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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의 사기꾼 Jun 12. 2018

내가 만들면 네가 사고,
네가 만들면 내가 사지


하루 종일 원고에 얼굴을 묻고 눈알이 빠질 듯이 교정을 보다가도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단골 인터넷서점에 들어가 새로 나온 책을 탐색하는 것. 아니 저기요, 방금까지 지겹도록 원고를 보고 있었다 하지 않았나요. 네, 그렇습니다. 원고를 봤지만 책을 보는 건 다른 얘기니까요.


그래도 몇 시간씩 텍스트만 뚫어져라 봐야 하는 일을 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겠다고 하는 일이 결국 책을 사는 것이라니… 현타가 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랜 시간 교정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면 예능 프로 자막도 보기 싫어진다. 길가의 간판이나 고지서에 찍힌 숫자, SNS의 게시물 같은 것만 봐도 피로감이 몰려올 정도로 활자를 멀리하고 싶은데 도대체, 책은 왜 자꾸 사들이는 것일까. 


편집자의 손에 들린 원고는 말 그대로 날것의 원고다. 단행본의 특성에 맞는 구성과 배치가 필요할 때도 있고, 문장이 너무 거칠어서 윤문을 엄격하게 해야 할 때도 있고, 사실관계를 꼼꼼하게 확인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런 날것의 원고를 만지고 다듬고 확인하는 것이 편집자의 일이다. 책이 좋아서 책 만드는 일을 택했지만 편집자는 완성된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날것의 원고를 책으로 만드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일에 지치면 남이 잘 만들어놓은 책을 보고 싶다. 내 앞에 닥친 이 고단하고 지난한 과정을 모두 건너뛰고 이미 누군가가 정성껏 완성해놓은 결과물을 속 편하게 읽고 싶은 것이다. 


교정에 지친 편집자들이 남이 만든 책을 편하게 읽고 싶어서 부지런히 책 쇼핑을 해댄다. 업무 스트레스가 쌓일수록 장바구니도 쌓여간다. 지금 만드는 책과 유사한 책은 안 된다. 그것은 책 쇼핑이 아니라 자료도서 구입일 뿐이다!(자료도서 구입도 업무다! 법카로 결제하는 모든 것은 업무인 것이다!) 


여기서 잠깐, 자신이 일하는 출판사에도 남이 만든 책들이 잔뜩 있으니 그것을 읽으면 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상하게 자사의 출간도서에는 손이 안 간다. 그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보며 동료편집자의 피로감을 간접 경험해버린 탓일까. 아니면 우리 회사 책이니까 언제든 읽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한없이 미루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게 필요한 것은 잠시나마 이 원고에서 탈출하게 만들어줄 책이야!”를 외치며 미친 사람처럼 폭풍 클릭을 해가며 장바구니를 채우고 결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 금액을 확인한다. 절약정신으로 중무장한 김생민이 빙의해서가 아니다. 굿즈를 받을 수 있는 금액을 넘어섰는가 아닌가를 확인해야 한다. 기왕 5만 원을 넘길 거라면 이벤트 대상 도서를 넣어서 굿즈를 받는 게 좋겠고, 기왕 3만 원어치를 담았다면 2만 원을 더 채워서 굿즈를 받는 게 좋겠고, 기왕 4만5천 원이 채워졌다면 전자책 하나 더 담아서 굿즈를 받는 게 좋겠다. 기승전굿즈로 이어지는가 싶지만 어쨌거나 기왕 책을 사는 김에 덤도 받으면 좋은 것이다, 그뤠잇!


오후가 되면 사무실로 오는 택배기사님이 동료들의 이름을 호명한다.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알라딘, 교보, 예스24 같은 인터넷서점 이름이 찍힌 박스를 받아드는 모습을 보면 세상 행복해 보인다. 다들 조용히 원고 들여다보면서 일만 하는 줄 알았더니 언제 그렇게 부지런히 책 쇼핑을 한 겁니까….


“뭐 샀어?”


택배기사님의 호명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박스의 주인공들 책상으로 몰려들어 동료가 어떤 책을 샀는지 구경한다. 


“야, 누가 이런 책을 사나 했는데 니가 샀네.”

“와, 이거 나도 읽고 싶었는데! 괜찮은지 알려줘.”

“오, 이 굿즈는 꽤 쓸 만한데?”  


한바탕 품평회가 이어지고 나면 택배 언박싱 의식(?)은 끝이 나고 각자 자리로 돌아가 다시 원고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그리고 피로감이 몰려올 때쯤, 늘 그렇듯이 다시 인터넷서점 페이지를 열고 장바구니를 채운다. 


그렇게 사들인 책을 읽는가, 읽지 않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사실은 그렇게 사들인 책들을 모두 읽을 시간도 없다. 어차피 ‘편집자가 신간 정보도 모르면 안 된다, 지금은 못 읽지만 일하다가 자료도서로 필요할지도 모른다, 편집자는 이렇게 시장조사를 하는 것이다, 일단 사두면 언젠간 읽을 것이다’ 등의 합리적인(?)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자잘한 시발비용이 나갈 거라면 그래도 편집자니까 책으로 탕진하는 게 낫지 않은가 하는 아름다운 자기최면을 걸어본다. 


내가 이렇게 힘들여 편집한 책도 어딘가에 있을 다른 편집자에게는 고단한 업무를 잊게 할 책이 될 것이다. 내가 기획해서 만드는 책의 예상판매량이 의심스러워 불안하다가도 어딘가에 있을 나와 같은 편집자가 적어도 한 권을 사겠지 싶어 괜한 안도감에 빠지기도 한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초판은 편집자들이 소화하는 건지도 모른다. 괜찮다. 책 만들어서 번 돈, 책 사는 데 쓴다. 역시 우리가 출판계 기둥이다.(응?)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산다. 그거면 됐지 싶다. 사장님들은 싫어하겠지만.


일러스트: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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