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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의 사기꾼 Jul 16. 2018

편집자의 직업병

회사 엘리베이터 문 옆에 사내 캠페인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 포스터에는 띄어쓰기가 잘못된 부분이 있었는데 누군가 볼펜으로 ‘∨’ 표시를 해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오지랖 넓은 편집자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 부분은 띄어 쓰는 겁니다, 네?”


편집자만 100명이 넘는 회사에서 띄어쓰기가 틀린 문구를 사내 포스터에 넣다니. 내가 담당자였다면 교정을 열두 번쯤 보고도 불안해서 크로스체크를 열두 명에게 부탁했을 것 같다. 그곳은 맞춤법 틀린 것만 봤다 하면 눈알을 부라리며 잡아내는 편집자들로 득실대는 출판사가 아니던가.


편집자들의 이런 직업병 증상은 사실 아주 흔하고 새삼스럽지도 않다. 공공장소의 안내문, 상품의 사용설명서, 웹사이트의 공지 등 그 어떤 텍스트를 봐도 자기도 모르게 틀린 맞춤법이나 오탈자가 매직아이처럼 부우웅 하고 떠오르는 증상은 편집자 1년 차만 되어도 흔히 겪는 일이다. 자신이 담당하는 원고에서도 그렇게 잘 잡아내는가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교정을 수없이 봐도 책이 나오면 꼭 다른 사람 눈에 오탈자가 발견되곤 하는데, 남의 실수만 잘 보인다는 것도 이 병(?)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편집자 친구 중 하나는 카톡 같은 메신저에서도 문장이 끝나면 반드시 마침표를 찍는다. 띄어쓰기, 맞춤법이 정확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문장부호도 어찌나 꼼꼼하게 사용하는지 내가 지금 사람이랑 대화하고 있는지 AI랑 대화하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다. 언젠가 어떤 친구는 메신저로 대화하던 중에 내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지적했는데, 초 단위로 문장이 오고 가는 와중에 맞춤법을 지적하고 있는 편집자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니 한숨이 나왔다. 어떤 상사는 면대면으로 말을 하는 도중에도 맞춤법 지적질을 하곤 했는데 상사만 아니었다면 멱살을 잡았을 것이다.


지적하는 게 업무인 편집자들은 남의 지적에도 매우 예민해서 사내 공지 하나를 올릴 때조차 교정을 본다. 비문은 아닌지, 문장부호는 제대로 썼는지,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틀린 건 없는지, 가독성은 좋은지 몇 번이고 검토하느라 상당한 시간을 들인다. 어떤 일의 영역이 잡무에 해당되는 것이라도 문장을 다루게 된다면 편집자에게는 메인업무에 준하는 일이 된다. ‘편집자가 문장도 제대로 못 쓴다’, ‘편집자가 맞춤법도 틀린다’가 ‘저 편집자 일 못하네’로 이어지면 어떡하나 전전긍긍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보고서나 기획안, 신청서 같은 지극히 기능적인 문서를 볼 때조차 행간, 자간, 장평 등이 알맞지 않아 가독성이 떨어지면 견디지 못한다. 나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공문서인데 정말 환장할 것 같다. 어차피 내용 전달만 되면 되는데도 나는 문서를 열면 일단 서체를 바꾸고 행간, 자간, 장평 등을 조절한다. 문서가 길어서 오래 읽어야 하는 것이라면 PDF로 만들어 아이패드에 넣는다. 보통 검토해야 할 원고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아이패드에 차곡차곡 쌓인다. 뭐든지 책을 보는 것처럼 읽어야 제대로 읽은 것 같은 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편집자들은 어느 국가로 여행을 해도 서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거나, 서점에서 책을 볼 때 항상 판권부터 펼쳐본다거나, 책날개를 뒤집어 디자이너의 이름을 확인한다거나, 종이를 만지며 종류와 무게를 가늠하거나 하는 일들이 이미 습관이다. 신문이나 잡지를 볼 때 필자 이름부터 확인하고 해당 필자의 저서는 없는지 찾아보고 개인 SNS 계정을 알아내고 다른 기고문은 없는지 살피며 어떤 주제와 콘셉트로 책을 집필할 수 있을지 떠올리고 판매 사이즈는 얼마나 나올지 계산하는 내 모습을 자각하며 소스라치게 놀란 적도 많다. 왜 혼자 머릿속으로 책을 만들고 있는 것이냐….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도 편집자의 눈에는 다 잠재적 저자로 보인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대화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이 사람의 콘텐츠는 무엇인가 생각하며 저자로서의 가능성을 가늠하게 되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프리랜서가 되면서 이런 증상들은 조금씩 사라졌다. 나는 이런 모든 증상들이 편집자의 직업병이라고 생각했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보니 직업병이라기보다는 성과에 대한 압박감의 발현이 아니었나 싶다. 항상 새로운 것을 기획하고 만들어내서 매출을 달성하거나 실력 있는 출판기획자로 인정받는 것. 그에 대한 열망과 부담이 직업병이라는 껍질 아래 숨어 있었던 게 아닐까. ‘어이쿠, 이런. 편집자 직업병이 또 도졌네’ 생각하며 ‘언제 어디서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나’의 모습에 도취되어 ‘아직 성과는 없지만 곧 생길 것’이라는 게으른 착각 속에 안도감을 느꼈을 뿐인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사소한 증상들도 있다. 나는 구글 검색창에 서재 인테리어, library, study room 같은 검색어를 넣고 세상의 모든 책장과 책상들을 구경하는 취미가 있는데, 햇살이 쨍하게 들어오는 서재에 거대한 책장이 펼쳐진 서재나 도서관을 볼 때마다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급격히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안 돼! 저러면 책등 다 바랜단 말이야!’


일러스트: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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