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 2편: 분하다 분해
근데 세상에 나에게도 잘하는 게 있긴 있었다.
포핸드는 복장 터지게 못하는데 이상하게 백핸드와 발리는 잘하는 것이다.(*포핸드는 라켓을 잡은 손의 바닥이 앞쪽을 향하도록 스윙하는 것, 백핸드는 라켓을 잡은 손의 등이 앞쪽으로 향하도록 스윙하는 것. 발리는 바운드되지 않은 공을 바로 쳐서 네트 너머로 넘기는 것-으로 이해했음)
그냥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코치님도 어라? 발리는 잘하네? 발리왕이네? 이러면서 당황스러워했다.
(빌리) 진상 킹인 줄 알았는데 발리 (진) 킹이었어 내가?
내가 생각해도 포핸드를 이렇게까지 못치는데 어째서 백핸드와 발리는 물흐르듯이 되는지 이해가 안 됐다. 이후 나는 3명의 코치를 더 겪었는데 그들의 공통적인 평가는 "포핸드는 쓰레기, 백핸드는 나이스, 발리는 최고되네"였다.
문제는 테니스의 꽃! 테니스의 에쎈쓰! 테니스의 핵씸!은 포핸드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기본 젓가락질 같은 거다. 젓가락질은 못하면서 젓가락으로 맥주병 따기, 젓가락으로 김치 찢기, 젓가락으로 파스타 예쁘게 담기 같은 걸 잘한다고 뽐내봤자 소용없다. 포핸드를 못하면 정말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레슨이란 무엇인가." 익숙하지 않은 어떤 스킬을 익숙하게 만들기 위하여 약간의 코칭과 함께 계속해서 같은 행위를 반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코치는 공을 던진다. 나는 그 공을 쳐낸다. 공을 던진다. 공을 친다. 던진다. 친다. 던진. 친. 던.친. 지겹다. 어느 순간 이 반복 동작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쌤, 저는 언제 게임해요?"
코치님은 말이 없었다. 아마도 속으로 저게 미쳤나 싶었을 거다. 저따위 스트로크로 게임이라니, 아마추어테니스계의 대민폐로 영원히 박제되기를 바라는 건가.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은 게임을, 그러니까 실전 랠리를 해보지 않으면 레슨만으로는 테니스의 재미를 온전히 느낄 수 없다고 했다. 그래 그건 알겠다. 나도 게임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 전에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었다. 게임을 한다고? 그러니까 나 아닌, 다른 사람이랑 같이 뭘 한다는 거지? 그럼 동호회에 들어가야 하는 건가? 동호회는 어떻게 들어가는 거지?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막 자기소개하고 인사하고 막 그런다고? 근데 내가 잘 못쳐서 공이 딴 데로 굴러가면 뒤에서 존나 욕먹는 거 아니야?
그렇다. 나는 사람 만나는 게 싫다. 모르는 사람이랑 뭘 한다는 것 자체가 싫고 무엇보다 굉장굉장굉장히 낯을 가린다. 물론 실제로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굉장굉장굉장히 사교적으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라잌 캘리포니아의 여고생들처럼 밝고 활기찬 에너지로 은은한 스몰토크, 과장된 리액션, 끊기지 않는 오디오, 연신 웃어주며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스킬을 동시에 시전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몹시 피곤할 뿐이다. 할 수는 있다. 다만 하기 싫다.
아 귀찮다.
절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종목을 골라놓고 같이 할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귀찮음을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나조차도 도통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아는 사람을 이 세계로 끌어들이는 수밖에!
A언니는 원래 지하철 한 정거장 반 정도의 거리에 살았는데 내가 꼬셔서 바로 건너편 아파트로 이사오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엿한 동네친구니까 테니스 친구로 만들어야겠다. 테니스메이트가 생기면 나중에 코트 잡아서 둘이서 치면 되자나? 희희. 그렇게 A언니와 함께 동네의 실내 테니스장에서 레슨을 시작했다. 같이 하는 사람이 없으면 정말로 영원히 손목만 아작난 채 레슨볼이나 슬렁슬렁 치다가 테니스계(!)를 떠날 것만 같았다.
확실히 같이 치는 사람이 있으니까 좋은 점이 있었다. 땡땡이를 못 친다는 것이다. 아파트 테니스장은 공동현관을 나가 몇 걸음만 걸으면 당도하는 곳에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레슨날만 되면 그렇게 가기가 싫더라. 매번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레슨을 빼먹기 일쑤였는데, 실내 테니스장은 마을버스로 3-4정거장을 가야 하고 같이 다니는 테니스메이트도 있으니 착실하게 수업에 나갔다. 게다가! 레슨이 끝나면 고기를 먹으러 다녔다. 테니스 레슨 후의 맥주와 구운 고기란.... 꿀맛... 아니 고기맛.... 츕츕.
아니, 근데, 시발, 진짜.
내가 몰 그렇게 잘못했냐! 새로운 레슨 코치는 굉장히 거슬리는, 극단적인 높낮이가 적용된 억양으로 굉장히 짜증스럽게 신경질을 냈다. 이건 뭐라 텍스트로 설명할 수 없는 엑센트라서 음성파일이라도 첨부하고 싶은데 아 진짜 들을 때마다 나도 짜증이 나서 라켓을 코치 면상에 패대기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짜 패대기칠 뻔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분하게도 이 코치새기가 잘 가르쳤기 때문이다.
손목을 꺾어대는 버릇을 고치게 했으며, 공을 퍼다 올리는 괴상한 습관을 고치게 했으며, 몸통을 회전하면서 스윙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했으며, 스윙을 끝까지 해야 오히려 공이 코트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정말 내 스윙을 나노 단위로 쪼개서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건지 끊어서 가르쳐주는데 아니 진짜 무슨 스톱모션 클레이애니메이션 찍는 줄. 그러니까, 말투도 존나 짜증나고 싸가지 없고 재수없는데 틀린 건 귀신 같이 찾아내서 고칠 때까지 그 짜증나는 말투로 줘패니까 나도 같이 짜증내면서 시발 알았어 알았다고! 하면서 조금씩 고치게 됐다는 말씀.(하지만 레슨이 끝나면 늘 분하고 불쾌했다. 신발색기.)
아 재수없어.
진짜 재수없는데 자세 진짜 많이 고쳤다.
아 재수없어.
근데 몇 달 뒤 코치가 그만둔다고 한다.
아 재수없어.
왜 그만둬요? 안 돼! 어딜 가요? 안 된다고!
아 재수없어.
짜증나는 인간이 갑자기 그만둔다니까 더 짜증난다.
짜증나는 인간한테 그만두지 말라고 하는 게 너무 분하다.
하여간에 그는 떠났다.
아 재수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