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 외전: 하면 될 줄 알았지
그 짜증나는 놈(a.k.a. 실내테니스장 코치)이 지적하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특히 죽어라 지적했던 것이 바로 스탭이었다.
"잔발!!! 가야지!!! 잔발!!! 공이 오면 가야지!!! 잔발!!!!"
아휴 꿈에서도 나올 것 같은 잔발 타령. 근데 나도 발이 안 움직이니까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공이 저기로 오면 저기로 가야 하는데 발이 땅에 찰싹 들러붙은 것마냥 얼어붙어버리면 아니 지금 니가 답답하겠냐 내가 속터지겠냐.
어떻게 하면 스탭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복싱이었다. 복싱 경기를 보면 선수들은 절대 가만히 서 있는 법이 없다. 공격과 방어는 주먹으로 하지만 위치 선정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발을 움직여야 한다. 진짜 단 한 순간도 멈추는 법이 없다. 저거다. 저걸 하면 잔발 실력(!)을 늘릴 수 있을 것 같다. 코치놈이 하도 잔소리를 해대길래 "복싱을 하면 좀 늘지 않을까요?" 했더니 당장 하라고, 복싱을 하든 뭐든 좀 하라고, 또 신경질을 냈다. 하, 신발색기.
마침 동네에 뭔가 제대로인 것처럼 보이는(영화에서나 보던 것 같은 허름한 외관의 허름한 체육관!! 관장님이 구석에서 발구락 내놓고 자고 있고 체육관 지박령 한 명이 구석에서 잽잽훅훅 하고 있을 것 같은 그런 체육관!!!) 체육관이 있어서 이번에도 뚜벅뚜벅 걸어들어갔다. 물론 내가 상상하던 그런 곳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팬시한(크로스핏+킥복싱을 함께 하고 절머니들이 바글거리는, 홍대 근처에 있을 법한 그런 힙한) 체육관은 아니었고 정말로 정통 복싱(그게 뭔지는 모른다)을 가르쳐줄 것만 같은 분위기에 살짝 반해버렸다.
복싱 체육관은 무조건 3분 운동, 1분 휴식이 반복적으로 돌아간다. 그 왜 복싱 경기 보면 띵! 하는 벨?소리? 같은 거 있지 않나. 라운드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울리는 띵! 혹은 땡! 그 소리가 3분/1분 간격으로 계속 울린다. 그러면 나는 정해진 루틴대로 그 소리에 맞춰 3분 하고 1분 쉬면 된다.
줄넘기 3라운드
섀도우복싱 3라운드
샌드백 3라운드
스피드볼 및 미트 3라운드
체력운동 3라운드
줄넘기 2라운드
마무리운동 1라운드
첫날 섀도우복싱은 어떻게 하는지 샌드백은 어떻게 치는지, 스피드볼과 미트 치기는 어떻게 하는지 한 번은 가르쳐준다. 그런데 복싱 체육관에 와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이 있었는데...
1. 거울로 내 꼬라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게 됨
미쳤다. 내 폼이 저렇게 웃기다고? 섀도우 복싱을 하는 내 실루엣이 진짜 너무 웃겼다. 저게 뭐야 대체. 내 자세를 거울로 보면서 운동을 한다는 게 이렇게 적나라하고 민망한 줄은 몰랐다. 아 제발 저것 좀 치워줘. 심지어 그 꼬라지를 나만 보는 게 아니다. 거대한 거울 앞에 서너 명의 관원들이 나란히 서서 잽잽훅훅을 하는데 아아아악 내가 제일 이상하잖아!!! 제발 저것 좀 치워줘!!!!
2. 운동 프로그램은 온전히 스스로 해야 함
첫날 오리엔테이션에서 가르쳐준 섀도우복싱, 샌드백, 스피드볼 등등은 당연히 다음날 다 까먹었다. 순서는 크게 상관 없다고 했지만 순서도 역시 다 까먹었다. 어딘가에 이 프로그램 내용이 프린트된 종이가 붙어있었던 거 같은데 글씨가 작아 잘 보이지 않는다. 누가 뭘 하라고 시켜주면 좋겠는데... 저는 내추럴 본 시킴당함이인데요... 저는 스스로어린이가 아니애오...
3. 발바닥에 불날 것 같음
진짜로 복싱은 계속해서 뛰어야 한다. 가볍게 발끝으로 총총총총 뛰어야 하는데 심지어 앞뒤로 움직이면서 뛰어야 한다. '복싱하면 팔 아프지 않아요?' '아니요? 발바닥이 존나게 아파요!'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나는 하체 힘을 제대로 쓸 줄 모르고 골반도 틀어져 있어서 하중이 지나치게 발바닥에만 쏠려 어떤 운동을 하든 발바닥이 제일 많이 아픈 것이었다. 하여간 체육관에 다녀온 날에는 발바닥을 주물럭거리느라 하루가 다 갔다.
4. 코칭을 해주긴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거울 앞에 서서 섀도우복싱을 하고 있어야 함
관장님이나 다른 코치들의 코칭을 받으려면 섀도우복싱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저 앞의 루틴들을 모두 끝내고 비로소 섀도우복싱 타임이 됐을 때 스스로 거울 앞에 서서 잽잽훅훅을 날리고 있으면 관장님이 돌아다니다가 팔은 이렇게 발은 이렇게 등등을 가르쳐준다. 하, 그렇다. 다시 1번의 문제다. 제발 거울 좀 치워줘...
그러나 코칭은 놀라웠다. 정말 미친듯이 웃겼던 나의 폼이 관장님의 코칭 몇 마디에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주먹이 가는 방향으로 몸이 따라가야 하는데 나는 주먹만 내밀고 뭔가를 피하듯이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꽥. 주먹이 왜 이렇게 안 나가나 했더니 발에 주는 힘의 방향이 틀렸다. 오! 그런 것이군. 깨달음이 왔다. 와, 나도 누가 가르쳐주면 뭔가 되긴 되는구나. "많이 좋아졌어요!"라는 관장님의 (아마도 영업)멘트에 신이 났다. 이제 슬슬 스스로 샌드백도 치고 스피드볼도 제법 박자를 놓치지 않고 칠 수 있다! 마참내! 즐겁다!
얼른 잽잽훅훅 잘해서 스파링도 하고 싶다! 여성 관원들도 많으니까 나랑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주시겠지? 와 나중에 아마추어 대회도 나가게 되면 어떡하지? 친구들한테 응원하러 오라고 할까? 나 제법 잘하는 거 같아!
근데 샌드백을 치려면 복싱글러브가 필요해서 체육관에 있는 걸 하나 주셨는데 오 시발 냄새나... 축축해... 누구야 누구 땀이야... 당장 집에 가서 개인 글러브를 주문했다. 체육관에서 신을 운동화를 주머니에 잘 넣어서 신발 선반에 놓았다. 이제 체육관에 운동화 놓고 다녀야지. 난 이제 복싱인이야!
....라고 생각한 순간 감기에 걸렸다. 아직 코로나가 흥하고 있었기 때문에(실내 마스크 의무였음) 모두를 위해 체육관에 당분간 가지 않는 게 좋겠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갔다.
(뭐라고? 이렇게 끝난다고?)
(ㅇㅇ)
* 체육관에 두고 온 운동화는 찾으러 가야지 가야지 하다가 1년이 지났고 진짜로 찾으러 갔을 때는 이미 폐기된 후였다. 한 달여의 복싱으로 내가 얻은 것은 발바닥 통증, 한 번 써본 글러브, 잃은 것은 비싼 내 운동화....