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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의 사기꾼 Jun 19. 2018

만화 만드는 맛

만화책은 처음이었다. 내가 만화를 편집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A출판사에 다니다가 B출판사로 이직한 상태였다. 어느 날 A출판사 선배에게 어떤 저자를 좀 만나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만화가라는 말에 나는 조금 주춤했던 것 같다. 


“만화요? 나 만화책 만들어본 적 없는데.”


선배는 일단 만화의 형태이긴 하지만 교양만화니까 니가 디렉팅할 여지가 충분하고, 만화가도 처음 그리는 거니까 한 번 출간을 검토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럴 수가. 나도 처음인데 저자도 처음이라니. 선배, 지금 상황이 더 안 좋아진 거 알죠. 


누구나 어릴 때 엄마 몰래 만화책 숨겨놓고 보다가 걸려서 죽도록 맞았다거나, 야자 시간에 몰래 만화책 읽다가 감독 선생님한테 걸려서 죽도록 맞았다거나… 하여간에 만화책 때문에 죽도록 맞은 경험은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솔직히 나는 그런 적이 없다. 죽도록 맞은 적이 없다는 게 아니라 몰래 만화를 보다가 걸릴 만큼 만화에 열광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내가 접하는 만화는 피아노학원에 비치되어 있던 <드래곤 볼><닥터 슬럼프> 시리즈와 오빠가 몰래 숨겨놓은 <슬램덩크> 시리즈, 가끔 대여점에서 빌려봤던 황미나의 <레드문>, 그리고 성당에서 정기구독했던 청소년용 천주교 만화잡지 <내 친구들> 정도가 전부였다. 편집자가 되어서도 만화를 편집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다. 

나는 결국 B출판사를 퇴사했지만 프리랜서 편집자로 일하게 되었고, 그때 내가 검토하고 미팅을 했던 만화가는 A출판사와 계약을 했으며 그와는 외주편집자와 저자 관계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모든 게 처음인 만화가와 편집자는 첫 만남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제가 처음이라 꾸벅, 고개를 주억거리기 바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우선 디자이너를 섭외했다. 노련한 베테랑이었던 디자이너 선배는 원고 파일을 받자마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니가 인디자인을 좀 배워야겠다.”


뭐라고요? 난감한 표정은 나에게도 옮겨왔다. 아니 내가 왜. 출판 프로세스를 알지 못했던 만화가의 작품은 일단 레이어와 텍스트 문제가 있었다. 만화가는 나름대로 레이어를 분리하고 프로그램을 이용해 말풍선과 텍스트를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도록 만들어왔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편집 프로그램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추가 작업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모든 텍스트를 인디자인 파일에 다시 입력해야 하는 일이 아주 큰 비중을 차지했다. 디자이너가 그걸 일일이 타이핑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만화 파일을 인디자인 프로그램에 앉히고 모든 컷박스를 균일하게 다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만화가는 일부러 저작권 문제가 없는 서체를 썼다고 했지만 그것은 출판용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서체를 바꾸고 새로 만든 말풍선에 텍스트를 다시 입력해야 했다. 만화가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후반부 원고 작업을 해야 했고 디자이너는 디자인 작업을 해야 했다. 그러니 바로 내가 그 텍스트 입력을 담당할 수밖에. 


나는 그 핑계로 아이맥을 샀다. (얏호) 물론 인디자인은 윈도우 기반 PC에서도 가능했지만 디자이너가 맥os를 쓰니까 나도 맥을 써줘야 서로 호환 오류도 없고 그러지 않을까, 하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중고 아이맥을 사서 인디자인과 포토샵을 깔았다. 나는 인디자인과 포토샵을 왔다갔다 하면서 만화 원고의 텍스트를 입력하고 교정을 봤다. 만화가는 마감일에 맞춰 부지런히 만화를 그렸다. 디자이너는 온 힘을 다해 컷박스를 만들고 시안을 만들었다.


이상하게 그 모든 과정이 싫지 않았다. 아니, 사실 너무 재미있었다. 교양만화지만 일단 만화가 그 자체로 너무 재미있었고, 일반 단행본보다 더 많은 요소를 일일이 다 확인해야 했는데도 나는 그 과정을 무척 즐기고 있었다. 그림이 컷박스를 넘어가지 않았는지, 말풍선이나 나레이션 박스 안의 텍스트가 넘치거나 정렬이 맞지 않은 것은 없는지, 박스 안에서는 어느 지점에 행갈이를 해야 하는지, 100%, 70%, 40%로 정해둔 먹의 농도가 잘못 들어가진 않았는지, 효과음의 서체가 깨지지 않았는지, 별면 페이지의 제목은 적절한지, 텍스트 분량이 넘치거나 부족하지는 않은지, 만화 속 유머코드가 보편적인 사회 정서에 반하지는 않는지, 역사적 사실이나 연도, 단체 이름, 인명, 지명이 틀리지 않았는지… 모든 것을 확인해야 했는데도 즐거웠다. 


디자이너는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작업 중에 염두에 둬야 할 것들을 미리 체크해줬다. 만화가는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피드백을 꼼꼼하게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반영했다. 나는 삼각김밥을 잔뜩 사들고 디자이너의 사무실로 가서 밤새 수정을 했다. 교정지에 표기한 것만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섬세한 수정사항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키며 책을 만들었다. 어쩐지 우리는 손발이 척척 맞았고 만화는 점점 그럴듯한 꼴을 갖추어갔다. 아, 이 맛에 만화 만드는구나.


만화를 읽는 재미와 만화를 만드는 재미는 분명 달랐지만 하나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았다. 이야기가 있고 그림, 대사, 나레이션, 효과음, 배경 묘사, 그리고 교양만화에는 정보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져야 만화가 된다. 만화를 만드는 과정은 그 모든 요소들을 함께 만들고 조합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유난히 호흡이 잘 맞는, 그러나 매우 많은 일을 해야 했던, 그러나 그 과정이 몹시도 재미있었던 그 만화가 입고되던 날. 나는 만화 주인공처럼 내적 환호를 내질렀다. 


“오예! 나왔다!(둠칫둠칫 두둠칫)”


일러스트: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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