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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의 사기꾼 Dec 31. 2019

편집자처럼 생각하기

1.

오랜만에 서점에 왔다. 일단 대형서점에 왔으니 입구부터 시작할까, 내가 좋아하는 분야부터 시작할까. 아니다, 베스트셀러 순위 매대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떤 책이 잘 나가는지, 어떤 작가가 주목받는지부터 파악해야지. 몇 주째 1위를 지키는 책이 보인다. 나는 도무지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책이지만 일단 한 권 사기로 한다. 독자들이 지금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하니까. 


요즘 눈에 띄는 책들 중에 에세이가 많았으니 일단 에세이 매대로 이동해보자. 그런데 요즘 에세이들은 표지디자인을 하지 않는 것이 트렌드인가? 언뜻 보니 작은 무지노트들이 모여 있는 것 같다. 판형은 문고판처럼 작고 표지에는 제목 외에는 디자인 요소가 전혀 없거나 작은 일러스트 소컷만 들어간 책이 수두룩하네. 이러다가 언젠가는 제목도 없이 ‘빨간책’ ‘파란책’ ‘초록책’으로 기억되고 불려도 이상할 것이 없겠군. 


제목이 문장형인 책이 많아서 잘 외워지질 않는다. 게다가 한결같이 종결어미가 없어! 좀 뜬금없는 문장형 제목들은 마치 모르는 사람의 귀에 대고 느닷없이 아무 말이나 외치고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맥락 없는 제목은 득일까, 독일까. 어떤 책인지 알 수가 없으니 그냥 지나쳐버릴까, 오히려 궁금해져서 들여다보게 될까. 전에 다녔던 출판사였다면 이런 제목은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것이다. 설령 통과된다 해도 ‘독자의 이해’를 위해 친절한 부제를 붙이라고 했겠지. 어휴 지긋지긋해. 


좋아하는 작가의 새 에세이가 보인다. 제목이 <하필이면 네 번째 발가락에 힘이 없어서>라니, 역시 대세를 거스르지 않는 느닷없는 제목이다. 판형이 작아서 한손에 쏙 들어오는데 본문이 너무 빽빽하다. 눈에 힘을 주고 몇 장 읽어본다. 가볍고 편안한 에세이의 옷을 입고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를 써도 되는 것인가. 컨셉을 이렇게 할 거였다면 원고를 전면 수정하든가, 원고를 뒤집는 게 힘들다면 컨셉을 좀 더 묵직하게 잡았어야 했는데. 저자 소개도 너무 감상적이라 원고와의 괴리가 너무 크잖아. 신규독자에게 어필하기에는 저자 정보가 너무 부족하군. 원고 결이 들쭉날쭉한 걸 보니 연재분을 모아서 낸 것 같은데 결이 안 맞는 이 챕터와 저 챕터는 과감하게 빼는 게 좋을 것 같고, 그러면 분량이 안 나올 테니 200매 정도는 새로 집필해달라고… 아니, 잠깐!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2.

편집자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시도해본 적이 있다. 다들 출판사에 다니고 있고 만나면 자연스럽게 책 이야기를 하게 되니 이럴 바엔 우리도 독서모임 같은 걸 해볼까 마음을 모은 것이다. 책 한 권을 정해서 함께 읽고 감상이나 의견을 나누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일단 같이 읽을 책 한 권을 정하는 게 쉽지 않다. 책 만드는 일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각자 취향과 관심사가 다르니 어쩔 수 없었다. 어떤 책은 최근에 주목받는 도서니까, 어떤 책은 베스트셀러라는데 왜 잘 팔리는지 궁금해서, 어떤 책은 재미있다는 입소문이 있으니 읽고 싶어서. 


겨우 의견을 모아 책을 정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편집자 독서모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책 만드는 사람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책 읽을 시간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업무 때문에 읽어야 할 책도 다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또 무언가를 ‘읽어야만’ 하는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다니. 역시 욕심이 지나쳤다.


이 모임은 독서모임이 아니라 편집회의가 되어가고 있었다. 목차 구성이 탄탄하지 못하다, 이 부분은 원고를 더 보완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행간이 너무 빡빡해서 가독성이 떨어진다, 제목이 너무 불친절하다, 띠지 카피를 잘 썼는데 디자인이 안 받쳐준다, 대상 독자 설정을 잘못하고 마케팅을 한 것 같다… 아니 이것은 흡사 회사 내부에서 출간 뒤에 진행되는 평가회의 같은데? 우리 독서모임하고 있는 거 맞아? 


가끔은 온전히 독자의 마음으로 책을 대할 수 없게 된 것이 조금 슬프다. 업자(?)의 영혼이 독자의 영혼을 밀어내버렸달까. 편집자가 되기 전에는 서점에 가면 읽고 싶은 책을 고르기 바빴는데, 어느샌가 매대를 훑어보며 트렌드를 분석하는 사람이 돼버렸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오면 무조건 읽었는데 이제는 작가를 맹목적으로 좋아할 수 없게 되었다. 책을 보면 책이 아니라 원고가 보여서 편집 전의 상태를 상상하고 가정법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뭔가 책을 대하는 생각의 틀이 뒤집힌 것일까. 이런 과정이 재미있고 즐거워서 편집자가 된 것이지만, 이러다가 나도 모르게 독서의 즐거움을 서서히 잃어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가끔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고 싶은 책을 원없이 읽고 싶다. 책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지 않게 되면, 그런 날이 온다면 좀 편해질 수 있을까.    

일러스트: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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