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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의 사기꾼 Jun 15. 2018

언제까지 편집자로 살 텐가

어느 팟캐스트에 출연해 편집자의 일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마감이 다가오면 일이 많아져서 야근을 하기도 하고 철야를 하기도 한다고 했더니 진행자가 이렇게 물었다. 


“어차피 출간 날짜는 출판사가 정하는 것 아닌가요?” 


이 날짜에 책을 출간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일정이 너무 빠듯하면 자체적으로 마감일을 조정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의미였다.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사실 편집에는 완벽한 끝이라는 게 없다. 그래서 임의로 정해둔 마감기한이라는 게 없다면 편집은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개인적으로 교정을 8교까지 본 적도 있다. 맙소사.) 아무리 완벽하게 교정을 보고 각각의 편집 요소를 확인한다 해도 오탈자가 단 1개도 나오지 않거나 실수가 단 한 군데도 없을 수는 없다. 편집은 정답을 향해가는 과정이 아니라 최선의 상태를 향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상태에서 만족(?)하고 끝내는가, 언제 손을 놓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편집자의 중요한 임무인 만큼 편집자의 역할과 효용에 대한 평가 역시 절대적일 수가 없다. 어느 정치인의 자서전 원고가 편집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장 인쇄소로 직행했으나 출간기념회 한 번이면 초판이 모두 팔려나가기도 하고, 수개월에 걸친 편집의 과정 끝에 어렵게 출간된 책이 초판은커녕 배본부수도 소화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원고를 구성하고 교정교열을 하고 편집의 요소들을 확인하는 일련의 과정들에 대해 우리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라는 명분을 이야기한다. 가와사키 쇼헤이의 만화 <중쇄미정>에 등장하는 편집장은 친절한 소제목을 붙이기 위해 고민하는 주인공에게 “소제목이란 독자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는 건 대체 뭘까. 띄어쓰기나 맞춤법 같은 기본적인 요소조차 바로잡히지 않는 책이라도 그 안에서 충분한 독서 경험을 하는 독자가 있는 반면, 한두 개의 오탈자만 발견되어도 책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자신의 독서를 망친 불량품이라며 환불을 요구하는 독자도 있다. 


가끔 세상의 모든 편집자가 사라져도 책은 나올 거라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 ‘편집’이라는 일을 하지 않아도 책이라는 형태의 상품은 어떻게든 나올 것이다. 굳이 출판사를 거치지 않아도 스스로 글을 쓰고 책을 만들어 유통할 수 있는 세상이 왔고, 책의 완성도는 편집자의 역량만으로 결정되어질 수 없는 것이니 편집자가 없어도 훌륭한 책들은 만들어질 수 있다. (아, 나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건가.) 


가까운 미래에는 책의 형태가 달라질 수도 있다. 이미 전자책이라는 새로운 책의 형태가 등장했으니 또 다른 형태의 책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그러면 편집자의 일도 달라질 것이다. 어쩐지 달라진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축소될 것 같다는 비관적인 생각도 든다. 아니, 편집이고 뭐고 책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지나 않으면 다행일까. 책 만드는 일이 즐겁고 재미있다가도 불현듯 이런 불안에 시달리곤 한다.


“뭔가 엄청, 엄청 바빴거든. 뭔가를 막 열심히 해서 책이 쨘 나오고 보면 기분이 엄청 좋은데, 생각해보면 또 내가 뭘 했는지 모르겠다니까. 내가 만든 책이 아닌 것 같아.”


마감을 마친 편집자들을 만나면 이런 푸념을 자주 듣는다. 분명 굉장히 바빴고 일도 많았는데 일의 결과가 쨘! 하고 나오면 그동안 내가 뭘 했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맞아, 맞아, 맞장구를 치지만 이게 어떤 느낌인지 다른 사람들에게 어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최면에 걸린 것처럼 일의 흔적들이 스르륵 사라지고 모든 게 다시 리셋되는 것 같다. 


한 편집자 친구는 이런 자신의 일을 가족에게 설명하려 애쓰다가 ‘편집은 한 땀, 한 땀 손바느질을 하는 것과 같다’고 했더니 대뜸 “재봉틀로 하면 안 돼?”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 안 된다. 다소 미련해보이고 느리고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지만 재봉틀이 대신할 수는 없는 일. 결과만 놓고 보면 손바느질과 재봉틀의 바느질이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결코 같지 않은 일. 


그래서 그저 묵묵히 이 일을 해내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언젠가 이 과정을 모두 건너뛰고 어디선가 광속으로 달려오는 재봉틀에 치어 죽게 되지 않을까. 내 일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고, 나의 역할이 소멸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독자의 비위를 맞추거나, 독자의 눈높이를 배려하거나,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는 것. 이토록 추상적이고 위태로운 일의 한가운데서 언제까지 흔들리지 않고 원고를 마주할 수 있을까.  


일러스트: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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