니가 손으로 그것을 잡아 빼지 못하게 거의 재우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화가 나고 마음이 아파서 니게 전화를 하셨고 소식을 들은 나도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슬펐다. 이야기를 들으며 셀 수 없이 주삿바늘을 꽂았다, 뺐다를 반복해서 새파랗다 못해 시커멓게 멍이 든 할머니의 손등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황인가 싶었다.
할머니와 더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이모들 뿐만이 아니다. 나도 그렇고, 어머니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어느 날엔가 '나 좀 내버려 둬.'라고 말한 할머니를 그렇게까지 붙잡아야 하는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할머니가 편안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나의 욕심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