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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의 사기꾼 Dec 31. 2019

여권 없이 여행서 만들기

나는 여권이 없었다, 무려 서른한 살 때까지. 나의 첫 해외여행은 서른한 살에 떠났던 신혼여행이었으니 그때까지 여권이 없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쩌다 그 나이가 되도록 여행 한 번 떠나지 않았을까.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돈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시절 부지런히 알바를 해서 방학이면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오거나 어학연수를 가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는데, 나는 어째서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욕망하기란 쉽지 않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한 사람이라면,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떠난다는 논리가 성립하겠지만 나는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무엇이 그토록 아름답고 즐거운지 궁금해하기보다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세계를 누빈다고 상상하면 공포와 불안이 앞섰다. 그러니 경험하지 못한 것을 욕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두렵기까지 했으며 그 어떤 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첫 출판사에 들어가서 처음 만들 책으로 주어진 것이 남미 여행기라니! 

여행에 좀처럼 관심이 없으니 여행기를 읽는 것도 지독히 싫어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빈대에 물려 고생하고 기차를 놓치고 소매치기를 당했지만 그럼에도 여행은 나를 성장시킨다 어쩌고 같은 얘기를 읽으며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재미를 느껴야 하는지 당황스럽기만 했다. 특히 지리적인 부분을 묘사할 때는 졸음이 몰려왔다. 지명인지 인명인지 거리 이름인지 가게 이름인지 강의 이름인지 산의 이름인지 알 수도 없는 외국어 이름들이 쏟아지면 무의미한 활자들의 나열처럼 느껴졌다. ‘어느 거리의 어느 가게를 끼고 돌아 300미터쯤 올라가면 7층 높이의 웅장한 △△△△성이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같은 설명은 ‘목성은 태양과의 무게중심이 태양의 체적 바깥에 위치한 유일한 행성으로, 그 무게중심은 태양 표면으로부터 태양 반지름의 7% 밖에 위치한다.’처럼 읽혔다.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을 상상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여행을 자주 다녀본 사람이라면 일본이나 동남아 같은 인기 여행지와 아프리카 대륙이나 남아메리카 대륙 같은 먼 땅 사이에서 이질감도 크게 느꼈겠지만 여권도 없는 나에겐 다 똑같이 낯설었다. 그나마 내게 주어진 여행기는 나름 ‘인문학자’의 ‘인문학적인’ 여행이라는 콘셉트를 갖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여행기’라는 것은 변함없었다. 그리고 엄청난 외래어표기법의 폭격을 맞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하나의 대륙에 하나의 언어만 사용되지 않으므로 저자가 브라질을 여행할 때는 포르투갈어 표기 원칙을 따르고 아르헨티나에 갈 때는 스페인어 표기 원칙을 따라야 했다. (그나마 두 가지 언어로 끝났다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모든 게 처음이었던 나는 그야말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표준맞춤법열람을 뒤적거렸다. 쿠바의 도로를 달리면서 도로 왼쪽으로 카리브해가 넘실대며 방파제를 때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뜨거웠다는 저자의 감상 같은 게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지금 맞춤법의 바다에서 외래어표기법의 파도가 눈알을 철썩철썩 쳐대고 있단 말이다! 


게다가 출판사 사장은 돈을 아껴보겠다고 100컷이 넘는 필름사진들을 업체에 맡겨 드럼스캔을 하지 않고 내가 직접 평판스캔할 것을 명했다. 어차피 스캔 품질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는데, 차라리 돈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으면 덜 미웠을까. 사진 한 장을 스캔하는 데에 5분이 걸리는 구식 엡손 스캐너에 사진을 넣고 포토샵으로 불러내 보정하는 것까지가 내가 할 일이었다. 웽웽거리는 팬 소리와 드르륵 드르륵 하드디스크 긁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굴러가던 고물 컴퓨터는 자주 다운되며 멈췄다. 욕이 턱까지 차올랐다. 


안그래도 여행하는 저자의 이야기에 전혀 공감하지 못해서 교정보는 게 죽을 듯이 지루한데, 환장할 것 같은 외래어표기법에 사진까지 직접 스캔을 하고 있으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게다가 이 책을 디자인할 디자이너가 필요하니 관성에 물들지 않은(경력이 적은), 참신한(경력이 적은), 그러나 노련한(???), 그러면서 작업비가 비싸지 않은(경력이 적은) 디자이너를 섭외해오라는 미션까지 떨어졌다. 이렇게 이미지가 많고 요소가 복잡한 여행서를 작업해줄 창의적이면서 노련하고도 저렴한 디자이너는 사장의 망상속에나 있는 것이었다. 있는 인맥 없는 인맥을 모두 짜내어 겨우 실력 있는 디자이너를 섭외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작업비를 말할 때 나는 정말 창피해서 온몸이 짜부라드는 것 같았다.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라고, 이 사장놈아.)


여권도 없던 나는 첫 여행서를 만든 이후 미국, 태국, 북유럽, 서유럽, 일본, 홍콩, 대만 등 온갖 유명 여행지를 싸돌아다니며 여행의 재미를 알아버렸다. 물론 그 여행서 덕은 결코 아니다. 필름사진 같은 건 당연히 업체에 맡기고 외부 인력에게도 정당한 보수를 지급할 능력이 되는 출판사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아쉽게도 여행서를 만들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여행서를 또 만들게 된다면 저자와 마주 앉아서 여행지에 대해 무박4일 동안 떠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정말 재밌게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 환장할 첫 여행서에 운을 모두 뺏겨버린 것 같다. 젠장.


일러스트: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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