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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의 사기꾼 Jan 02. 2020

그리고 아무도 몰랐다

“미스터리(mystery)  「명사」

「1」 도저히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일이나 사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하는 ‘미스터리’의 의미는 이렇다. 그런데 이런 미스터리한 일이 책을 한 권씩 만들 때마다 매번 벌어지는 것만큼 미스터리한 일이 또 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수천 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판본을 찍었을 <성경>에도 오탈자가 있을까?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편집자(?)들이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니까 오탈자 따위는 한 개도 없지 않을까? 그러나 편집자들이 겪는 오탈자 미스터리를 생각하면 어쩐지 <성경>도 예외는 아니겠지 싶어 약간 마음이 놓일 때가 있다(아니야, 마음 놓지 마…).


책 만들 때 교정을 아무리 여러 번 봐도 인쇄소에 데이터를 넘기기 직전까지 엉덩이가 불안하다. 책이 나오면 생전 처음 보는 오탈자가 반드시 발견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내가 그렇게 교정을 많이 보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는데! 편집장님이랑 크로스 체크도 했는데!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오탈자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무릎을 꿇고 내적 오열을 한다. 표지의 경우 사장님이나 편집주간 같은 상사까지 트리플 검토를 하는데도, 저자 이름이 잘못 들어갔다든지, 영문 철자가 틀렸다든지, 황당한 오자가 떡 하니 인쇄되어 나오는 일도 드물지 않다. 눈물을 흘리며 정오표를 만들어 넣거나 스티커 작업으로 오자를 바로잡는 일까지 해야 할 지경이 되면, ‘잠깐 이 장면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싶어서 두 배로 오열한다. 이 오탈자 미스터리를 해결해줄 명탐정이 나타나 봤자 소용없다.


“모두 모이세요. 범인은 이 안에 있습니다!” 

“모두 돌아가세요. 범인은 접니다.”

“…….”




교정지가 제 발로 걸어 나간 듯이 감쪽같이 사라질 때가 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정말 말도 안 되는데 말이 된다.

이제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원고를 한글파일 상태에서 쓱 보고 인쇄하면 바로 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원고를 책으로 만들려면 책과 똑같은 상태로 편집디자인을 하고 그것을 출력해서 여러 번 교정교열을 하며 확인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전체 편집 과정에서 가장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종이에 출력해 빨간펜으로 수정할 부분을 체크해놓은 ‘그’ 교정지를 잃어버리는 사태는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몇십 장에서 많게는 몇백 장에 달하는 교정지가 어떻게 통째로 사라진단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책상을 다 뒤집어엎어도 책장의 먼지를 사방팔방에 흩날리며 구석구석 요란하게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 두고 온 것도 아니고 집에도 없고 사무실에도 없고 화장실에도 없다. 교정지에 발이 달려 스스로 걸어 나간 게 아니라면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안 된다. 교정지를 찾지 못하면 나는 교정지를 새로 뽑아서 처음부터 다시 교정을 봐야 한다. 그 끔찍한 장면을 상상하며 내적 비명을 지른다. 이것은 밀실살인, 아니 밀실가출이다. 명탐정이 아니라 고양이탐정을 불러야 할 것 같다. 탐정님, 우리 고양이 아니 우리 교정지가 가출한 것 같아요. 제발 좀 찾아주세요. 




마감이 닥치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 때문에 끙끙거리며 밤새 일을 한다. 그러면 남편이 쓰윽 지나가다가 기어이 한마디를 한다. “그러게 미리 좀 하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 주먹은 벌써 남편의 턱 밑에서 멱살을 쥐고 있다. “니가 뭘 알아!” 


처음에 일정을 받을 때는 아주 현실적이고 타당한 일정이다. 나에게 일을 주신 갑님께서 일방적으로 내던진 요구가 아니라 쌍방 합의하에 잘 짜놓은 일정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마감’이라는 것을 앞두기만 하면 갑자기 없던 일이 생긴 것처럼 늘 시간이 부족한가. 자잘한 변수가 생길 때도 있고, 때로는 내부에서 출간 일정이 조금씩 조정될 때도 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마감을 앞두고 일이 폭발하지 않은 적은 없다. 


아무리 넉넉한 일정도 소용없다. 마감이 닥치면 모두가 급해진다. 그동안 일을 안 한 것도 아닌데 마감하려고 보면 할 일이 너무 많은 것이다. 다음에는 일정을 더 넉넉하게 잡아야지, 생각하며 마감기한을 늘려도 소용없다. 마감의 풍경은 늘 똑같다. 마감을 영어로 데드라인(deadline)이라고 하는 건 혹시 ‘일하다 죽을 것 같으면 줄을 서라’는 의미인가. 


책을 만들 때마다 매번 일어나고 매번 이유를 알 수 없고 매번 반복되는 이 괴이한 패턴의 사건들이야말로 나에겐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뮤지션들은 녹음할 때 녹음실 귀신이 나오곤 한다는데, 나도 머리 쥐어뜯으며 자학하게 되는 이런 미스터리 말고 차라리 인쇄소 귀신을 보고 싶다. 


“귀신님, 이 책 대박 날 것 같습니까?”

“귀신도 모른다.”


일러스트: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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